소설리스트

#41 (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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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머리채를 거머쥔 채 앤지를 제 쪽으로 확 당겼다.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났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지금의 카일은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 같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잔혹성 앞에서 앤지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게 제롬이 적당히 잘 말해 둘 거야. 며칠간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됐다든가.”

    카일은 맞닿을 듯 말 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무감하게 속삭였다. 대리석처럼 매끄럽고 균열 없는 얼굴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밀랍 인형 같았다.

    “도련님, 잠깐만요! 이거 놓……”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그대로 앤지를 서재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서고 사이의 문을 열자 L자로 꺾인 회랑이 보였다. 벽마다 드문드문 황금 촛대가 걸린 복도에는 피처럼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앤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에게 한쪽 손목을 잡혀 정신없이 끌려가길 한참, 마침내 그가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앤지가 숨을 헐떡이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헤네랄리페 정원과 이어진 계단과 조금 전 서재에서 곧바로 왔던 복도가 달랐을 뿐, 너무도 눈에 익은 챔버 앞에 와 있었다. 카일은 문을 열고 그녀를 던지듯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앤지를 푹신한 카펫 위에 내동댕이치는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도련님!”

    “여기서 며칠 동안 잘 생각해 봐.”

    카일은 차갑게 일갈하고 돌아섰다. 앤지가 기겁해서 바닥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방금 카일이 거칠게 주저앉힐 때 접질린 것 같았다.

    “도련님! 카일 도련님, 잠깐만요, 잠시만…….”

    앤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굳게 닫혔다. 자물쇠를 잠그는 둔중한 소리에, 앤지가 소스라치게 놀라 절뚝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문짝을 두들겼지만 소용없었다.

    “도련님! 이 문 열어 주세요! 제롬 아저씨! 던스트 부인! 거기, 아무도 없어요? 제발, 이 문 좀 열어 주세요!”

    한참을 그렇게 문짝에 매달려 씨름해 보고 도와달라 외쳤지만 누구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앤지는 한쪽 발목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드넓은 방을 여기저기 황망히 살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자정마다 밀회를 나누었던 방은 그녀의 기억 속 이미지와 달라진 게 없었다.

    헤드와 등받이마다 황금 사자 머리가 새겨진 침대와 소파, 벽 여기저기를 장식한 웅장한 성화 액자들, 우아한 선을 그린 티 테이블과 안락의자, 화려함의 극치 속에서도 기품이 넘치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앤지의 심정일 따름이었다. 달콤한 낙원 같았던 공간이 지금은 순식간에 사치스러운 감옥으로 바뀌어 있었다.

    앤지는 담회색 아이보리 커튼이 늘어진 아치형 창가로 다가갔다. 3층 높이였지만 하나만 열려 있어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목청껏 소리쳐 바깥 일꾼들의 주의를 끌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침대보를 찢어 밧줄처럼 사용해 아래로 내려가야 하리라.

    창은 모두 잠겨 있었다. 침대와 동떨어진 욕실 벽에는 조그만 환기용 창이 나 있었다. 다행히 그것만은 열려 있었지만 탈출하기엔 너무 높고 작았다. 강아지 크기의 작은 동물만 간신히 빠져나갈 크기였다.

    앤지는 방 한가운데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도련님의 모습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격렬하게 매달리며 울듯이 애원하던 모습, 갑자기 낯선 타인처럼 돌변했던 얼굴이 뇌리에서 빠르게 교차했다.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이 방에 끌고 왔을 때. 그 거칠고 잔혹하던 눈빛도 믿기지 않았다.

    그는 본래 늘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침대 위에서는 종종 자제력을 잃고 거칠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폭발 직전의 열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그 광폭함은 열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금 전의 차디찬 난폭함과는 궤가 달랐다.

    “카이…….”

    늘 다정하고 따스했던 그가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래 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녀를 더 괴롭히고 힘들게만 할 뿐인데 왜 그걸 모를까.

    앤지는 더는 탈출구를 찾는 것을 포기한 채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결국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가 레티샤와의 결혼에서 기어이 2세까지 볼 것이란 사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정부로 옆에 붙들어 두겠다는 확고한 의지, 둘 중 어떤 것이 더 절망적인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 * *

    마르틴은 휴일을 맞아 빈터가르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항구 앞에 서 있었다. 날이 무척 쾌청했다. 선착장은 어선과 범선들이 활기차게 출항과 입항 지점을 번갈아 오가고 있었다.

    항구 구석에는 곧 완성될 증기선과 선박을 위한 도크가 마무리 작업 중에 있었다. 최초의 기선이 인류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클 터였다. 그의 시선이 튼튼해 보이는 목재 범선 한 척에 가 닿았다. 예비 장인인 빌렘이 대여해 둔 고속 클리퍼선, 커스틴 호였다.

    그때 초로의 남자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범선의 주인이자 선장인 조지 커스틴이다.

    “어서 오게, 마르틴. 일정 변경에 대해 듣고 온 모양이구먼.”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장님.”

    두 사람은 악수와 근황을 나누며 선박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며칠 전 빌렘 반 아미티지를 통해 항해 날짜를 좀 더 미뤄야 할 수도 있다고 알려 왔었다. 2월 말쯤 출항하기로 했던 시기에 폭풍이 예상된 까닭이다.

    최근 해양을 중심으로 한 종관기상학이 각광을 받으며, 어업 종사자들은 그에 바탕한 해상 예보에다 다년간의 경험을 더해 폭우나 태풍이 올 시기를 어림잡아 점치곤 했다.

    “마스트는 충분히 튼튼해. 그래도 폭풍우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편이 낫지.”

    “말씀은 알겠습니다.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하지만 문제의 그 안개가 걷히는 시기도 그때라서 출항을 미루는 건 곤란합니다만……. 방법이 없을까요.”

    “그 섬을 찾아 위치를 확인하고 접근하기만 하면 되나? 지난번에 말했던 친척도 찾아 데려오고 말이야.”

    “네, 일단 그게 목표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 섬의 위치만이라도 파악해 놓고 다음 기회를 엿봐야겠지만, 안개 때문에 언제 또 접근이 가능할지 미지수입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가 잘 버텨 낼 자신이 있을지에 달렸어. 나야 바다에서 워낙 잔뼈가 굵으니 나만 믿고 따라오면 생존엔 문제가 없을걸세. 아미티지 씨가 대여 기간 동안에는 배의 보험도 책임져 주겠다 했으니 어느 정도 파손도 각오하고 있네.”

    선장은 뒷짐을 지고 제 생각을 들려주었다.

    “폭풍이 오기 직전 미리 해역에 가 있는 거야. 근처에 드문드문 바위섬이 있으니까 정박시켜 놓고 있다가 안개가 걷히는 즉시 그 주위를 맴돌다 섬을 찾아내는 거지. 그리고 최대한 빨리 목적을 달성하고 해상 상태에 따라 바위섬에서 잠시 계류하다 돌아가는 걸세.”

    마르틴은 선장의 말을 경청하는 내내 심각한 낯을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동의합니다. 단, 아미티지 씨에게는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뒷일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네. 예비 사위인데 당연히 걱정하겠지. 그 따님도 그렇고. 우리 둘 다 무사히 귀환만 한다면 뒷일을 책임질 일도 없을 걸세. 뒷일을 책임질 각오로 잘 버텨서 생존해 오면 되니까.”

    선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르틴도 답례로 엷게 웃어 보였다.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단 하나만이 마음에 걸렸다. 실행일 전 앰버가 한 번만이라도 꿈에 다시 나타나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 * *

    그가 돌아온 건 자정이 지나서였다. 자물쇠 열리는 소리에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앤지가 퍼뜩 일어났다. 카일은 재킷을 벗고 커프스 버튼을 하나씩 풀어 내렸다. 은은한 촛대 아래,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도련님, 내보내 주세요. 제발. 아무리 이러셔도 소용없어요! 대체 얼마나 더 말을 해야……”

    “너야말로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앤지.”

    어두운 얼굴이 앤지의 눈앞에 바짝 다가왔다. 검푸른 눈빛이 촛불을 삼키며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다음 주 수도로 떠날 때까지 여기 가둘 수밖에.”

    “아니, 안 돼요! 그러실 수 없어요, 도련님.”

    “반항해 봐야 소용없어. 네 발로 곱게 배에 타든가,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묶인 채 짐짝처럼 실려 가든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될 테니까.”

    앤지의 숨이 턱 막혔다.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기어이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

    “말해 봐.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을 건지.”

    앤지는 대꾸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차디찬 손가락이 다가와 턱을 움켜잡았다. 겁에 질린 녹색 눈동자가 다시 떠졌다. 카일이 턱을 잡아 올려 시선을 똑바로 맞춰 왔다.

    “대답해, 앤지.”

    “도…… 카일렉 도련님.”

    “그렇게 부르지 마.”

    그가 이를 악물었다. 고작 손가락 세 개에 잡힌 턱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의 손이 턱 아래로 내려와 목으로 옮겨 갔다.

    “그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가 버렸지? 날 카이라고 부르며 환하게 웃던 여자는…….”

    얼음처럼 싸늘한 손바닥이 백조의 것처럼 가늘고 매끄러운 목을 한 손 가득 감싸 잡았다. 그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꺾여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날 떠나겠다 말할 수 있지? 날 사랑한다면서…….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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