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3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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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절벽 아래를 가리켜 보였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블랙웰가의 또 다른 집이 바로 아래 있었다. 무척 낯익은 광경이었다. 앤지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제야 벼랑의 위치가 파악된 탓이다. 부모님의 일터인 북쪽 해변가 언덕, 수산물을 관리하는 용도로 쓰는 별장이 바로 아래 있었다.

    “아, 이 아래가 노스쇼어(North Shore)였군요. 부모님 따라 가끔 왔었는데! 하긴 그때는 늘 낮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 이 절벽이 공작저와 바로 연결되는 줄은 몰랐어요.”

    처음 그를 따라올 때는 어둠 때문인지 멀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거리상 꽤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공작저와 절벽 간 거리만 인접한 것이 아니라, 절벽과 아래쪽 언덕과의 고저도 그리 높지 않았다. 소리쳐 부르면 금방 돌아보고 얼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편이었다.

    “고백하자면 가끔…… 여기서 널 내려다 본 적도 있었어. 네가 저택에 책을 읽어 주러 오지 않을 때는 가끔 부모님을 도와주러 온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컨디션이 나쁘지 않을 때는 늘 여기 나와 있었어. 햇빛을 쬐지 않게 제롬이 머리 위로 양산을 받쳐 주고 두건을 몇 겹이나 쓰고 말이야. 오직 널 보기 위해서.”

    오직 너 하나만을 보기 위한 일념으로 그랬었지.

    그의 덧붙임에 앤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련님이 자신을 이 위에서 보고 있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일이 벼랑 아래, 계단처럼 언덕까지 이어진 길을 가리켜 보였다.

    “예전에…… 재작년 가을이었나. 네가 저 아래서 꽃을 꺾다가 언덕 아래로 떨어질 뻔했을 때가 있었어. 기억해?”

    앤지는 고개를 저었다. 발을 헛디딜 뻔한 적은 가끔 있었던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언덕 바로 아래가 바다이긴 했지만 수심이 얕은 쪽이라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나도 모르게 뛰어 내려가 널 잡아끌 뻔했는데…… 마침 네 부친이 나오셔서 주의를 주셔서 꾹 참았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카이가 지켜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태풍이라도 불면 해변가 바다도 안전하지 않아.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이니까 조심해야 돼.”

    “요즘은 저택에만 있느라 여기 올 수 없어요. 일손이 많아져서 부모님의 일도 한결 수월해지셨고요.”

    “나 역시 이쪽은 오랜만이야. 3월 계승식을 앞두고 차기 공작으로서 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네. 매일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바쁘시다 들었어요…….”

    앤지는 시무룩해질 뻔한 얼굴을 애써 밝게 유지했다. 그럼 이제 도련님을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내일이면 2월의 첫날이었다. 며칠 터는 마을에서 새로운 메이드들이 영입될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시종장 야스민이나 던스트 부인에게 청해서 저택에서 더 오래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해가 지는 순간부터는 너만을 위한 시간이야, 앤지. 매일 자정쯤 마차를 보낼게, 올 수 있는 날은 와 줬으면 좋겠어. 부모님이나 다른 일로 오지 못한대도 괜찮아. 일찍 잠들었어도 좋아. 단지…….”

    그가 앤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이나 애틋한 키스였다.

    “아프지만 마. 몸이 아파서 오지 못하는 거라면 내 마음이 찢어질 테니까.”

    “카이…….”

    따뜻한 입술이 모자의 차양을 들추고 동그란 이마와 고운 눈두덩, 귀여운 콧날을 몇 번 더 누르고야 떨어졌다. 앤지는 카일의 리퍼 칼라로 손을 뻗어 라펠을 세우곤 단추를 꼭 여며 주었다. 아까 감기라도 걸릴까 봐 저를 보듬어 주던 그의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늘 그렇듯 저는 무척 건강해요. 카이가 걱정될 뿐…….”

    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감기나 잔병치레 앓는 일 없이 늘 건강했다. 작년 초, 사람들이 그녀를 붙잡고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는 기묘한 악몽을 꾸며 가위에 시달릴 뻔한 적은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꿈속의 마르틴 실바란 남자가 경고한 대로, 장미차도 더는 음용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피부가 푸석해지는 등 금단 현상 같던 신체의 이상 증세도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차를 끊었는데도 또 다른 기억이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나탈리아나 루시아에 대한 기억도 어느덧 가물가물해졌고, 무엇보다 마르틴의 꿈을 꾸는 일이 없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마르틴의 얘기를 한 적이 없어. 지금이라도 도련님에게 털어놓아야 할까? 그편이 낫겠어.

    하지만 그가 좀 더 빨랐다. 앤지가 입을 열기 직전, 카일이 먼저 운을 뗐다. 음색이 가라앉아 있었다.

    “앤지. 앞으로 한 달 뒤…… 2월 마지막 주에는 수도에 갈 예정이야. 헤데스타드로.”

    “네……. 저도 알고 있어요.”

    던스트 부인이 오늘 오전 메이드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언질을 준 바 있었다. 모두가 흥분에 겨워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입에서 놓지를 않았다. 앤지도 깜짝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정말 놀랐어요. 드디어 섬 바깥으로, 본토로 갈 수가 있다니! 종전 후에도 트리에스테에 생존자들이 있었고 황실도 무사히 복구가 되는 중이라니. 게다가 섬을 둘러싼 괴어들도 종적을 감춰서 이제는 항해가 가능하다니까 정말 축복 같은 소식이에요.”

    카일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황실 선장으로 위장된 수도의 방계 일원, 그리고 던스트 부인이 꾸며 낸 이야기였다.

    블랙웰 일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는 이제 레머디 없이도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앤지의 피를 취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광증을 이겨 내고 버텨 낸 결과였다. 따라서 더 이상은 섬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차기 공작의 수도행을 레머디들이 납득할 수 있게끔 한 편의 위장극이 교묘하게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은 지금까지처럼 유지되어야 합니다. 존재 자체도 철저히 숨겨져야 하고요. 황실 직계 외엔 절대 알려져선 안됩니다. 일 년에 두세 번, 달의 주기에 의해 안개가 걷히는 날에만 항해가 가능한 척 속여야 해요. 저희 같은 헬퍼들은 상관없지만 레머디 아이들은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3년 전 엘리엇 호킨스와 같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를 여분의 레머디 중 하나, 엘리엇은 패기에 차서 섬 바깥으로 떠나고자 모험을 감행했었다. 그리고 윈드를 지키던 헬퍼가 그를 추격해 죽이고 괴상어에게 당한 것처럼 잔인하게 사지를 찢어 놓았다. 누구도 섬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짓된 진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본보기였고 그 효과는 꽤 파장이 컸었다.

    “나도 믿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수도는커녕 태어나서 한 번도 섬 밖으로 나가 본 적 없으니까.”

    “황궁에서 친히 배까지 보낸다니까 정말로 안전한 거겠죠? 그럼 얼마나 있다가 돌아오시는 거예요? 항해에 계승식까지 하시고 나면…….”

    앤지가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대로 수도로 가셔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만에 하나, 귀향 때 항해가 막히게 되면? 그럼 이대로 영영 이별하게 될 수도 있는 걸까.

    “최소 몇 개월은 걸릴 거야. 당분간 섬과 수도를 오가게 될 것 같지만…… 아무래도 헤데스타드 영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겠지.”

    “아……. 역시…….”

    앤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푸른 띠를 두른 해안선을 배경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낯이 연약한 선을 그렸다.

    그럼 한 달 후엔 결국 카이 님과 헤어지게 되는 걸까. 혹시 오늘 밤 여기 데려와 주신 것도 예정된 이별을 미리 고하기 위해서……?

    “너도 함께 가자, 앤지.”

    “네……?”

    앤지는 깜짝 놀라 눈물이 차오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헤데스타드에 함께 가 줘. 말했듯이 섬에 언제 올지 정확히 기약도 할 수 없고, 차차 수도에 정착하게 될 테니까.”

    “…….”

    “싫어……?”

    달빛 아래 검푸른 벽안이 일순 흔들렸다. 앤지의 침묵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어리고 있었다. 앤지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싫을 리가요. 그럴 리 없잖아요.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단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다니 갑자기 겁도 나고, 저 역시 도련님처럼 이 섬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다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

    -아니, 앤지 당신은 이 섬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잃었던 기억을 찾아야 해요!

    앤지의 말이 멈췄다. 마르틴 실바의 목소리가 불현듯 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꿈에서 나타나 주장했던 그 말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것인지.

    “앤지.”

    그 갑작스러운 절언(絶言)에 카일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거칠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손끝에 확고히 실려 있었다.

    “부모님은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한다면, 당장은 어렵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리즈델 부부도 수도로 오게끔 조치할 테니까.”

    “정말요? 그럼 저도 안심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기쁨에 눈물을 글썽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기실 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두 사람의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그를 따라 수도에 가게 되면 당연히 수행 메이드나 심부름꾼으로 동행할 터였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작 계승식을 거쳐 블랙웰 가문의 공식적인 수장이 되면, 수도 여기저기서 혼담이 쏟아질 것이다.

    어제 주말이 아닌데도 집에 들렀을 때였다. 던스트 부인이 부모님 몫으로 나눠 준 치즈를 전해 주는 김에 저녁도 함께 들게 되었다. 전쟁 전 유년 시절을 수도에서 보냈던 리즈델 부부는 그게 정해진 수순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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