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31/106)
  • #31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라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좋아. 너만 이대로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네? 혹시 불멸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사후 세계?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네 소원은 뭐지?

    -저는 지금처럼 섬의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요. 물론 도련님의 건강과 행복 역시.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언젠가 바다 너머 바깥세상으로 가 볼 수 있는 날도 왔으면 좋겠어요. 부디 다른 세상에도 우리처럼 무사히 살고 있는 생존자들이 많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언젠가 나갈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나도 그러길 바라.

    내가 데리고 나가 줄게, 앤지.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채 못다 한 말이 옅은 웃음 속으로 녹아들었다.

    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네 것이야. 네가 내 미래를 틀어쥔 채 행복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

    난 뭐든 할 거야. 너 하나만 지키기 위해서라면.

    헤네랄리페(Generalife), 노래하듯 혀끝을 간지럽히는 이름의 온실 정원은 매일 밤 밀월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비로소 사랑을 확인한 남녀는 매일 밤 그곳에서 조우했다. 합의조차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정마다 서로를 맞았다.

    앤지는 공작저의 임시 메이드로서 일하는 주중은 물론, 부모님의 농가에서 지내는 주말에도 그를 만났다. 제 침실에서 정원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와 마차에 오르는 동안은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두 분 다 깊이 잠드는 편이라 한 번도 들킨 적은 없었다.

    꿈만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고지대에 위치한 블랙웰 힐은 아래쪽 마을보다 더 추웠다. 하지만 1월 밤의 혹한도 두 남녀의 밀회를 막지 못했다. 사실상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매일 밤, 둘만의 세계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환희의 밀어를 나누었다. 장밋빛 미래는 서로의 눈 속에 있었고, 깊고 애틋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쳐 바다를 이룰 것 같았다. 심장은 운명의 반쪽을 찾았다는 행복감으로 늘 충만해 있었다.

    * * *

    1월의 끝 무렵,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어느 새벽, 범선 하나가 동쪽 해변가에 쓸려왔다.

    태풍에 선원을 모두 잃은 선장은 놀랍게도 섬의 본토인 트리에스테 제국의 황실 소속 해군이었다. 그는 수년째 블랙웰 일가의 섬을 찾으러 항해한 끝에 드디어 컬리넌 섬에 도달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태풍에 휩쓸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공작님의 섬에 오게 되다니……. 이 부근은 안개 때문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해역이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여기만은 무사했던 것이군요! 신의 보살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괴상어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포착된 바가 없었어요.”

    주민 모두는 처음으로 나타난 외부인의 존재에 이어, 바깥세상이 전쟁의 여파에서 안전하게 회복되어 가는 중이며 전염병의 유행도 끝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십 대 아이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와아, 바깥세상이 이제는 안전하다니! 그럼 우리도 본토로 갈 수 있는 거예요? 항로가 뚫리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아직 안개 때문에 당장은 어렵고 몇 년은 지켜봐야 한대! 하지만 결국은 본토와 섬을 자유롭게 오가는 게 가능하겠지.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한동안 섬은 시끌벅적, 종일 잠잠할 날이 없었다. 앤지 역시 공작저는 물론 일요 예배당과 자수 모임에서도 귀가 따가울 만큼 그 화제를 들었다. 그녀 역시 설레고 기쁘긴 했다. 아무리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섬이라지만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없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들뜬 마음 저편에선 불안감도 있었다. 다름 아닌 카일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도련님도 본토로 건너가시게 되겠네? 2월 마지막 주, 달의 주기로 안개가 걷히는 날 선장이 다시 배를 띄울 거라고 했으니까 그때 도련님도 가시지 않을까?”

    “그러실 것 같아. 황실에서 그동안 공작가의 행방을 수소문해 찾았다고 하니까 이번에 모셔가겠지? 본토에서 안개를 걷히게 할 방법을 찾아낼 것 같은데, 그럼 드디어 우리도 본토로 가 볼 수 있겠다!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

    친구들이 흥분에 겨워 한마디씩 할 때마다 앤지의 동요는 조금씩 더 커져 갔다. 바깥과의 단절이 깨지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로 인해 도련님과 그녀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언젠가 마르틴 실바가 꿈 속에서 이미 바깥세계를 언급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 * *

    그날 밤, 앤지는 도련님을 만나지 못했다. 메이드룸 문 틈새를 통해 들어온 편지에는 그의 우아하고 섬세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나의 앤지.

    오늘 밤과 내일 밤은 선장과 나눌 얘기가 많아서 만나기 어렵겠어. 모레 자정에 헤네랄리페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카이가.」

    그를 이틀 밤 연이어 만날 수 없다니 벌써부터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앤지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편지를 소중하게 접었다. 이번에는 곧바로 침대 밑 비밀 상자에 넣지 않았다.

    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를 풀었다. 촛불에 반사된 긴 금발이 오렌지빛깔을 띠고 있었다. 앤지는 허리께까지 탐스럽게 물결치는 머리칼을 가지런히 모아 캡을 쓰고는 촛불을 껐다. 여러 겹으로 접힌 편지를 베개 아래 둔 채였다.

    머리를 베개에 얹고 눈을 감자마자 카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속된 기도가 속절없이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해 들어왔다.

    카이. 날 버리지 말아 줘요. 언젠가 도련님이 말했듯 나는 당신에게 유일한 여자인 거죠?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카이 님의 단 한 사람, 소중한 운명이라면 나를 내치지 말아 주세요.

    늘 함께 있어 주세요.

    * * *

    이틀이 지나가 고대하던 밤이 되었다. 1월의 마지막 밤, 앤지가 자정쯤 방을 빠져나와 헤네랄리페 정원 안에 도착했을 때였다.

    “앤지. 보여 줄 게 있어. 따라와 봐.”

    카일은 그녀에게 포옹과 키스를 퍼붓고는 정원 밖으로 이끌었다. 밤공기가 유독 포근한 밤이었다. 폭설의 잔재가 스러지고 연일 기승을 부리던 추위도 살짝 누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카일은 그녀가 추울까 봐 자신의 모피 머플러까지 둘러 주곤 별채가 아닌 바깥으로 데려갔다.

    “카이, 어디 가는 거예요? 여긴……”

    “거의 다 왔어.”

    둘은 블랙웰 하이츠의 후원과 이어지는 숲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었다. 사용인들도 오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앤지는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도 숲의 어둠이 무서운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괜찮아. 나랑 있는데 두려울 게 뭐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카일은 앤지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것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옅게 미소짓는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앤지도 마주 웃어 보였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숲의 막다른 끝에 근사한 것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대체 뭘까. 도련님이 준비한 깜짝 선물…….

    드디어 마지막 아름드리나무를 지났을 때였다. 카일이 앤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그녀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눈을 살짝 가렸다. 그만의 알싸한 체취가 전신 가득 감미롭게 스며들었다.

    “이대로 몇 발짝만 걷는 거야. 날 믿고…… 천천히.”

    앤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조심조심 한 발짝씩 나아갔다. 가려진 눈 아래, 도톰한 입술이 즐거운 듯 살며시 올라가 있었다. 단화 굽 아래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러진 가지와 낙엽의 잔재가 밤의 적막 위로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자……. 이제 천천히 눈을 떠 봐.”

    잠시 후 카일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두 손을 앤지의 눈에서 떼고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려뜨렸다. 앤지는 눈을 떴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경탄의 탄식이었다.

    “와아! 어떻게 이런…… 너무 아름다워요!”

    두 사람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공작저가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기에 숲의 끝에 절벽이 있다는 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벼랑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풍광은 절경 그 자체였다.

    달빛이 내리는 해변과 수면 모두, 월광보다 훨씬 더 눈부신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장관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띠 모양으로 길게 늘어선 빛무리는 섬을 둘러싼 윈드의 행렬, 그 주위를 둘러싼 안개와 어우러져 한층 더 신비롭게 보였다.

    “어떻게 저런 색을 낼 수 있죠? 달빛보다 더 밝아요.”

    “바다 반딧불이라는 발광체야. 갯반디라고도 하지. 매일 밤 이렇게 빛을 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올 때만은 그랬어. 그리고 오늘도 역시.”

    카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달보다 더 밝은 반딧불 때문에 그의 웃음은 낮보다 더 환해 보였다. 아름다운 선을 그린 입술 아래, 가지런히 자리 잡은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여기 데려온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앤지. 아버지도 어머니와 결혼 전에 여기 자주 오셨다고 해.”

    “아……. 그렇군요. 정말 예뻐요. 태어나서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것 같아요.”

    “나중에 이쪽 절벽만 숲을 들어내고 별장을 지을 거야. 널 위해서.”

    “정말요? 하지만 나무를 베고 숲을 훼손하는 건…….”

    “조금만 베어 낼 테니까 괜찮아. 우리 둘만 가끔 머물 수 있게 아담한 단층집을 지을 거니까. 저 아래도 별장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더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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