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40/106)
  • #40

    “앤지. 그건 필요에 의한 정략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나는 레티샤 데르반을 사랑하지 않아. 아니, 그 여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여자도 내겐 아무 의미가 없어. 그동안 수없이 맹세했듯 나에게 사랑은 너 하나뿐이야. 여자도 앤지 리즈델 한 사람뿐이고!”

    “…….”

    “일단 수도로 가자. 헤데스타드 영지에 도착하면 다 털어놓을게. 모두 다. 숨김없이.”

    “도련님의 정부로 수도에 가자는 말씀이신가요? 레티샤와 한 배를 타고 도착해 같은 저택에서 메이드로 일하면서 도련……”

    “그런 일은 없어. 영지 내에 다른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까. 너를 돌봐줄 가솔 몇 명 외에는 공작저 사람들과 마주칠 일 자체가 없을 거야. 누구도 네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

    “결국 도련님은 처음부터 저를…… 정부로 두려는 것이었군요. 저는 처음부터 정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앤지.”

    “주제넘게 공작 부인의 자리를 넘보진 않았어요. 맹세코 그런 마음은 없었어요. 도련님도 저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신 적도 없지요.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결혼이나 레티샤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신 적도 없었어요.”

    “하지만 결혼이 마을에 공표되기 전, 네가 저택에서 떠나던 마지막 날에 편지를 보냈었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대도 무조건 날 믿으라고. 나중에 다 설명하겠다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받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겠죠. 도련님이 레티샤와 혼인하면서도 저를 정부로 두시려는 계획 자체는 그대로였을 것이잖아요.”

    앤지는 그를 향한 올곧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중에 모든 걸 다 설명하고 진실을 털어놓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레티샤 집안과의 결혼에 뭔가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앤지. 트리에스테는 왕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군주국이야. 본토에서 온 선장은 전쟁이 끝난 지금도 그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고 했어. 적어도 몇 년간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귀족이 축첩을 얼마나 한들 상관도 없고.”

    “그러니까…… 제가 정부라고 손가락질 받을 일은 없을 거란 의미인가요? 하지만 제가 원하지 않아요, 도련님.”

    앤지의 녹색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언성을 높이거나 흥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의지는 그 시선만으로도 명확히 전달되었다.

    “저는 누군가의 정부로 살기를 원하지 않아요, 카일렉 도련님.”

    “그냥 옆에만 있으란 거야.”

    카일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눈빛이 얼마나 격했던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영지 근처에 저택을 마련해 줄 테니 거기서 지내. 네가 원하지 않는 한 억지로 찾아가지도 않고 연락도 하지 않겠어. 단지 내 힘이 미치는 영역 안에만 있으라는 거야.”

    내가 널 보호하고 지켜 줄 수 있게. 제발 그렇게 해, 앤지.

    “아뇨. 저는 여기 남아 있고 싶어요. 지금까지처럼 부모님 곁에서 제 인생을 살아갈 테니까 도련님은 헤데스타드에 가셔서 도련님이 하셔야 할 일들을 하세요. 작위 계승식과 약혼, 결혼 모두 다 하……”

    “젠장! 앤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눈을 두 번 깜빡이기도 전에 카일이 그녀 앞에 와 있었다. 억센 손이 어깨를 그러쥐고 바짝 힘을 가해 왔다.

    앤지의 가녀린 몸은 그 악력에 버텨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에메랄드를 닮은 커다란 눈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비참함 쪽이 더 강했다.

    “왜 내 말을 믿지 않아? 다 설명하겠다고 했잖아!”

    “도련님, 이러지 마세요! 전 이만 집에 돌……”

    “미카엘 랜들. 그 자식이 뭐라고 꼬드기기라도 했어? 내가 아무리 편지로 애원하고 마차를 보내도 만나 주지 않더니, 그놈은 순순히 집안으로 들여보내다니…….”

    앤지는 흠칫 놀라 저항하던 몸짓을 멈췄다. 하수인을 시켜 내내 집 근처를 감시하고 있었구나.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어깨를 잡은 손에 더 힘이 실렸다. 빙하처럼 차디찬 벽안에 섬광이 비쳤다. 뜨겁고도 차가운 불꽃이 피어오르며 악문 잇새 사이로 차분한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왜 대답을 못 해, 앤지. 설마, 그놈과 앞으로 잘해 볼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미카엘은 친구일 뿐이에요! 도련님, 이제 그만……”

    “앤지. 날 사랑하지 않아?”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어진 눈가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고뇌와 고통이 미색에 처연함을 더하며 우미한 콧대와 입술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를 바라보는 앤지의 눈가도 빠르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를 당연히 사랑했다. 미움과 절망, 상실감과 낙심, 그 모든 감정이 그를 사랑하기에 비롯된 상처였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도련님.”

    “정부가 되라는 말이 아냐! 이 빌어먹을 결혼은 길어야 몇 년만 지속될 거야. 내 의지로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어째서 그걸 이해하지 못해? 날 사랑한다면서…… 진심으로 사랑한다면서!”

    카일은 그녀의 양어깨를 잡은 채 거칠게 앞뒤로 흔들어 댔다. 앤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속내를 질러 내고 싶었다.

    그럼 결혼이 끝나면 돌아와요, 카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게 절대 피할 수 없는 정치적인 결혼이라면, 블랙웰 공작의 위치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내가 그냥 기다릴게요. 몇 년이 걸리든, 얼마가 걸리든.

    “그럼 결혼이 끝나면…….”

    앤지가 울먹이며 기껏 붙들었던 이성을 놓으려 할 때였다. 카일이 이 악물고 신음하듯 외쳤다.

    “그동안 내 가까이에 있으면서 첫 아이가 태어나고, 결혼이 자동 말소될 때까지만 기다리란 말이야! 그럼 모든 게 다 끝나!”

    앤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기껏 열렸던 입술을 천천히 다물었다. 첫 아이가 태어나면- 그것이 시사하는 의미가 또다시 명치를 내려친 것 같았다.

    정략결혼은 말 그대로 양가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담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혼인이다. 현재 수도의 이혼 제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연유나 과정으로 혼인 관계가 깨지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그녀 아닌 다른 여자와 혼인 서약을 하고, 한 침대에 들고, 그 결과 아이가 생길 거란 사실이었다. 아기의 이미지를 그려 보는 동안 앤지의 마음은 완전히 닫혔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 사이의 2세가 떠오르는 순간, 무의식 깊은 곳에서 확고한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들이 이걸로 완전히 끝났다는 현실감이 무섭도록 엄습해 왔다.

    “아이…… 아이를 가질 생각이군요. 레티샤가 도련님의 아이를 낳길 바라시는군요.”

    카일의 푸른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한동안 격심하게 흔들렸던 앤지의 눈이 가라앉고 있었다. 격렬한 물살에 생겨났던 기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필요해. 딸이든 아들이든 성별은 중요치 않고 양육을 누가 할지도 상관없어. 그저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그뿐이지만……. 반드시 장자부터 태어나야 돼. 이혼은 그다음이야.”

    앤지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장자의 존재 역시 그 정치적인 합의에 포함된 필수 요소일 터였다. 그러니 그저 태어나기만 하면 다라고, 더는 레티샤와의 혼인을 이어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앤지에겐 그렇지 않았다.

    “도련님, 저는 수도에 갈 생각이 없어요. 이대로 여기서…… 끝내고 싶어요.”

    앤지는 사력을 다해 울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침착하게 말했다.

    ”이만 돌아갈게요. 보내 주세요.”

    그들은 이미 끝났다. 도련님과 레티샤의 결혼은 완전한 종말을 맞을 수 없을 것이다. 둘 사이에 후사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온전한 파국이 가능하겠는가.

    카일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앤지는 쓰러질 것 같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클로크 앞섶을 여몄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힘껏 쥐었다.

    물론 먼 훗날, 그가 자유의 몸으로 그녀에게 돌아온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리라. 막상 그날이 오면 전처와의 아이가 있든 없든 그를 받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다.

    “알겠어, 앤지.”

    카일이 괴로운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끝마다 환멸이 묻어났다.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 혹은 제 뜻대로 되어 주지 않는 그녀에 대한 실망과 낙담일 것이다.

    “네 말 뜻, 잘 알겠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은 어떤 결의로 단단해져 있었다. 앤지는 잠자코 고개를 떨구고 젖은 눈을 숨겼다. 그때만 해도 방에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다시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억센 손이 다시 뻗어와 그녀의 한쪽 팔을 거머쥐었다. 앤지의 무력한 몸이 그의 코앞까지 다시 끌려왔다.

    카일이 클로크 가슴께에서 맞잡고 있던 그녀의 양손을 부드럽게 잡아 풀고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두건과 어깨 여기저기, 헝클어져 흩어진 금발을 손으로 빗어서 등으로 넘겨 한쪽 어깨 아래로 가지런히 정돈해 주었다.

    너무도 다정했지만 동시에 기묘한 손짓이었다. 그 나름의 이별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낯빛이 초연하고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감정에 격앙되어 그녀를 뒤흔들던 게 거짓말 같았다.

    “도련님……?”

    “며칠 시간을 줄게.”

    앤지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 며칠 사이에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어떤 명분이 생겨서 그가 레티샤와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면.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걸 그녀와 그, 둘 다 잘 알았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러실 필요 없……”

    “조용한 곳에서 다시 잘 생각해 봐.”

    풍성한 금발을 어깨 한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기던 손이 머리 뒤를 움켜잡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돌연 머리채를 잡힌 앤지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카일의 눈이 한순간 변했다. 그 눈빛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포악하다기엔 너무 차분했고, 냉정하다기엔 뚜렷한 광기가 보였다.

    “도련…… 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