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39/106)
  • #39

    앤지는 찻잔에 시선을 주고 있다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제발 그러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발로였을까, 순간 귀에서 희미한 이명마저 울려 댔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알아.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처음부터 좋아했었어. 에드워드 님의 장례식 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반했던 것 같아.”

    “…….”

    “너무 갑작스럽겠지. 충분히 이해해.”

    “미카엘, 나는…….”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거절해도…… 물론 거절하지 않아 주면 좋겠지만…… 그래도 좋아. 블랙웰 하이츠에서 그랬던 것처럼 좋은 친구로만 지내 줘도 만족해.”

    그녀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릴 것이란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앤지는 무릎 위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미동도 않고 있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카엘. 날 좋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나처럼 특별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을…….”

    “무슨 소리야, 앤지. 넌 정말 특별해. 너는…….”

    미카엘이 더 항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귓불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앤지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그래서 살짝 미소를 띠었다. 실제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위태로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고마워, 미카엘. 하지만…… 나는 네 고백을 받을 자격도 없어.”

    레티샤에게 사과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고백을 받을 자격 또한 없었다. 그 상대가 미카엘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실은 루이제가 공작저에서 본 것은 사실이었어. 왜 거짓말이었다고 말을 바꿨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건 사실이야.”

    왜일까. 예상치 않았던 고백이 담담하게 줄줄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선 그만 말하라고 경종을 울려 대는데도 혀가 멋대로 움직여 댔다. 미카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비록 고백을 거절당한다 해도 그가 이 자리에서 들은 것을 함부로 발설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맹세코 정혼자가 있다는 건 몰랐어. 알았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사랑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을 것이다.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억누르며, 절대 제멋대로 커지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신에게 맹세할 수 있었다.

    “앤지. 블랙웰은 안 돼. 레티샤 데르반이 아니라도. 그는…… 블랙웰 공작가는…….”

    “알고 있어. 일단 신분부터가……”

    “아니. 설령 네가 귀족이라 해도 그와는 안 돼. 절대 안 될 말이야.”

    “미카엘……?”

    앤지는 예상치 못했던 그의 반응에 적잖이 놀랐다. 그는 그녀가 도련님을 사랑해선 안 되는 이유가 신분 차이와 정혼녀의 존재,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방금 들은 말은 잊어 줘.”

    미카엘이 거기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수그렸다. 한 손으로 턱을 감싸는 몸짓이, 자신이 어디까지 말을 해도 될지 고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앤지. 너무 오래 있었어. 공작저에서 날 찾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가고 며칠 후 다시 올게. 부디 기운 차리길 바라.”

    “미카엘. 무슨…….”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저택에서 찾을 거라며 서둘러 나가는 미카엘을 붙잡을 수 없었다. 바깥은 보슬비로 날이 흐리고 우중충했다. 그는 몇 발짝 걷다가 다시 앤지를 돌아보았다.

    “며칠 후에 다시 올게, 앤지. 부디 마음 잘 추스르고……. 다시 만나자.”

    그러고는 마침 지나가던 수레마차를 붙잡아 그 위에 올라탔다. 마차는 바늘처럼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앤지가 포치 아래 잠시 서 있다가 뒤돌아서려 할 때였다. 그때, 또 다른 바퀴 소리가 들렸다. 공작저의 인장이 박혀 있는 도련님 전용의 마차였다.

    그때만 해도 제롬이 다른 용건으로 돌아왔다 여겼다. 하지만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린 사람은 제롬이 아니었다. 머리 위로 두건을 쓴 남자 둘이 눈 깜짝할 새 앤지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슨…….”

    앤지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보드라운 천이 입술을 누름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부터 커다란 클로크가 내리덮였다. 남자들은 깜짝 놀라 버둥거리는 앤지를 양쪽에서 잡아끌어 마차 안에 앉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앤지는 두건을 내리고 숨을 헐떡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제롬이 나타나 사죄하듯 말했다.

    “미안하구나. 앤지. 지금 바로 데려오라는 도련님의 명령이야.”

    “네? 카일 님이…… 이런 식으로 말인가요?”

    “미안하다. 도련님을 뵙고 나면 무사히 다시 데려다주마.”

    그 말을 끝으로 마차 문이 닫혔다. 앤지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마차가 곧바로 움직였다. 만약 정중히 와 달라고 청했다면 절대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일은 그걸 짐작하고 이런 무리한 방법까지 쓴 것이다. 제롬이나 일꾼들은 차기 공작의 지시가 뭐든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답장을 읽으셨구나.

    브로치도 돌려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제로라도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화도 소용없었다. 레티샤와의 결혼이 기정사실이며 그 혼인이 오래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면. 그가 그 결혼을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제 모든 것을 기꺼이 가져가 취했다면 더더욱.

    차라리 잘됐다고 여겼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만나 확실히 제 의지를 밝히면 도련님도 더는 그녀를 붙잡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고 강요하려는 의지를 굽히고 다음 주에 예정대로 수도로 떠나실 것이다. 정혼녀인 레티샤 데르반과 함께,

    앤지는 경련하듯 떨리는 입술을 꼭 감쳐물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해 파리한 가운데서도, 단호한 결심을 담은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공작저 별관에 도착하는 그 짧은 동안, 앤지는 좌석에 웅크리고 기대 누웠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속이 마구 울렁거리며 욕지기가 솟았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는데도 자꾸만 토기가 일어나서 힘이 들었다. 다행히 마차에서 내려 맑은 한기를 쐬는 즉시 메스꺼운 속이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차분해진 배 속과는 별개로, 낯익은 고딕식 외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조여들었다. 자정마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만나 이 별관으로 왔었다. 3층 침실로 나란히 올라와 나눴던 모든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에일 듯 아팠다.

    도련님은 서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롬의 안내를 받아 홀로 방 안에 들어선 순간, 앤지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섭도록 차디찬 벽안이 찌를 듯 심장을 관통해 들어왔다. 이렇게 무리해 소환할 정도였으니 화가 나 있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노기에 차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커다란 집무용 책상에 기대서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공작의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는 앤지가 보냈던 편지지와 봉투가 엉망으로 구겨진 채 브로치 상자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앉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평소 집사와 시종들에게 명할 때처럼 무감한 억양 위로 얼음처럼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앤지와 단둘이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음색이었다.

    “도련님, 저는…….”

    “내가 직접 들어서 앉혀 줘야 돼?”

    그 으름장에 앤지가 움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번쩍 들어 소파에 내동댕이칠 것 같은 기세에 간담이 서늘했다. 앤지는 간신히 발을 놀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마차에 탈 때 강제로 덮어썼던 클로크 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추스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카일은 앤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열흘 만에 보는 수려한 얼굴이 야위어 있었다. 강파른 턱선이 분노로 단단히 굳어 있어 한층 더 날카로워 보였다. 앤지는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흡사 덫에 걸린 짐승을 보는 듯한 시선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사냥꾼이 으레 가질 법한 만족감이나 기쁨의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포획한 대상에 대한 노기와 원한만이 가득했다.

    “결혼을 축하한다고……? 어떻게…… 그런 편지를 보낼 수 있지? 브로치까지 되돌려 보내다니.”

    앤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적반하장이란 표현조차 과한 상황에 숨이 차올랐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도련님에게 기만을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며 저주하는 답장이라도 썼어야 만족하셨겠어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 달라고, 결혼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길 바라셨어요?”

    카일에게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두려움, 숨 막히는 긴장감 가운데서도 앤지는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신기할 만큼, 차분하고도 냉소적인 음색이 술술 흘러나왔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저는 제 입장에서 최선의 대응을 했어요, 카일렉 도련님.”

    카이, 오직 그녀만이 부를 수 있던 애칭은 더 이상 없었다. 카일의 반듯하던 이마에 균열이 일었다. 두 눈 속, 푸르게 반짝이던 거울이 순식간에 부서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처 입은 맹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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