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34/106)
  • #34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

    봄날 초승달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이 더욱 아름다워라.

    마르틴 실바, 본래 이름 필립 베케트는 뇌리 어딘가 들러붙은 노래를 콧노래로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국이자 트리에스테의 식민지였던 노바젤란디아, 태평양 남쪽에 면한 섬나라의 원주민들이 즐겨 불렀던 민요였다.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같이 불렀던 아이…… 누구였더라.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원에 보내지기 전, 누군가에게 가르쳐 줬던 기억이 간헐적으로 떠올랐다. 요즘은 더 자주 생각나는 것 같았다.

    마르틴은 기차에서 내려 다소 쓸쓸한 겨울 시골 역을 훑어보았다. 마차를 곧장 잡아타고 마을 한가운데 도착했을 때도 스산함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을씨년스러움은 2월의 한기 때문일 뿐 침체된 분위기와는 달랐다.

    빈터가르의 외곽, 작은 마을 레반은 몇 달 전과 또 달라져 있었다. 새롭게 증축된 마을 회관과 강가의 다리, 이제 곧 들어설 발전소 자리 및 땅을 새로 갈아엎는 공사 현장은 지역 공동체의 발전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빈터가르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곧 나라 전체가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될 터였다. 수년 안에 대륙을 단시간에 횡단할 수 있는 철도가 깔리고, 모든 범선이 증기선으로 바뀔 날이 머지않았다.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발발했던 대륙전의 여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국경 너머 트리에스테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만 하고 있으니…….

    정보망에 의하면, 트리에스테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 일로에 있었다. 황실은 카일룸교의 정식 종교 승인에 이어, 수도 헤데스타드를 중심으로 통금 시간을 강화하고 여성의 사회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두는 등 봉건제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었다. 산업 혁명과 시민 계급의 활발한 부상 등 빈터가르 같은 주변국의 변화는 안중에도 없는 형국이다.

    조만간 새로운 블랙웰 공작이 수도로 건너갈 텐데. 카일렉 로던 블랙웰. 그는 과연 어떤 행보를 걷게 될까. 아니, 그 전에…… 앤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계속 꿈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어젯밤 빌렘 반 아미티지가 브린의 집에 들러 배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다. 앞으로 3주 뒤, 이제는 항해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섬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길 기원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더 이상 걸리는 건 없었지만 브린도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애를 먹긴 했었다.

    -브린. 절대 안 돼. 항해 자체가 여성에겐 힘든데 그 몸으로는…….

    -괜찮아요. 스틱으로 걷는 데 크게 지장 없잖아요. 어차피 배 안에서는 뛸 일도 없는데.

    -브린. 냉정하게 말해서 네가 따라가면 마르틴에게 짐만 될 뿐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가장 도움이 되니 더 이상 떼쓰지 말거라.

    빌렘이 거들어 준 바람에 간신히 브린을 말릴 수가 있었다. 5년 전, 그가 납치범의 소굴에서 구해 내는 과정에서 3층 난간에서 잘못 떨어지는 바람에 브린의 오른쪽 발목이 뒤틀려 절게 되었다.

    일상생활에 커다란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는 것 정도는 배 안에서 문제 되지도 않으리라. 하지만 평범한 항해가 아니기에 절대 그녀를 동행시킬 순 없었다.

    “손님. 다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마르틴은 마차에서 내려 아담한 시골 농가가 늘어선 길목에 들어섰다.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던 노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반갑게 맞았다. 전쟁 중에 살아남은 캐서린 베케트, 그의 작은 할머니였다.

    “어서 오련, 필립!”

    “별일 없으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와서 죄송해요.”

    마르틴은 노파의 마른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그녀를 돌봐주는 부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그가 가져온 마들렌과 휘낭시에, 살구잼과 스콘으로 잠시 티타임을 가졌다. 칠순에 가까운 마리아가 씹기 좋도록, 브린의 요리사가 전날 일부러 부드러운 것으로만 구워 주었다.

    “할머니. 브린이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답니다. 집에 일이 생겨서 오늘은 함께 오지 못했어요.”

    “누구? 저기, 잡화점 딸 브리아나는 아는데 브린은 처음 들어 보는구나.”

    “전에 말씀드렸던 제 약혼녀예요. 브린 메이어 아미티지.”

    “아…… 아아! 그래, 기억난다.”

    노파는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다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손뼉을 쳤다. 예순 후반의 나이에다전쟁의 후유증까지 더해 캐서린은 건망증이 심했다.

    마르틴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찻잔에 홍차를 더 따라 주었다. 몇 달에 한 번씩 방문할 때마다 점점 더 깜빡하시는 빈도가 잦은 듯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과거의 일은 자잘한 것들까지 또렷이 기억했지만 최근의 일일수록 더 쉽게 망각하시는 것 같았다.

    캐서린 베케트는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소중한 혈육이었다. 전쟁 중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 역시 고아원에 보내졌을 때만 해도, 다시는 일가 중 누구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컬리넌 섬에 납치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빈터가르에 돌아와 기억을 온전히 찾았을 때, 마르틴은 일가의 생존자가 없을지 틈틈이 수소문하며 찾았다. 그러다 상냥했던 캐서린 할머니의 생존 소식을 듣고 레반 마을로 다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블랙웰 공작가의 수하들이 혹 그의 출신 배경을 추적할까 두려워 자주 올 수는 없었다.

    “브린……. 그래. 전에 데려왔었지. 갈색 고수머리에 아주 예쁜 아가씨였어. 머리색과 눈 색깔은 다르지만 그 아이, 릴리안의 딸을 닮은 것도 같았어.”

    “릴리안……? 그분이 누구셨죠?”

    레반 마을에 모여 살았던 베케트 일가는 꽤 대가족이었다. 마르틴은 어릴 적 수십 명이 넘었던 아버지 쪽 여자 친척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 네 사촌고모 릴리안 말이다. 로르샤 마을의 대지주, 토마스 윈의 장남에게 시집간 릴리안 말이다. 릴리라고 하면 기억이 나겠니? 다들 릴리, 릴리, 이렇게 불렀단다. 내가 사진을 보여 주마. 기다려 보렴.”

    노파는 응접실에서 일어나 방으로 가더니 한참 만에 액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전쟁이 터지기 전 어느 봄날, 13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었던 일가의 사진이었다. 전쟁 전 사진기가 처음으로 발명되어 빈터가르 도심에서 이 시골까지 흘러왔던 어느 날, 사진사가 무거운 사각형 기기를 길 한복판에 놓고 렌즈를 몇 시간이나 햇빛에 노출시켰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보렴. 흑백이지만 여기, 금발 머리 여자가 릴리안이란다. 네 아버지 헨릭의 둘째 여동생, 그러니까 네 고모였지. 이 아이는 릴리안의 딸. 이름이…… 아, 앰버였어. 그래. 앰버 윈.”

    “앰버…….”

    마르틴이 사진 속 꼬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아는 인형처럼 사랑스럽고 예뻤다.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온통 검은색과 흰색만 교차해 있는 아이의 미소 위로, 벌꿀색 금발과 초록색 눈이 겹쳐져 보였다. 그러자 그 조그만 얼굴이 매우 낯익은 누군가의 것으로 바뀌었다. 마르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앤지……?”

    입술 사이로 이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노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 보였다.

    “아니, 필립. 앤지가 아니라 앰버야. 네가 네 어머니의 고향 노래도 앰버에게 가르쳐 줬잖니. 그것까진 기억이 안 나려나? 릴리안 부부가 살던 로르샤 마을은 꽤 멀어서 일 년에 두세 번 오는 게 고작이었지. 자주 보진 못했지만 너랑 앰버는 꽤 사이가 좋았어.”

    그러고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가사는 생각나지 않는지 콧노래일 뿐이었지만. 마르틴의 뇌리 속 깊이 묻혀 있던 잔상을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열세 살, 꼬마였던 그가 훨씬 더 작았던 사진 속 여자아이와 마주 보고 노래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

    봄날 초승달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이 더욱 아름다워라.

    -필립, 나 이제 잘하지? 다 외웠어!

    -응. 다음엔 다른 노래도 가르쳐 줄게. 내년에도 꼭 레반에 와.

    이럴 수가.

    마르틴은 사진 속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홀로 충격을 감당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혼란이 격렬하게 몰아쳤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앤지 리즈델이 그의 꿈속에 나타났는지. 왜 하필 다른 사람 아닌, 그와 꿈을 통한 교류가 가능했는지.

    그가 단지 이스케이피, 탈출자인 까닭이 아니었다. 앰버, 즉 지금의 앤지 리즈델이 그와 혈육이기 때문이었다. 직계존비속은 아니라도 일가임은 틀림없다. 물론 여전히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꿈에서 서로 소통을 나누었다.

    “앤지가 바로 그…… 앰버였어. 내 사촌. 앰버 윈.”

    “그렇다니까. 앤지가 아니라 앰버란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캐서린은 찻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힌 듯, 창밖의 헐벗은 나무를 보는 시선이 어딘가 아련했다.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전쟁 중 어떻게 되었는지 이젠 생사도 모르니.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내가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르틴의 심장이 쿵, 쿵, 둔중한 울림을 이어 갔다. 비로소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처음 그 아이를 꿈에서 봤을 때부터 느꼈던 의무감, 반드시 구해 내야 한다는 절실함이 이제야 납득이 갔다.

    어쩌면, 할머니를 제외하고 하나 남은 베케트 사람일지도 몰라. 그녀의 경우는 어머니 쪽이 베케트지만…… 여전히 우린 한 일가야.

    그는 열세 살쯤 컬리넌 섬에 끌려와 열여섯에 탈출했다. 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앤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섬에 간 시기는 왠지 그가 빠져나간 그 이후일 것 같았다.

    “캐서린 할머니. 앤지, 아니, 앰버…… 살아 있어요. 제가 무사히 데려올게요, 반드시.”

    노파는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어깨가 위아래로 희미하게 들썩였다. 마르틴은 사진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겨울 오후의 햇살이 그와 노부인의 정적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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