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29/106)
  • #29

    그 해의 마지막 날, 12월 31일의 자정이 살짝 흘러간 시간이 왔다. 열아홉의 순간을 맞은 앤지는 소리 없이 집을 나섰다.

    그녀는 도련님이 선물해 준 드레스 위에 클로크를 걸치고 그 위에 다시 두툼한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모자까지 단단히 썼지만 입술 새로 하얀 숨결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너무 설레어 추운 줄도 몰랐다.

    모든 게 처음 그대로였다. 마차는 그녀를 저택 앞에 내려 주었고 얼굴을 가린 메이드가 헤네랄리페 정원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지난번과 다른 게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지.”

    “카이 님!”

    거의 일 년만의 재회 앞에서 앤지는 말을 잃었다. 가슴이 들뜨다 못해 벅차올라 숨도 쉴 수 없었다. 앤지는 입술을 뗐지만 희미하게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도련님은 11개월 만에 예전과 다름없이, 아니, 그 전보다 더 건강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카이 님. 이젠 완전히 나으신 거예요? 앞으로는 더 아플 일이 없으신 거…… 맞나요?”

    “응. 다 나았어. 이젠 괜찮아.”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다가섰다. 잿빛 체스터필드 코트로 성장한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얼굴은 살짝 야위어 있었지만 낯빛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고 반짝이는 벽안은 밤인데도 낮처럼 오묘하게 빛났다. 유리 천창 너머 스며든 달빛이 수려한 미형을 더욱 신비롭게 비춰 주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 얼마나 기쁜지, 얼마만큼 그리워했는지에 대한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그녀가 케이프를 벗자마자 카일이 다가와 앤지를 품에 안았다. 그녀 역시 두 팔을 활짝 벌려 그의 등을 꼭 둘렀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포옹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둘만의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그립고 따스한 체취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먼저 눈을 뜨고 감정을 발화시킨 쪽은 그였다.

    “앤지. 보고 싶었어. 너무 그리웠어.”

    “저도 그랬어요. 카이 님…….”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려, 앤지. 특별히 지시해서 만든 거야. 여기 메리골드 장식이 박힌 레이스, 혹시 눈에 익지 않아?”

    “알고 있어요. 제가 만든 거죠. 공작저에서 레이스를 주문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 이 드레스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처음엔 네가 의뢰받아 만든 걸 몰랐어. 자수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건 익히 들었지만.”

    “감사드려요, 카이 님. 제가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아도 될지…….”

    앤지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그녀뿐 아니라 도련님까지 근사하게 성장을 하고 있으니 마치 둘만의 연회, 한밤중의 경건한 파티 같았다.

    “앤지. 그동안 알게 됐는지 궁금해.”

    부드러운 음색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나에 대한 마음…… 지금은 확실히 깨닫게 됐어?”

    “네. 도련님이 너무 그리웠어요. 카이 님이……”

    “카이라고 불러 줘. 너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니까.”

    “카이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어요. 너무 보고 싶고 걱정되고…… 그리웠어요.”

    앤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그의 귀에도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카일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제 몸에서 살짝 떼어 놓았다. 마주 보는 서로의 얼굴에 달빛이 흘렀다.

    “생일 축하해, 앤지.”

    “카이도 완쾌되신 것 축하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결국 이렇게 무사히 오셨으니까…….”

    “사랑해, 앤지.”

    “나도…… 나도 사랑해요, 카이.”

    앤지의 속삭임에 카일은 다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해의 첫 새벽, 첫 월광이었다.

    그날 밤, 처음이 될 것은 달뿐만이 아니었다. 카일의 처음, 그리고 성년을 맞은 앤지에게도 처음이 될 터였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을 때까지, 영원히 이어질 사랑의 첫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서장이 될 것이다.

    클로크에 이어, 고대 그리스 페플로스처럼 느슨하게 주름진 겉옷이 카펫 위에 내려앉았다. 낯설지 않은 그의 침실에 전에 없는 위화감이 숨 쉬고 있었다. 늘 벽에 걸려 실내를 밝히던 램프가 죄다 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불쾌한 위화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백 마리의 나비가 심장 속에서 날갯짓을 하는 듯한 설렘,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떨림 속에서 앤지는 카일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앤지의 마지막 속옷을 감싼 기다란 끈을 풀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처럼 그는 그녀보다 앞서 옷을 다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조각상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사락, 마지막 하얀 천마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을 때 앤지의 몸이 크게 떨렸다. 거대한 무형의 전율이 등골을 삽시간에 훑어내리는 전율이 일었다. 달빛에 투영된 카이의 머리칼이 보랏빛으로 반짝거렸다.

    앤지는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눈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 속에 달 조각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 그의 아름답고 어두운 눈, 그 한가운데 일렁이는 것은 달도 별도 아니었다. 그것은 앤지 자신의 얼굴이었다.

    “앤지.”

    카이는 그녀의 벗은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눈빛만큼이나 따스한 음성이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할게. 그러니 긴장하지 마.”

    커다란 손이 그녀의 복숭앗빛 뺨을 감쌌다. 무척이나 차가운 손이었다. 그러나 손의 냉기는 그녀의 뺨에서 발산되는 온기에 재빨리 녹아들었다. 손이 거둬지고 다른 것이 대신 가까이 다가왔다.

    앤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카이의 입술도 손만큼이나 차디찼다. 입술이 그녀의 온기 품은 입술 안에 녹아드는 속도는 좀 더 빨랐다.

    두 번째 키스는 거의 일 년 전, 처음보다 더욱 강렬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서 탐색전을 펼칠 동안, 두 손이 앤지의 머리 뒤를 조심스럽게 받쳤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을 다루는 듯한 손길과는 반대로, 입술에서 입 안으로 탐색의 영역을 넓힌 혀는 조금씩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을 탐하는 혀의 율동은 점차 대담성을 띠어 가고 있었다.

    그의 혀가 제 것을 단단히 옭아매고 빨아들이는 순간, 앤지의 속눈썹에 경련 같은 떨림이 일었다. 머릿속에 피가 몰리며 경종이 울려 댔다.

    카이의 혀가 일으키는 아찔한 쾌감과 관능의 파도에 몸이 솜사탕처럼 둥실 떠올랐다가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을 감싼 두 손이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럽지 않았다면, 정말로 이상해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썼을 것이다.

    두 번째, 더욱 큰 경종이 울렸다. 가슴 아래, 배의 맨살 위로 생경한 감각이 와 닿았다. 거듭되는 키스로 내려다볼 수도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 감촉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점점 더 가까이 접촉할수록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성교육을 받거나 모친에게서 들은 적은 없었지만 도서관에 관련 책들은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무지한 채 별관 침실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아……. 흑…….”

    그가 입술을 살짝 떼자 앤지의 입술 새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책에서 읽은 것과 실제로 겪고 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남자는 육안으로 여성의 몸을 보는 것에서부터, 여자는 스킨십을 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흥분하게 된다고 했었다. 소위 전희(前戱)라는 것이었다.

    폭풍처럼 요동치던 혀가 입 안에서 멀어지고 난 뒤로도 흥분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소강되기는커녕, 점점 더 크게 몰아칠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이 다가와 그녀의 여린 살갗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다정하고도 집요한 애무는 실크처럼 매끄럽고 고운 목선을 따라 내려와, 움푹 들어간 쇄골 아래 동그랗게 솟아오른 가슴에서 멈췄다.

    “아……! 카이…….”

    그의 손끝이 정점을 스치는 순간 앤지의 몸이 흔들렸다. 다리가 일시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더는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카일은 앤지를 단번에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한순간 몸속의 피가 거꾸로 도는 현기증에 앤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카이는 반쯤 엎드린 자세로 자리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앤지. 정말 아름다워. 너의 뼈는 산호…….”

    그의 손이 그녀의 한 손을 들어올려 마디마디 정성껏 입을 맞췄다.

    “너의 두 눈은 진주…….”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꺼풀 위를 지그시 눌렀다. 앤지는 그가 옛 시인의 노래에 빗대어 그녀를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너는 바다 속 어떤 진귀하고 기묘한 것보다도 더…….”

    그의 손이 아름답게 솟아오른 살갗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민감한 부분이 점점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더 아름다워. 바다의 요정보다 더…….”

    카일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속삭임을 멈추고 귀엽게 솟아오른 정점을 하나씩 입 안에 넣었다. 앤지의 목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엉겁결에 움켜잡은 카이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더 적극적으로 혀를 굴리고 강하게 빨아당겼다.

    그의 입술과 혀는 마지못해 선단에서 떨어졌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 맛을 음미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환희를 맛볼 시간이었다. 보다 절묘한 환희는 몸 안쪽에 감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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