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2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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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고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 공작의 집무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 정원은 분수대와 마른 나뭇가지, 열을 세워 피어난 겨울꽃 초목 위로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잠시간의 상념은 노크 소리에 의해 깨졌다.

    “들어와.”

    루이스 던스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절제된 몸짓의 던스트 부인은 차기 공작을 향해 정중히 인사해 보였다. 표정은 평소처럼 덤덤했으나 내심 눈앞의 청년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 잘 성장하셨어. 게다가 레머디의 양분에 의지하지 않고도 이만큼 완쾌하시다니. 대단한 정신력이야.

    카일렉은 크라바트를 진주 타이핀으로 단정히 고정시킨 채 너른 어깨가 도드라져 보이는 셔츠 위로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수려한 이마 한옆으로 드리워진 흑발은 물결치듯 우아한 컬을 그렸고 그 아래 얼굴은 차디찬 기품으로 넘쳤다. 광증에 시달리느라 지극히 까다롭고 병약했던 십 대 시절과 달리, 지금은 차분한 강인함도 풍기고 있었다.

    부친과 무척 닮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섬세하고 고혹적인 이목구비, 우미한 턱선과 윤곽에는 날카로운 선이 배어 있었다. 유약했던 부친에겐 없었던 기운이다. 찌를 듯한 위압감이 방 안을 장악하다 못해 책상 너머로까지 흘러왔다.

    “도련님. 폐하의 뜻에 따라 계승식이 3월 5일로 잡혔습니다. 그러니 2월 마지막 주에는 수도 헤데스타드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좀 더 일찍 가시길 원하실 경우, 해역의 윈드를 일시 중단시킨 후 배를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더 일찍 갈 필요는 없겠지. 날짜는 폐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다.”

    비록 유명무실한 허수아비 왕이지만. 그렇게 말하듯 입가에 비소가 어렸다 흩어졌다.

    “하지만 다른 건 내 주관대로 정하지. 계승식이 끝나고 2주 뒤, 또 다른 예식도 예정대로 이행하겠다. 공표는 2월 중순쯤. 그전에는 자네만 알고 있도록.”

    “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레티샤와 데르반 부부에게도 언질을 주도록 하지요.”

    레티샤는 대외적으로는 섬 내 공작저의 행정을 돌보는 해럴드 데르반의 딸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본토의 공작가 방계이자 카일룸 교단 협회 의장인 사무엘 데르반 남작의 질녀였다. 그에게도 과년한 딸이 있음에도 굳이 조카딸을 그 거사에 적극적으로 내세운 이유야 뻔했다. 그것이야말로, 도련님이 앤지 리즈델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사력을 다하는 이유이리라.

    “도련님. 그리고 지하실의 ‘그것’에 대해서는…….”

    그녀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뗐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긴장감으로 목이 막혀 왔다. ‘그것’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일렉을 둘러싼 공기가 음산하게 변했다. 천하의 루이스 던스트도 그 분위기엔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이 이 정도의 위압감이라니. 초대 공작님이 이리 훌륭히 성장한 모습에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 멀쩡한 상태로 보실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수도로 가기 전까지 완벽히 처리해. 올해 2월은 기후 이변으로 폭풍우가 잦을 거라 하니까, 운 좋게 천둥 번개가 심한 날이면 안성맞춤이겠지.”

    “하지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그것’에 대해서는 완벽한 처리가 불가합니다.”

    “그렇지. 총도 칼도 소용없고, 목을 잘라도 결국 붙어 버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태워도 죽지 않으니까.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야. 땅속 깊이 묻거나 바닷속 깊이 수장하거나.”

    카일렉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하는 것처럼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긴 ‘그것’은 그의 개념상으론 물건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사실상 물건보다 훨씬 못했다. 제 뜻대로 처리되지도 않는 애물단지, 지옥의 악마조차 거둬 가길 거부하는 괴물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전신을 결박해 오크통에 넣고 단단히 밀봉해. 그 상태로 본토 트리에스테 해역과 섬 사이, 가장 깊은 지점에 가라앉히면 되겠지.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야. 안 그런가?”

    “하지만 이제 막 구십 세를 넘겼으니…… 백 세를 넘기는지 어떤지 좀 더 두고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도련님께서 수도에 가 계신 동안 저희가 잘 지켜본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만.”

    “그럴 필요 없어. 그 상태로 백 세를 넘겨 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그 상태로 더 두느니 끝을 내는 게 옳아.”

    카일렉의 냉엄한 눈빛이 오랜 집사를 향했다. 무감한 시선이, 희끗해질 기미를 보이는 부인의 이마에 고정되었다.

    “실패한 실험체는 처리하는 게 나아. 자네들이 신경 쓰는 건 미래의 성공이 아니었던가.”

    너희가 원하는 건 내가 이터니티를 성공해 낼 것인지, 그래서 그 수혜를 너희의 육신에도 주입할 수 있을지 여부 아니냔 말이지.

    “네. 그럼…… 적당한 때를 봐서 그 방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중년 여인은 허리를 정중히 굽혔다. 카일렉은 가능한 모든 경멸을 다 담아 그 공손한 태도를 굽어보았다.

    모든 게 자업자득일 뿐. ‘그것’과 마찬가지로, 너희 모두 그 대가를 치르고 말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너희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일 뿐. 실컷 기대하고 희망에 허우적거려 보라지.

    루이스 던스트는 그 시선이 함의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도련님. 그럼 앤지 리즈델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레머디가 반드시 반려자일 필요는 없었다. 선대 공작 부부, 에드워드와 유제니아의 경우는 에드워드가 혼인 서약을 맺은 직후 이터니티에 대해 알아 버렸기에 되돌릴 수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카일렉 도련님은 이미 모든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앤지를 외부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가장 아끼는 존재를 꽁꽁 숨겨 두고 은밀히 보호하려는 마음이실 터.

    “일전에 지시한 대로다. 그 여자는 이대로 내버려 둬. 예정대로 본토에서 인력이 충원되기 전까지, 1월 말까지는 임시 메이드로 저택에 머무르게 해. 한 달 후 집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게끔.”

    루이스도 그 애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만에 하나 도련님의 육신에 이변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살려 두는 편이 낫다.

    쓰임을 다한 레머디는 어차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죽게 된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쓸모가 없게 된 레머디, 혹은 그 쓰임이 다하기 전에 역할이 중단된 레머디는 조용히 처리되는 게 원칙이었다. 에드워드 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레머디였던 나탈리아 로헨, 루시아 페론이 처리됐던 것처럼.

    만약을 대비해 대체 레머디도 찾아서 대기시켜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앤지의 것만큼 도련님에게 적합한 치료제는 없었다. 두 사람의 생체는 신기할 만큼 잘 맞았다. 3년 전부터 책 읽기 상대 겸 말동무로 감정적인 교류를 맺어 온 탓인지, 원래부터 짝이 될 운명이었는지, 혹은 둘 다인지 그것은 신만이 알 터였다. 신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신인지 그것은 누구도 모르지만.

    “도련님. 그럼 수도로 가신 후에는…… 그 아이를 더는 만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만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앤지 리즈델을 간절히 원했다. 몸과 마음, 모두가 그녀에게 진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전의 에드워드 님이 유제니아에게 깊이 빠져 버린 것처럼. 그렇기에 앤지와 확실한 선을 긋고자 하는 그 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모른 척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계승식을 치르고 몇 달 내에는 헤데스타드로 영구 귀경하셔야 합니다. 황실의 부름도 있지만, 더 이상은 수도를 방치해 둘 수 없으니까요. 그때는 그 아이도 데려가실 생각이신지요.”

    만에 하나 레머디가 다시 필요할 때는 굳이 몸체까지 함께 데려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도련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레머디로서의 앤지가 아니었다. 앤지 리즈델이라는 개체는 그에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니 시종의 하나로 동행시킬 것 같았다. 문제는 레티샤의 눈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 거기 있을 뿐.

    “제 쪽에서 미리 알아야 한다는 점은 양해해 주셔야 합니다. 저와 헬퍼들은 오직 도련님의 안녕만을 위해 움직이는 도구니까요.”

    웃기는군. 결국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날 도구로 쓰려는 주제에.

    카일렉은 고개를 조아리는 집사를 굽어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한층 더 냉랭하게 말했다.

    “당연히 데려갈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때가 되면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카일렉이 책상 위 서류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만 나가 보라는 무언의 신호다. 루이스 던스트는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돌아섰다. 방을 나가는 입가에는 모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긴 상관없지. 정부로 두시든 몰래 밀회를 나누시든.

    에드워드 님이 못다 한 과업을 이어받아 차기 공작으로서, 그리고 ‘이터니티’의 의무만 이행해 준다면 상관없었다. 사실 더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새로운 주인은 레머디 없이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만큼 강했다. 부친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독한 성정에다 잔혹한 면모도 있었다. 당신의 광증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레머디의 양분을 취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던 전 주인, 에드워드와는 확실히 다를 터였다.

    카일렉은 던스트 부인이 나간 후 설렁줄을 당겼다. 책상 옆의 벽이 아닌, 서고의 휘장에 숨겨진 다른 줄이다. 제롬이 잠시 후 다른 쪽 문을 통해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오늘 자정, 헤네랄리페 정원과 별관 쪽 보안을 강화시켜.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앤지가 올 거야.”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가 말한 ‘누구도’에는 집사나 메이드를 위시한 사용인들뿐 아니라 던스트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롬은 그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를 위해 조용히 방을 나갔다.

    다시 홀로 남겨진 카일은 서고로 다가가 진열된 책을 죽 훑었다. 예전에 앤지가 읽어 준 이야기, 그녀만의 독창적인 번안을 통해 다른 결말로 흘러갔던 서사의 원작들이 눈에 익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책등을 죽 훑다가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그는 책들 틈에서 고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괴물이 신부를 맞는 밤>, 구대륙의 설화와 기담을 다룬 책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싹한 제목이었다.

    카일은 책을 잠시 바라보다 제자리에 꽂아 넣고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검토할 서류들이 많았다. 업무에 집중하길 한참, 한 손이 무의식적으로 뻐근한 목덜미 뒤를 누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머리칼 끝을 헤치고 누르는 살갗 위로, 자그마한 푸른빛 장미가 무늬처럼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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