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37/106)
  • #37

    “뭐라고……? 그게 무슨?”

    방 안은 순식간에 충격과 경악의 침묵에 물들었다. 소녀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를 바라볼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스테파니가 간신히 더듬거리며 운을 뗐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앤지가 그럴 리가……. 아니, 그 전에! 너한테 약혼자가 있다니? 게다가 카일 도련님이 네 약혼자라니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카일 도련님과 나는 오래전부터 결혼하기로 정해져 있었어! 던스트 부인 말로는, 돌아가신 에드워드 님도 그 혼인에 승낙하셨대. 우리 백부님이 블랙웰 공작가의 먼 친척이자 재정을 담당하는 데르반 남작인 건 너희 모두 알고 있지? 얼마 전 본토에서 온 그 선장이 말해 줬어. 삼촌이 전쟁 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지금도 본토 블랙웰 영지에서 공작 대리로 모든 대소사를 맡아 하고 계신다고 말이야.”

    “뭐? 그럼 도련님이 정말로…….”

    “그래. 보름 후 나도 도련님을 따라 수도로 갈 예정이야. 본토에서 계승식과 약혼식을 치르고 결혼 날짜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어. 그랬는데…….”

    레티샤의 서슬 퍼런 눈이 다시 앤지에게 돌아갔다. 앤지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은 채 망연자실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낯이 너무도 창백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얘기지? 도련님이 레티샤와 혼인을? 수도에서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 날짜를 논의한다니.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니……?

    “지난주까지 우리 집 심부름꾼 루이제도 임시 메이드로 일손을 돕기 위해 공작저에 가 있었어. 설마 루이제를 본 적 없다고는 못하겠지? 그 애가 그러더라. 너와 도련님이 자정 넘은 시간에 별채 침실로 올라가는 걸 봤다고 말야. 그것도 몇 번이나!”

    레티샤가 앤지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어찌나 기세가 사납던지 앤지를 둘러싸고 있던 소녀들조차 기가 질려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레티샤가 단번에 양손으로 앤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거세게 당겼다.

    “그 반반한 얼굴로 도련님을 유혹한 거니? 그래서 감히 도련님의 침대까지 기어들어 가 감히 내 약혼자를…….”

    문이 부서질 듯 요란하게 열렸다. 다음 순간, 누군가 레티샤의 손목을 붙잡아 앤지의 머리에서 떼어 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레티샤를 살짝 밀어내고 앤지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눈 깜짝할 새 미카엘이 두 여자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둬!”

    “넌 뭐야! 비켜! 하인 주제에, 감히 날 막아? 나는 네 여주인이 될 사람이야. 레티샤 블랙웰 공작 부인이 될 몸이란 말이지!”

    레티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미카엘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마구 달려들었다. 하지만 앤지에게 더는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미카엘이 바위처럼 그녀 앞을 막아서기도 했지만, 예배당의 어른들이 몰려와 레티샤를 말리고 나선 까닭이었다.

    앤지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회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레티샤에게서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고 남의 약혼자를 탐했다는 비난을 뒤집어쓴 것, 그리고 그녀가 오래전부터 정해진 대로 카일과 결혼할 것이란 사실, 어떤 것이 더 충격적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저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레티샤 데르반의 가솔, 루이제의 증언이 일으킨 파장은 그날 저녁 거짓말처럼 빠르게 수습되었다. 리즈델 부부가 일터에서 돌아와 루이제의 말이 거짓임이 밝혀졌다고 알려 주었다.

    “글쎄, 루이제가 거짓말을 했다는구나. 사실 그 아이야말로 보조 요리사와 밤마다 밀회를 해 왔는데 낌새가 어째 들킬 것 같으니까 네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자백했다는 거야. 너도 너지만 도련님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던스트 부인에게 싹싹 빌고 난리도 아니었어.”

    “루이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했다고요?”

    앤지는 놀라움에 눈을 깜빡였다. 뺨의 부기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하루 종일 운 탓에 눈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그렇대도. 데르반 부인도 마음 같아서는 내쫓고 싶지만 그럴 순 없으니, 당분간 자숙하며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고 호되게 나무란 모양이야. 너에게도 레티샤를 보내서 정식으로 사과하게 시키겠다 약속했단다.”

    모친은 안쓰러운 나머지 혀를 차며 앤지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상에. 네 아빠랑 나도 한 번 손댄 적 없는 얼굴을…….”

    “엄마. 전 괜찮아요. 그보다, 그럼 도련님과 레티샤가 결혼한다는 건요? 그건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맞는 거예요?”

    “그래. 에드워드 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약속된 것이라는구나. 우리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단다. 레티샤의 집안은 사실 본토에서 귀족이잖니. 공작가의 먼 방계이기도 하고. 지금까진 본토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어서 섬 안에서는 다들 평등하게 지냈지만…… 신분상 도련님과 어울리는 짝이긴 하지.”

    “…….”

    “앤지. 너 혹시…… 도련님을 좋아했던 거니?”

    로라는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재차 물었다. 루이제가 던스트 부인의 압박에 의해 목격담을 번복한 진실, 앤지가 지금까지 도련님과 밤마다 밀회를 가진 것까지 포함해 모든 진상을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 앤지의 속을 떠보았다.

    “엄마, 나는……”

    “혹시 그랬다면 앤지, 더 마음을 키우지 말고 잊어버리렴. 바깥세상이 열리게 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제 도련님도 본토로 돌아가시게 된 만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으로 살게 되실 거야.”

    “하지만 엄마. 도련님은……”

    카이 님은 오직 나만을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그뿐만 아니라, 유제니아 님의 브로치를 주시며 수도에 함께 가자고도 하셨어요. 루이제가 어째서 말을 다시 뒤집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도련님의 명예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녀가 목격했던 건 사실이에요, 엄마.

    나는 1월부터 거의 매일 밤, 카이 님과 함께 있었어요. 카이 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카이 님도 나만을 사랑한다고 미래를 약속했어요.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고 가슴이 터질 만큼 행복했지요. 레티샤에 대한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어요. 그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도련님은 대체 왜 나에게…….

    앤지는 속엣말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모친에게 다 털어놔 봤자 더 비참해질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로라는 앤지를 품에 안고는 열심히 달래 주었다.

    “우리 딸,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어쩌니……. 하지만 다 한때의 감정일 뿐이란다. 곧 잊힐 테니 며칠 푹 쉬면서 다 털어 버리렴. 응?”

    앤지는 울음을 꾹 눌러 참았다. 모친은 그녀 혼자만의 가슴앓이라 단정 짓고 있었다. 그 토닥임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열흘이 빠르게 흘러갔다. 폭우와 맑은 날이 교차하며 반복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해괴한 기상 이변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리즈델 부부의 집은 늘 한결같았다. 비바람이 우레같이 몰아칠 때나, 늦겨울 햇살이 한기를 꿰뚫고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들 때나, 안팎은 늘 고요했다. 언제나 활기에 넘쳤던 부부의 딸이 보이지 않은 지도 벌써 며칠째 접어들고 있었다.

    앤지는 며칠간 식음도 전폐하고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간신히 기력을 차리고 나서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열흘 전 루이제의 거짓 증언으로 예배당에서의 소동은 촌극으로 끝났다. 앤지의 평판에도 얼룩 하나 남지 않았다. 레티샤는 끝까지 사죄하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앤지의 심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사과 여부가 아니었다.

    오트밀 죽만 먹고 버티기를 며칠째, 앤지는 침대에서 힘없이 일어나 창가 협탁 위의 스노우볼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뜯어 보지도 않은 편지가 두 통 놓여 있었다. 지난 열흘간 마부 재커리나 다른 일꾼이 아닌, 제롬이 직접 가져온 도련님의 서신이었다. 답장을 보내지 않자 어제 오후 또 한 통을 가져왔지만 역시 개봉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쓰여 있을까. 카이 님은 무슨 말을 전해 왔을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미치도록 궁금해 당장이라도 편지를 뜯어 보고 싶어서 몇 번이나 책상에 다가갔다. 하지만 번번이 손대지 못하고 돌아섰다.

    만약 레티샤와의 결혼이 기정사실이라면. 그럼 어떤 얘기가 쓰여 있든 의미 없고 부질없기 때문이리라.

    「너를 속여서 미안해, 앤지. 하지만 널 사랑했던 건 사실이야. 부디 용서해 줘.」

    그런 메시지라면 차라리 읽고 싶지 않았다. 기만에 대한 사죄는 그 어떤 말로도 보상되지 않을 것이다. 도련님이 아무리 정식으로 청혼한 적도 없고 언약의 표시가 될 반지는 주지 않았다 해도, 그녀를 달콤한 말로 현혹하고 속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만약 다른 내용이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한 절망이 될 터였다.

    「앤지.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진심이야. 레티샤와의 결혼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행되는 정략혼일 뿐이야.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니 내 곁에 있어 줘. 약속대로 나와 함께 수도에 가자.」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내 마음은 더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겠지.

    심장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게 옳았다. 신분 차이로 영원히 이별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언감생심 공작 부인을 꿈꾼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그녀만이 유일한 여자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 맹세했었다.

    어릴 적부터 트리에스테는 귀천상혼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철저한 봉건제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예전에 도련님이 털어놓은 비화에 의하면, 현재 그의 가문은 조부 존 피츠로이가 몰락 직전이던 블랙웰 공작가의 족보를 막대한 돈을 주고 산 것이었다.

    게다가 선대 공작 부인 유제니아 님 역시 귀족이 아닌 가정 교사의 딸이었다. 카이는 그 사실을 몇 번이나 언급하고 강조했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과거 트리에스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신분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일종의 과도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하게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하지만 만약 도련님이 레티샤와의 결혼과 그녀와의 관계, 둘 다를 이어 가길 바란다면. 그럼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완전한 파국만이 수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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