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33/106)
  • #33

    -선장의 말에 의하면 현재 황실에는 적령기의 황녀가 없는 모양이야. 우리끼리니까 말이지만 언제 왕가의 대가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일 수 있어. 내 기억으론 25년 전만 해도 황제 폐하에겐 후사가 없었으니까.

    -전쟁 이전에도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았잖아요. 황제 폐하가 이상한 종교에 빠져 비밀리에 이상한 의식을 집전하느라 저주에 들린 탓이다, 이러다 제국이 멸망하는 게 아닌가 어른들이 모이면 걱정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바깥 물정은 전혀 모르지만 사실 황실은 어찌 되든 상관없지. 우리 뒤엔 블랙웰 공작가가 있으니까.

    -어쨌거나 도련님도 수도에서 계승식을 마치면 귀족 영애 중 하나를 골라 약혼부터 하시겠죠? 후사가 급해요. 나라가 어떤 모양새인지는 몰라도, 블랙웰 일가가 황실에 버금가는 실권을 쥐고 있는 이상 공작가의 미래가 곧 제국의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앤지는 사과주를 한 잔만 더 마시고 저택으로 돌아가겠다며 찬장으로 향했다. 도련님의 약혼에 대한 언급이 계속해서 뇌리에 잠식해 들어왔다.

    “앤지, 줄 것이 있어.”

    옷깃 스치는 소리에 회상이 멎었다. 풍부한 저음이 앤지를 다시 현실로 되돌리며, 잠시 멍했던 두 눈이 카일이 꺼낸 상자로 향했다. 조그만 벨벳 상자가 열리며 그 안에서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건……?”

    “컬리넌 다이아몬드. 이 섬과 같은 이름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거야.”

    그가 별처럼 빛나는 브로치를 들어 케이프로 덮인 가슴 위에 꽂아 주었다. 그의 코트 깃에 꽂힌 은빛 독수리, 공작가의 상징과 같은 위치였다.

    앤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브로치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에 오붓이 담길 정도로 작았지만 그 광채는 달빛만큼 밝았다. 반딧불이가 내뿜는 푸른 빛에 뒤지지 않았다.

    “가문의 여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이야. ‘세이크리드 티어(Sacred Tears)’, 성스러운 눈물이란 뜻이지. 통칭 세이크리드로 부르고 있어.”

    “가문의 여인에게?”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렸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네 거야, 앤지.”

    “하지만 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네가 아니면 누가 받을 수 있겠어. 너 외의 주인은 없어.”

    “카이…….”

    “원래는 목걸이와 반지를 주고 싶었어. 디바인 티어라(Divined Tiara)라 불리는 또 다른 다이아몬드가 있어. 하지만 그건 예식 중 언약의 맹세를 하며 손가락에 끼워 주기까지는 전하지 않는 게 관례거든.”

    예식이란 말에 앤지의 가슴이 덜컥 뛰었다. 혹시 이것이 그 나름의 청혼일까? 하지만 그녀는 귀족의 여식도 아니며, 하다못해 본토의 외가가 공작가의 방계인 레티샤처럼 혈통이 좋지도 못했다. 평민인 부모님의 농가에 살면서 가끔씩 임시 메이드로 저택에 불려 와 잔심부름을 하는 앤지 리즈델일 따름이었다.

    “카이.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당신은 황실의 방계인 블랙웰 공작이지만 저는……”

    “그건 돈으로 주고 산 신분이야, 앤지. 블랙웰 공작가는 1차 대륙전 때 이미 멸문되어 버렸어. 전쟁 중 공작의 후계자인 에어와 차남 스페어 둘 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따라 참전했다가 전사한 지 오래야. 직계, 방계도 모두 죽었고. 그래서 내 조부인 존 피츠로이가 막대한 거금을 주고 작위를 대신 계승한 거야. ”

    “네……?”

    앤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우리 집안은 젠틀리 계급일 뿐이었어. 수도의 대지주로 부족한 게 없었지만, 전쟁 직후 사업이 무기와 약, 각종 무역으로 뻗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뒤늦게 최상류 계급에 대한 욕심도 생기신 거겠지.”

    “아……. 그랬군요.”

    “그리고 유제니아 블랙웰, 선대 공작 부인에 대해서도 말했던 것, 기억하지? 전에도 말했듯 내 모친은 가정 교사의 딸이었어.”

    “하지만…….”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앤지.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 그리고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찌를 듯 푸른 눈이 순간 아련해졌다. 하지만 앤지는 그 눈빛을 더 볼 수 없었다. 카일이 그녀를 제 품에 끌어당겨 안는 즉시 그녀의 시야는 검은색 베스트에 뒤덮여 버렸다. 달콤하지만 어딘가 슬픈 저음이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나를 받아 줄 수 있겠어? 너만의 한 사람으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자로…….”

    “당연하잖아요, 카이.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는데…… 당신 외 다른 남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고마워. 기뻐.”

    그의 눈빛에 서린 아련함이 한순간 비통함으로 변했다. 카일은 눈을 꼭 감고 앤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사랑해, 앤지. 너만을…… 사랑해.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이터니티(eternity)가 떠오르며 뇌리에 한 줄기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시 닫혔다. 그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앤지가 충격받지 않도록. 행여나 벌어질 오해를 막기 위해 반드시 미리 일러두어야 하리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모든 치부 또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것은 용기와는 사뭇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앤지가 그를 사랑한다 해도,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그를 받아들일지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은 그럴 수 있었다. 앤지가 괴물이든, 괴물의 후손이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자신은 그 손을 잡고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든, 구원의 동아줄이든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앤지, 눈앞의 여자라는 존재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생사의 문제는 과분한 사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의 감정이 그녀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절실하며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잊지 마.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널 더 사랑한다는 걸…….”

    지고한 사랑과 추악한 소유욕은 결국 한 끗 차이일 뿐, 미추가 양립하는 이 마음을 누를 방법은 없었다. 아마도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이 나리라.

    하지만 나는 너와 생을 누리고 싶어, 앤지. 불멸 따윈 바라지 않아. 그저 남들처럼 유한한 생 속에서 너와의 일상, 너와 함께 하는 희로애락 속에서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삶을 영위하고 싶을 뿐이야.

    네가 있어 어제보다 좀 더 소중한 오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너와 매일을 살고 싶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죽음조차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죽음 이후에도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카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앤지가 포옹에서 벗어나 그의 안색을 살폈다. 꺼질 듯 침잠한 목소리, 붉게 젖은 눈가가 반딧불에 반사돼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카이. 괜찮아요?”

    “잠깐 감정이 벅차올랐어. 그뿐이야. 그리고 이건……”

    그가 앤지의 가슴 위에서 빛을 발하는 브로치에 시선을 주었다. 역시 지금은 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 감동과 환희에 물든 앤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괜찮을 거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내 언약의 증표로 여기고 잘 간직해 줘. 다른 얘기…… 할 얘기가 좀 더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다른 얘기? 그게 뭔데요? 지금 다 말해 주면……”

    “나중에.”

    그가 앤지를 다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맞붙은 가슴 너머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카일은 그녀를 안은 채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이 심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널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거야, 앤지. 비록 다른 이들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내장을 헤집고, 그 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은 지킬게.

    세이크리드 티어, 성스러운 눈물이 그 이름처럼 숭고한 언약이라면 지금의 다짐은 목숨을 내건 맹세나 다름 없었다. 그는 앤지를 위한 언약과 맹세 둘 다 반드시 지킬 결심이었다.

    앤지는 고양된 기쁨에 휩싸여 그의 온기를 만끽했다. 수십만 나비가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직접적인 청혼도, 반지도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안심되었다. 생전의 유제니아 님, 도련님의 어머니에게까지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브로치라니.

    보석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욕심도 없었다. 오직 그것이 지닌 의미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단지 그 하나만으로, 그리고 수도에 함께 가자는 권유만으로도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수도행은 당분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지시를 내릴게. 수도의 영지에 모든 게 다 있을 테니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네. 그렇게 할게요, 카이.”

    “낮에 들었겠지만 별채가 내일부터 수리에 들어갈 예정이야. 폭풍으로 지하실 물이 고여 재정비가 필요한 모양이니까…… 일주일 후에 만나자.”

    “네. 일주일 후 헤네랄리페로 올게요.”

    “재커리 편에 편지 보낼게. 답장해 줘. 아주 짧게라도. 답장이 없으면 불안하니까.”

    앤지는 응,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카이 님이 불안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염려 말아요.”

    카일은 그제야 안심한 듯 앤지의 이마에 재차 입을 맞추고, 장갑 낀 두 손으로 발그레한 볼을 감쌌다. 앤지가 춥지 않다고 사양했지만 기어이 제 코트를 벗어서 망토처럼 둘러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숲을 가로질러 다시 별채로 향했다. 하나로 녹아든 두 인영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마다 유령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요한 밤하늘을 몇 차례 선회하던 겨울 독수리가 발톱을 가지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본체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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