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30/106)
  • #30

    그는 고개 숙여 앤지의 복부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가슴 아래, 탄탄한 배를 쓸다가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다.

    카일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무릎 끝이 활짝 열어젖힌 두 다리 사이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간절히 원하던 것이 있었다. 허리 끝을 잡고 있던 두 손이 허벅지 안쪽을 움켜잡았다. 앤지의 입 안과 살결 구석구석을 정복하고 탐했던 입술이 열기 위를 지그시 눌렀다.

    “아, 카이…… 님! 카이, 거기는…… 안 돼요……!”

    쉿, 어린 아기를 달래는 듯한 속삭임과 다정한 손길에 앤지의 항의도 잦아들었다. 덜컥 겁이 났던 두려움이 서서히 밀려 가며 몸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의 모든 꽃이나 보석보다 어떻게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지, 끊임없이 감미롭게 속삭이는 음색에 세뇌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사랑해, 앤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앤지를 이루는 모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지와도 같았다. 지상에서 가장 향긋한 낙원은 다름 아닌 앤지 자체였다.

    그가 고개를 들고 허리 위로 바짝 올라왔다.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는 몸짓에, 앤지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긴장을 감지한 카이는 앤지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새처럼 쪼는 몇 번의 키스 뒤, 그의 입술이 앤지의 왼쪽 귓불 아래를 더듬었다. 목과 이어지는 그 민감한 살결을 자극하면 그녀는 더욱 흥분했다.

    “앤지……. 내 것이 되어 줘. 앞으로도 나와 함께…….”

    앤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청혼은 분명히 들었지만 숨 가쁜 헐떡임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스러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앤지…….”

    그의 몸짓이 멈췄다. 두 손이 올라와 그녀의 갸름한 얼굴, 뺨과 턱이 만나는 지점을 감싸 안았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손길이었다.

    “괜찮아?”

    “…….”

    그는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맞췄다. 대답이 없자 불안으로 눈이 흐려졌다.

    “아니……. 안 괜찮아요…….”

    너무 아파. 힘들어. 앤지의 울먹임에 카이의 눈 속 먹구름이 더 짙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속삭임에 그는 안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멈추지 말아요. 끝까지…… 해요.”

    촉촉하게 물든 앤지의 눈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보석을 대하듯, 다정한 입술은 눈꺼풀 위를 지그시 눌렀다. 뒤이어 따스한 혀가 눈가의 모든 물기를 부드럽게 핥아냈다.

    앤지의 두 팔이 그의 목을 둘렀다. 사랑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고백이 다시금 귓가를 간질였다.

    어디선가 거센 파도 소리가 울렸다. 귓전을 스치는 그 울림이 서로의 숨결임을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간 여운은 길고도 짙었다.

    “앤지…….”

    나른한 속삭임이 흘렀다. 카일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기력을 다 한 상태에서도 그는 여전히 생동감이 넘쳤다.

    “사랑해.”

    앤지의 속눈썹이 떨렸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 소리가 점점 안정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제 심장 소리인 줄 알았지만 그 맥동은 카이의 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녹초가 된 몸을 따라 의식도 흐릿해져 갔다.

    “사랑해, 앤지.”

    낮은 선율 같은 고백은 좀 더 이어지다 멈췄다. 앤지는 잠에 빠져들며 새삼 깨달았다.

    아아. 비올라였어.

    그의 음색을 들으며 내내 악기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악기의 형태가 지금에야 확실히 떠올랐다. 카일의 침실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다 살짝 열린 음악실 방문으로 엿보았던 비올라 디 감바, 혹은 사랑의 비올라라는 의미를 띤 비올라 다모레의 음률이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그가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들은 적은 있었다. 그것은 늘 책을 읽어 주고 저택을 나와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드문드문 열린 창 어딘가에서 비올라의 음률이 흘러나오곤 했었다.

    이상하게도, 그 감미로운 현은 그녀가 저택 문을 열고 나와 마차 문을 열 때까지는 시작된 적이 없었다. 마차 안에 올라탄 후 마부가 말들을 출발시키기까지의 짧은 순간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아쉬웠었다. 공작가의 아가씨도 아닌데 마부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청할 수도 없었다.

    -도련님. 혹시…… 비올라를 연주하세요?

    결국 다음 방문 때 직접 물어보았다. 도련님은 휘장 너머에서 덤덤히 대꾸했다.

    -아니.

    -그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음 챕터. 계속 읽어.

    서늘하게 끊는 말에 앤지는 더 캐묻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는 속으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련님은 그녀가 침실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가 저택 밖으로 나오는 동안, 아래층의 음악실에 가서 비올라를 집어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택 문을 나와 마차까지 걸어가는 2, 3분 동안에는 연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어. 창 너머로 보이는 내 모습을 일 초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마차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활을 당기기 시작했던 거야.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와 꼭 닮은, 달콤한 저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던 거지.

    카이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사랑을 나눌 동안, 수없이 거침없이 그 자신의 말처럼.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해. 진심으로.

    앤지는 안락한 수면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알몸을 꼭 부둥켜안은 그의 온기, 숨결, 심장 소리가 기억 속 비올라 선율과 하나로 어우러져 그녀의 잠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처럼 드리운 커튼 너머, 헤네랄리페 정원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부동의 생명체인 꽃과 수목만 가득할 뿐 정원 안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관상조와 공작새도 잠들어 있는 듯 날갯짓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천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의 그림자에 움직임이 실렸다. 드넓은 온실 정원 가장 안쪽, 바깥과 연결된 비상용 쪽문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림자는 구부렸던 허리를 똑바로 펴고 두 발을 흙 위에 디뎠다.

    달빛에 반사된 두 눈이 별채 외벽을 훑고 올라가 3층에서 멈췄다. 밖으로 돌출된 난간 안쪽, 아치형의 고아한 창은 커튼에 휘감겨 있었다. 막 사랑을 확인한 남녀의 열기는 두꺼운 벨벳 천 너머 은밀히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림자는 창을 한참 올려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한참 지나서야 정원을 떠났다.

    * * *

    앤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그랬다. 카일은 갑갑한 휘장 너머를 뚫어지게 훑는 동안에도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열여섯의 앤지는 눈처럼 하얗고 눈이 부셨다. 그녀의 피부는 어떤 보석보다 더 투명하고 맑았다.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그 안에 빠져 버릴 것처럼 크고 영롱했다. 섬세하고 이목구비는 완벽한 비율과 조화 속에 있었다.

    탐스럽게 찰랑이던 금색 머리칼도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순금을 녹여 가닥마다 촘촘히 흐르게 만든 것처럼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녀가 언젠가 시를 낭독하듯 읽어 주었던 <스노우 화이트>의 주인공, 백설 공주의 외모가 묘사되는 장면마다 그는 뚫어지게 앤지를 바라보곤 했었다.

    백설 공주가 금색 머리칼이었다면 이것은 그녀의 이야기일 터였다. 아니, 그런 전제를 깔아 둘 필요도 없다. 백설 공주든 누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 속 모든 공주는 물론 천사와 같은 성스러운 존재까지, 그의 뇌리에서는 앤젤라 리즈델이란 소녀 자체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며 해가 바뀌는 동안 소녀는 어느덧 성년에 이르렀다. 앤지가 봄날의 장미처럼 한층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동안, 그녀를 향한 제 마음도 궤를 같이 했다.

    그녀의 존재처럼 늘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정만은 아니었다. 가장 더럽고 저열한 욕망, 무서울 만큼 극렬한 소유욕과 같은 광기 역시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 절대적인 마음의 일부였기에 감정의 미추를 논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추한 것까지, 제 모든 것을 담은 심장은 오롯이 그녀만을 향해 있었기에.

    합의하에 이루어진 처음은 서툴지만 아름다웠고 열정적이었으며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이었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는 조금 거칠었다. 한 번 풀린 본능의 파도는 이성을 송두리째 덮치고 흔적 없이 씻겨 내렸다.

    성년을 갓 넘긴 앤지는 눈부시게 황홀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수없이 꿈꿨던 것보다 훨씬 더 그의 몸에 잘 맞았다. 수컷과 암컷의 교미와 다를 게 뭐 있을까-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욕망과는 별개로 차디찬 이성이 제 심장을 업신여기려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행위는 그런 축소된 관념과는 달랐다. 너무도 다르고 특별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 동안에도 늘 격렬한 갈증에 시달렸다.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지독한 갈증은, 행위에 더 박차를 가하게끔 그를 도발하고 채찍질했다.

    때로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를 삼킨 몸을 역으로 통째로 집어삼키고, 안에서부터 태워 버릴 기세로 몰아붙일 때도 있었다. 창이 비옥한 토지를 끊임없이 파고들 듯 집요하고 맹렬하게 소유해 나갔다. 광란에 가까운 순간은 늘 고혹적인 흐느낌으로 시작해 절박한 혼절로 끝났다.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지독하게 사랑했다. 곁에 없을 때조차, 눈에 보이지 않고 숨결을 느낄 수 없을 때조차, 앤지는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때로는 가문의 저주가 다른 형태의 주술로 제 몸에 내려온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타인에게 심신의 권한을 오롯이 내어 주고 그의 몸뚱어리는 허수아비로 연명해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 심장의 실제적인 주인, 앤지 리즈델이란 여자 없이는 그는 허깨비에 불과했다.

    그것은 첫날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열여섯 소녀가 겨울 냄새를 물씬 풍긴 채 여름의 눈동자로 휘장 너머 그를 바라본 순간, 그때부터 카일의 미래는 궤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 미래가 어떻게 흐를지 역시도 결국은 앤지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가 휘장 너머 물었던 것에도 주저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도련님의 소원은 뭐예요?

    -소원……?

    -네. 건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소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요. 몸은 반드시 나으실 테니까요.

    -영원히 사는 거야.

    너와 영원히,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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