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35/106)
  • #35

    찻잔 속 말린 과일차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은 리즈델 부부는 차에 손도 대지 않고 던스트 부인의 말에 골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저번처럼 지하 서재에 모여서 대화 중에 있었다.

    “그럼 앤지도 수도로 가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그 애가 과연 가겠다고 할지. 도련님의 결혼 소식을 알면 충격이 적지 않을 텐데.”

    로라가 남편 패트릭을 돌아보았다. 그도 아내만큼이나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레머디도 필요가 없을 만큼 완쾌되셨고 앤지도 처분하지 않을 것을 명하셨다면, 이대로 섬에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던스트 부인은 낮게 한숨지었다. 부부는 세컨드 헬퍼로서의 본연의 역할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진짜 부모라도 된 것처럼 지나치게 감정 이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작저 바깥의 세컨드 헬퍼들은 레머디의 역할에 대해서만 인지하고 그들의 부모로만 행세할 뿐 이터니티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하긴 사람인 이상 친딸처럼 정이 들어 버린 건 어쩔 수 없겠지. 전에 바다로 나가려다 죽임을 당했던 엘리엇…… 그 아이를 맡았던 호킨스 부부도 그랬었는데.

    키운 정이 너무 컸는지 엘리엇이 죽고 나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해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호킨스 부부와 이웃들 모두에게 망각제를 주입해 엘리엇에 대한 기억을 잃게끔 조치했다. 앞으로는 이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컨드 헬퍼들에게 뭔가 사전 예방이 필요할 듯했다.

    “물론 저도 그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하긴 일러요.”

    “도련님이 다시 레머디의 피를 필요로 하실지도 모른다는 말이신가요? 그럼 우리 앤지는…….”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다른 레머디들이 있으니 앤지는 무사할 겁니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마세요.”

    루이스 던스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은 앤지가 원칙대로 제거되는 것이 가장 깔끔한 뒤처리였다. 앤지만큼은 아니지만 레티샤 역시 도련님의 체질과 그럭저럭 잘 맞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다른 레머디도 수시로 검증될 예정이었다. 늘 대비책을 준비해 두어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도련님이 앤지에게 지나치게 빠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사랑이란 것 자체가 결국은 빛바랠 감정이 아니겠는가. 빠르면 수도에 적응하는 즉시, 늦어도 몇 년 안에는 수그러질 것이라 믿었다. 에드워드 님의 경우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채 식기도 전에 그녀를 잃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것일 테니까.

    루이스는 도련님이 앤지를 수도에 데려가길 바란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무엇이 최선일지 그녀 자신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조치를 취해도 늦지 않으리라.

    “아직 배를 띄우기까지 3주 정도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보다 장미차 대용으로 썼던 약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했었죠?”

    “네. 그래서 오늘 온 김에 부인께 더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요즘은 꿈에 대한 얘기나 이상한 말을 전혀 하지 않거든요.”

    “잠시 공백기를 두는 게 어떨까요.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리셋을 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요.”

    “리셋을……!”

    패트릭이 눈을 끔뻑였다.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보았다. 던스트 부인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편이 최선일지 모릅니다. 도련님은 수도로 떠나 거기서 정착하시고, 앤지는 도련님을 완전히 잊고 이대로 부모님 슬하에서 평탄하게 사는 거죠. 그게 두 분이 궁극적으로 가장 희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닌가요?”

    “리셋을 시키는 약……. 그 망각제가 정말로 안전한 것이라면, 네. 그 애가 불행해지느니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럼 앞서 말했듯이, 모든 약을 잠시 중단하고 공백기를 두도록 하죠. 리셋은 깨끗한 상태에서 가장 약효가 확실하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부작용의 가능성도 있으니 가급적 이대로 잘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던스트 부인은 조용히 덧붙였다.

    “물론 도련님이 모르시도록 해야죠.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두 분은 아무것도 모른 척, 평상시대로만 해 주세요.”

    부부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다시 서로를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앤지는 그들에게 친딸이나 다름없었다. 그 아이가 전쟁 직후 섬에 실려 왔던 열 살 때부터, 장장 9년을 한 집에서 양육해 왔다.

    앤지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다정한 아이였다. 맑고 순수한 심성은 천사 같은 외모에 뒤지지 않았고, 자신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이타적인 성격을 지녔다. 처음 앤지의 부모로 배정될 때만 해도 이렇게 진심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미카엘 랜들은 울퉁불퉁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벽에는 한쪽 뺨을 대고 앉아 있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하 포도주 저장고로 이어지는 나선형 통로 구석에 있었다. 통로 옆, 비스듬히 경사진 벽 너머는 서재와 식재료 창고가 있었다.

    마침 공작저의 일꾼들이 짧은 휴식 겸 낮잠을 가지는 시간이라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카엘은 방금 들은 대화를 머릿속에 되새김질하듯 잠시 벽에 기대서 있었다.

    이윽고 지상으로 걸어 나오자 어디론가 향하는 메이드들이 보였다. 사용인용 홀로 바삐 가던 시종장 야스민이 그를 발견하고 손짓해 보였다.

    “미카엘! 송별회를 잊진 않았겠지?”

    “아, 지금이었군요. 바로 가겠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임시 메이드로 일해 준 앤지의 송별회였다. 어차피 마을에서도 계속 만날 이웃들이라 딱히 송별회라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던스트 부인이 그간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로 일부러 티타임을 준비했다. 부인은 공작저에서 직접 만든 포도주와 허브차, 향초 등 여러 가지 선물을 담은 상자를 앤지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던스트 부인. 가족들과 잘 마실게요.”

    “마차에 싣고 갈 짐이 꽤 되지? 사환 아이를 하나 불러 주마. 재커리 씨가 있지만 한 명쯤 더 도와주는 편이…….”

    “제가 도와줄게요. 괜찮지?”

    미카엘이 선뜻 나섰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앤지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늘 다정하고 배려심 넘쳤던 미카엘은 마지막까지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시간,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저택의 3층, 애틱 창틀에 기대서서 헤네랄리페 정원 쪽을 굽어보았다. 일꾼들이 온실 뒤쪽의 별채 건물을 바삐 오가며 정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길 한참, 경사진 지붕에서 푸드덕 날갯소리가 들렸다. 새가 날아가는 기척에 카일은 정신을 차리고 창가의 책상 앞에 앉았다.

    편지를 쓸 종이는 이미 한참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제롬도 편지를 받아 가기 위해 아래층에 대기 중이었다.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펜을 들어 빠르게 써내려 갔다. 편지라기엔 짧았지만 어느 때보다 더 무거운 고뇌가 담긴 몇 줄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앤지.

    직접 배웅하고 말로서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유감이야. 앞으로 내 신변에 대해 어떤 말이 들려도 절대 동요하지 마. 나를 믿어. 모든 진실은 수도에 가서 다 밝힐게.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은 오직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니까 너를 향한 내 마음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길 바라. 늘 그랬듯이 나는 너만을 사랑해, 앤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너의 카이로부터」

    까마귀 무리가 지붕으로 돌아왔는지 날갯짓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요란한 울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스산한 그 소리를 응징하기라도 하듯, 봉투에 인장을 찍는 손에 힘이 실렸다.

    * * *

    앤지는 마차에 타기 직전, 블랙웰 하이츠 본 저택과 한참 떨어진 별채 쪽을 돌아보았다. 아름드리나무가 열을 지은 이랑 너머, 헤네랄리페 정원의 아치형 입구가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꼭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앞으로 사흘 뒤엔 별채의 정비가 끝난다. 그러면 예정대로 도련님과 다시 만날 수 있다. 앤지는 그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기 중인 마차를 향해 돌아섰다.

    부모님의 농가에 도착하자 모친 로라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침 자수 모임의 마리아와 엠마, 스테파니도 집에 와 있었다. 레티샤와 그녀를 따르는 무리는 없어서 내심 마음이 놓였다. 앤지를 싫어하는 그들도 왔다면 모두에게 불편한 자리가 되었을 터였다.

    미카엘과 마부 재커리까지 다 함께 앉아 다과를 나눌 때였다. 재커리가 이만 가 봐야겠다며 일어섰을 때, 깜빡 잊었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차! 트렁크를 꺼내느라 잊고 있었다, 앤지. 제롬이 전해 주라 한 선물도 있었는데 말이야. 잠깐 있거라, 바로 가져오마.”

    “제롬 아저씨께서요……?”

    제롬은 고 에드워드 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수행원 겸 시종이었다. 지금은 카일 도련님을 보좌하고 있었다. 제롬이 전해 주라 한 물건은 필시 카이 님의 지시일 터였다. 앤지는 애써 설레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재커리를 따라 일어났다.

    “아저씨, 제가 가져올게요.”

    “무거울 수 있으니 내가 가져올게, 앤지. 그냥 있어.”

    미카엘은 냉큼 일어나 재커리와 집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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