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38/106)
  • #38

    앤지는 또다시 붉어지는 눈에 힘을 주고 책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편지를 집어 들어 봉투 한가운데, 블랙웰 가문의 인장을 천천히 뜯어냈다. 첫 번째 편지가 열렸다.

    「사랑하는 나의 앤지.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충격이 컸을 거라 생각해. 직접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내가 집으로 너를 찾아가게 되면 기껏 가라앉힌 소문에 다시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될 수 있으니까. 네 평판에 다시 의혹이 제기되는 건 바라지 않아.

    나는 상관없어. 우리의 관계는 떳떳한 진실이니까. 하지만 이 섬의 누구도 감히, 너에게 손가락질할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 만약에 그런 자가 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지만 나로 인해 너에게 오명이 씌워지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어.

    앤지.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말은 모두 사실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니 부디 믿어 주길 바라.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어. 하지만 너를 기다리는 내 마음을 생각해서 부디 오늘 밤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와 줬으면 해.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싶어. 마차를 보낼게.

    -사랑하는 카이로부터.」

    어디에도 결혼 사실에 대한 부인이나 사과는 없었다. 앤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젯밤 제롬이 다시 가져왔던 두 번째 편지를 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앤지.

    어젯밤 한숨도 자지 않고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 않았구나. 상심이 크겠지만 한 번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면 안 될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줘. 부탁이야, 앤지. 더 이상의 거짓은 없을 거야. 아니, 처음부터 거짓은 어디에도 없었어.

    데르반과의 결혼은 오래전에 정해진 기정사실이야. 지금으로선 피할 수 없어. 하지만 이건 형식적인 결혼일 뿐이야. 신에게 맹세코, 이 결혼이야말로 사실은 거짓이야. 너에 대한 내 사랑만큼 진실인 것은 없어.

    사랑해, 앤지. 네가 내 사랑을 거부하면 나는 살 수가 없어. 모든 것은 내가 약속한 대로 이루어질 거야. 널 수도로 데려갈 계획 역시.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주면 돼, 앤지. 부탁이야.

    하루만 더 시간을 줄게. 모레 오후, 다시 제롬 편에 마차를 보낼 테니 그때는 나를 만나러 와 줘.

    -사랑하는 카이로부터.」

    펄럭, 앤지의 손끝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순백색 종이는 아주 잠깐 나비처럼 팔랑거리다 곧장 방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앤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정부로서 나를 원한 것이었구나. 도련님은…… 처음부터 그랬던 거야.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누군가 몸속에서 심장을 꽉 틀어쥐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앤지는 오랫동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였다. 길고 탐스러운 금발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카펫 위로 늘어졌다. 며칠째 손질 한번 없이 방치됐는데도 짙은 벌꿀색 머리카락의 찬란함은 그대로였다.

    * * *

    그날 밤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됐던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귓가에 웅웅, 메아리치는 바람 소리가 무시무시한 이명 같았다. 어두운 창공에 몇 차례 빛줄기가 번쩍이긴 했지만 기묘하게도 뇌성은 없었다.

    미카엘은 지하 나선 계단의 벽을 뚫고 들어간 개수 구멍 안쪽, 수로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만이 아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발소리에 이어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무시무시한 소리에 미카엘이 섬찟 몸을 떨었다. 계속되는 괴물의 하울링에 그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가 수로를 나왔다. 간신히 돌아온 방문 앞에는 한 여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를 어머니처럼 양육하고 공작저에도 데려온 이모, 헤스터였다.

    “미카엘, 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니. 내가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휴, 깜짝 놀랐네!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이모야말로 어서 들어가서 주무셔야죠. 벌써 자정이 넘었는데…….”

    미카엘이 덜컥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헤스터는 그 밝은 미소에도 아랑곳 않고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참 큰 조카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미카엘, 웃을 일이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최대한 조심하면서 적기를 기다려야 한다.”

    “네, 알고 있어요.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염려 놓으세요.”

    미카엘은 이모의 불안이 종식되길 바라며 진지한 눈빛을 보였다. 헤스터는 몇 마디 더 이른 뒤, 어서 자라며 조카를 방 안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방문 앞에서 돌아서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순간 얽히며, 어둠 위로 또 다른 어둠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 * *

    제롬이 찾아온 때는 리즈델 부부가 느지막이 노스쇼어 일터로 떠난 정오 무렵이었다. 전날 밤처럼 심한 폭우는 아니었지만 비가 멈출 줄 모르고 내리는 통에 섬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앤지는 커다란 상자 안에 브로치와 스노우볼, 새틴 드레스와 답장을 넣고 제롬에게 건넸다. 가문의 여인에게 대대로 내려온다는 ‘성스러운 눈물’,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딱 한 번 입고 소중히 간직해 왔던 드레스 역시.

    「카일렉 로던 블랙웰 차기 공작님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가문의 브로치는 미래의 공작 부인의 손에 돌아가야 마땅하다 사료됩니다. 멀리서나마 두 분의 행복과 평안을 빌겠습니다.

    -앤젤라 리즈델 드림」

    제롬이 떠나자마자 거실로 돌아와 자수함을 꺼냈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멍하니 창가를 보던 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늘쯤 엠마와 스테파니가 들를 거라던 모친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몸살이라도 자수 모임을 무단으로 빠지고 주일 예배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다들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앤지는 문 앞까지 다가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장이라도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친구들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최대한 밝게 보이려 억지웃음까지 짓고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앤지의 낯빛이 변했다. 뜻밖의 방문객에 애써 지은 미소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큰 키에 마른 체격의 미카엘이 외출복 차림으로 현관 포치 아래 서 있었다.

    “미카엘……?”

    “앤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아. 무슨 일로…….”

    “걱정이 돼서…… 심부름이 끝나고 가던 길에 잠깐 들렀어.”

    밝고 장난기 넘치는 평소와는 달리 진중한 태도였다. 잠깐 들어가도 되는지 묻는 눈빛에 앤지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미카엘이 들어서며 문이 닫혔다. 그리고 대각선 쪽, 커다란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거실에 다과가 차려졌지만 둘 중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앤지는 자꾸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의 고통 때문인지 평소 좋아하던 차인데도 향기가 역했다.

    “와 줘서 고마워, 미카엘.”

    앤지는 울렁대는 속을 누르며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뜨렸다. 대상이 친구들에서 미카엘로 바뀌었을 뿐, 태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몸보다 앞서 있었다.

    “아니야. 나야말로 만나 줘서 고마워.”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가 늦었네. 그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열흘 전 레티샤에게 공격받던 날, 그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더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날 레티샤는 극도로 흥분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어. 더 빨리 올라가서 막았어야 했는데……. 그보다 앤지,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안색이 너무 창백해. 많이 야위기도 했고. 열흘이 넘도록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어.”

    “몸이 정말 안 좋았어. 며칠 더 쉬면 괜찮아질 거야.”

    “혹시 그 일 때문이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예배당 밖으로 퍼져 나가지도 않았고 루이제가 거짓말을 자백했으니까 네 누명은 벗겨졌어, 앤지. 데르반가에서도 사과하러 왔었지?”

    앤지는 고개를 저었다. 내리깐 시선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미카엘은 한층 더 어두워진 그 얼굴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미간을 좁혔다.

    “레티샤가 오지 않았어? 그 집에서 직접 사과하러 보낼 거라 했다던데.”

    앤지는 고개 들어 미카엘을 마주보았다. 늘 미소 짓고 온화했던 그의 노기를 보는 건 이로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가 레티샤와 그녀 사이에 끼어들었던 예배당에서였다.

    “사과…… 받지 않아도 돼. 미카엘. 난 사과 받을 자격이 없거든.”

    죄책감과 절망, 무기력과 무너지는 심경 속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더는 깊이 들어가선 안된다는 경각심이 발동했을 때야 앤지는 말을 멈췄다.

    “절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린 거니까.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레티샤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사과받을 생각도 없어.”

    벌어진 결과만 놓고 볼 때 오히려 사과해야 할 쪽은 레티샤가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미카엘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앤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미카엘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목이 마른지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앤지. 사실은 할 얘기가 있어.”

    “응. 편하게 말해.”

    “쉬어야 하는데 계속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 하지만 역시…… 이거 하나만은 말하고 싶어. 어쩐지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카엘은 고심 끝에 결심한 듯 털어놓았다.

    “앤지. 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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