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3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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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을 에워싼 소녀들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미카엘은 정말 너무 친절해! 얼굴도 그렇고, 신사적인 게 은근히 귀족 같지 않니?”

    “맞아. 시종 치고는 품위가 흐른달까. 정말 잘생겼어. 사실 카일 도련님 쪽이 내 취향이긴 하지만…… 도련님은 범접할 수 없이 너무 먼 분이지만, 미카엘은 편하게 다가갈 수 있달까.”

    “실제로도 미카엘은 현실성이 있잖아. 혹시 알아? 우리 중 누구랑 잘 될지도……. 흐흐. 근데 앤지, 메이드로 있는 동안 둘이 꽤 친해졌나 봐? 이렇게 집까지 짐도 날라 주는 거 보면. 혹시 둘이 친구 이상인 거 아니니?”

    엠마의 억측에 소녀들이 다들 탄식을 흘리며 실망을 내비쳤다.

    “뭐야?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둘이 잘 어울리긴 하지만…… 낙심되는 건 어쩔 수 없네. 흑흑…….”

    “뭐? 아니야, 그런 거!”

    앤지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다가 주방의 모친이 들을까, 어조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미카엘과는 정말 친구일 뿐이야. 그러니까 괜한 소문 내거나 그러진 말아 줘…….”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근데, 미카엘은 부시종장 헤스터 부인의 조카라고 했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던 랜들 부인의 언니, 에디스 랜들의 아들인 거지?”

    “응. 잘은 모르지만 유복자라고 들었어. 아버지가 전쟁 중 돌아가셔서 어머니만 임신한 상태로 랜들 부인과 같이 섬에 오시지 않았을까?”

    “그렇구나. 너무 잘생겨서 말야. 음……. 자세히 보면 선대 공작님을 좀 닮은 듯도 같고.”

    엠마의 말에 마리아, 스테파니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지? 역시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었어. 만약 머리 색만 에드워드 님처럼 검은색이라면……. 아, 만약 미카엘이 카일렉 도련님처럼 이렇게 서늘하게 무표정을 지으면, 그럼 두 분도 은근히 비슷할 것 같지 않아?”

    “진짜 그러네! 하지만 미카엘이 도련님처럼 그런 얼굴을 할 리는 없으니까. 분위기부터가 너무 다른걸?”

    “맞아. 도련님은 너무 근사하고 잘생기고 완벽하신데……. 그래서 나도 취향은 도련님 쪽이긴 한데 그래도 좀 무서워.”

    소녀들은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해 하면서도 어깨를 움츠리고 몸서리를 쳤다. 앤지는 의아한 얼굴로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저기…… 도련님이 그렇게 무서워?”

    물론 메이드로서 거리를 두고 볼 때는 차갑고 엄준한 얼굴이라 분위기가 사뭇 다르긴 했다. 하지만 무섭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단둘이 있을 때 너무도 부드럽고 다정하시기 때문일까?

    “당연하지. 앤지, 너는 안 무서워?”

    대답할 새도 없이 후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재커리가 제롬이 전해 주라고 했다던 상자를 내밀어 보였다.

    “자, 여기 있다. 사탕인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아저씨.”

    앤지는 상자를 받아들고 침실의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재커리와 미카엘이 거실에서 남은 차와 쿠키를 드는 동안, 친구들을 방 안으로 불러들여 던스트 부인이 선물로 주었던 향초를 나눠 주었다.

    “어머, 공작저에서 쓰는 귀한 건데 우리가 받아도 돼?”

    “괜찮아. 두 개씩 가져가도 충분히 남아.”

    “와, 정말? 고르기 힘들었는데 그럼 난 라벤더 향이랑 프리지아 향으로 할게!”

    잠시 왁자지껄, 즐거운 소란이 일면서 방과 거실 사이 분주하게 여러 그림자가 오갔다. 그래서 누구도 보지 못했다. 협탁에 놓인 상자가 소리 없이 열리며, 사탕이 든 유리병 아래 편지가 움직였지만 그 손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정신 차려, 앤지! 너는 그의 레머디일 뿐이야! 그의 피와 살로 화해서 너 자신의 존재는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소중한 생명들이 더 이상 잔혹한 희생을 치르는 일이 없어야 해. 모두가 무사히 섬을 빠져나와야……. 결국 앙상한 가죽과 뼈만이 남게 되는 비극이 없도록 새로운 세상에서……. 네 고향인 빈터가르는……. 우리는 레반에서…….’

    앤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잠옷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마르틴 실바가 아주 오랜만에 꿈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은 지금까지처럼 실제로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꿈이었다.

    꿈속에서 마르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간절하게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묻혀 드문드문 끊어졌다. 끝부분은 소음에 묻혀 아예 들리지도 않은 채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앤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초를 밝혔다. 창 너머 바깥 하늘 위로 자줏빛 여명이 깔려 있었다. 카일이 첫 선물로 주었던 스노우볼, 순백색 구체가 새벽빛 아래 검푸르게 보였다.

    “진정해. 이번은 진짜 꿈이었어. 마르틴 실바는 나타나지 않았어…….”

    앤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두근대던 가슴을 추스르려 애썼다. 나흘 전 도련님과 절벽 아래 서서 신비한 밤바다 반딧불을 내려다봤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기묘한 꿈이 일으킨 동요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앞으로 사흘 후엔 도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세수를 마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머리를 양쪽에서 땋아 하나로 단정하게 틀어 올렸다. 탐스럽게 늘어졌던 긴 금발이 새하얀 목덜미 아래, 몇 가닥만 남긴 채 정수리 가까이서 매듭이 지어졌다.

    앤지는 방에서 나가기 전 유리병 속 제비꽃 사탕을 하나 꺼내 입속에 쏙 집어 넣었다. 새콤달콤, 알싸한 꽃향기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도련님이 제롬을 통해 일부러 전해 주라 한 사탕은 그녀가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에게 책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러 침실에 갈 때마다, 늘 테이블 위 다과와 함께 놓여 있던 사탕이다.

    혹시 상자 속에 편지가 있진 않을까 기대했지만 사탕뿐이었다. 아주 조금 아쉬웠지만 이내 털어 버렸다. 몇 자 쓰실 시간도 없이 무척 바쁘셨나 보지. 어차피 곧 만나니까 괜찮아.

    날이 밝아 오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섬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왔다. 기온은 여전히 낮아서 아직까지 봄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따뜻한 벽난로 옆, 세 사람이 마주 앉은 아침 식탁 위에는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수프의 구수한 풍미가 가득했다. 로라가 딸의 수프 위로 잘게 썬 크루통을 올려 주며 따스한 밀크티도 더 따라 주었다.

    “앤지, 네가 집에 다시 오니 정말 좋구나. 당분간 노스쇼어 별장엔 오지 말고 집에서 푹 쉬렴. 남쪽 해변가에서 성년이 된 아이들을 보내 줘서 인력이 충분하니까. 오늘 자수 모임이 있는 날이었던가?”

    “네. 그동안 주중 모임은 못 나갔으니까 오늘 가서 레이스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그래. 아직은 날이 차니 감기 걸리지 않게 든든히 챙겨 입고 나가렴.”

    식사가 끝나고 리즈델 부부를 배웅하러 뒤뜰과 이어진 쪽문을 열었을 때였다. 한기를 머금은 2월 초 공기가 훅 피부를 찔러 왔다. 입술 사이 입김도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런데도 하늘이 워낙 맑아서인지 마음은 가볍고 상쾌했다.

    하지만 그 밝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자수 모임이 열리는 예배당 겸 마을 회관에 들어설 때만 해도 모두가 화기애애 즐거운 분위기였다. 앤지가 엠마와 마리아, 스테파니, 절친들은 물론 다른 소녀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방에서 기퓌르 레이스 직물을 꺼냈을 때였다.

    “아, 저기 미카엘 아니야? 마을에 심부름 왔다가 들렀나 봐!”

    누군가 창 너머를 가리켜 보이자 소녀들이 눈 깜짝할 새 달려와 창에 일렬로 달라붙었다. 회관 앞마당에 공작저의 심부름꾼들이 쓰는 마차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미카엘과 몇몇 일꾼이 상자를 나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위쪽의 기척을 느꼈는지 미카엘이 고개 들어 소녀들을 올려다보았다.

    “미카엘, 안녕?”

    “반가워- 오늘 또 만나네?”

    어제 앤지의 집에서 안면을 익힌 친구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까르르 웃어 댔다. 미카엘도 밝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앤지의 얼굴을 보자 표정이 좀 더 환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의 유쾌하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살롱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더니 소녀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앤지 앞에 멈춰 섰다. 레티샤 데르반과 그녀를 따르는 추종자였다. 예쁜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앤지가 당혹감 속에서도 인사를 할 때였다.

    “안녕, 레티샤. 오랜만…….”

    “이 망할 계집애!”

    짝,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모두가 크게 탄식을 질렀다. 앤지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창틀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뺨에 화끈거리는 아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레티샤가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너무 놀라, 엠마와 스테파니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해 줄 때까지 몸을 똑바로 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러운 계집애. 어쩐지 처음부터 싫었던 이유가 있었어! 이상하게 네가 싫고 정이 안 가더라니……. 내 본능이 직감하고 있었던 거야.”

    “레티샤! 이게 무슨 짓이야? 앤지, 괜찮아?”

    “세상에! 이 부어오른 뺨 좀 봐……. 얼음찜질을 해야겠어.”

    “너희는 비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역성들지 말고.”

    레티샤가 흥분으로 가슴을 들썩이며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한층 더 흉하게 비틀린 입술이 당장이라도 앤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았다.

    “마침 모두 있으니까 내가 알려 주지. 잘 들어! 앤지 리즈델은 정말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애야. 내 약혼자인 카일 도련님을 홀려서 매일 밤 도련님과 밀회를 가졌다고! 내 입으로 말하기도 정말 끔찍한 일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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