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27/106)
  • #27

    -사례금은 필요 없습니다. 대신 그 돈을 이 나라의 아이들에게 써 주시면 안 될까요? 빈터가르 전역의 고아원 시설의 복지와 환경을 개선하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제대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후원하는 데 보탬이 되어 주신다면…… 그럼 아이들이 저처럼 보호받지 못하다 그 섬에 끌려가는 경우도 사라질 겁니다.

    -자네, 지금 무슨…….

    -이걸 봐 주십시오. 지난 20년간 빈터가르와 트리에스테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서 실종된 남녀 아동들을 조사한 자료입니다. 평균 연령은 일고여덟 살에서 열두 살 사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걱정할 부모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매해 뚜렷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고요.

    -잠깐. 15년 전…… 로아노크 섬 아동 집단 실종 사건? 이것도 그 섬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네. 심증뿐이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허허. 그래서 그 섬에서 재배하는 마약에 중독되고, 처음부터 거기서 태어나 자란 것처럼 모든 기억을 조작당하고,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혀 살게 된다 이 말인가? 자네는 운 좋게 거기서 벗어나 원래 기억을 되찾았고?

    -맞습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신분을 위장했지요. 혹시 블랙웰가에게 들켜서 다시 거기로 끌려가거나 쥐도 새도 없이 죽임을 당할까 봐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머리색과 이름 모두 바꾼 겁니다. 경찰이 된 것도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고요.

    -자네 얘기가 다 맞다고 하세. 그럼 도대체, 블랙웰 가문이 그런 기괴한 비밀공동체를 만든 이유가 뭔가? 몰래 마약을 재배할 사유지가 필요했다면 트리에스테 영지가 더 안전할 텐데, 그렇게 외딴 섬을 골랐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게다가 노동력이 필요했다면 식민지 출신인 건장한 인력을 공수하지 않았겠나. 중노동을 한 것도 아니라면서.

    -Mr. 아미티지. 혹시 ‘흑미사(Black Mass)’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흑미사? 예전에 대륙 남부에 횡행했다던 검은 미사 말인가. 하지만 전쟁 후에는 그 명맥이 완전히 끊긴 걸로 아는데. 지금 설마하니…… 블랙웰 가문이 이단 밀교의 신봉 집단이기라도 하다는 건가?

    -그건 모를 일입니다. 현재 트리에스테는 구교와 개신교 양립국이니까요. 하지만 트리에스테 왕가는 지난달 드루이드교에서 파생된 카일룸교(cælum)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려는 사안을 검토 중입니다. 만약 그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빈터가르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카일룸교? 나도 들어 본 적은 있다만.

    -초자연적 현상과 제식이 중시되는 토속 신앙입니다.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연금술 외 여러 가지 제의가 수 세기에 걸쳐 비서(祕書)로 전승되어 왔고요. 블랙웰가는 그 비서를 통해 십 년 전쯤 금단의 제식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을 말이지요.

    -금단의 제식……? 도대체 그게 뭔가?

    -제가 아는 것은 레머디로 데려온 아이들의 육신과 피로 무언가를 꾀하려 한다는 것뿐입니다. 선대 공작 때부터, 존 블랙웰부터 에드워드, 그리고 그 아들 카일렉에 이르기까지 공작가의 후손들은 연이어 기괴한 증상에 시달려 왔으니까요. 그걸 막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해 어떤 치료를 꾸준히 실험해 왔어요.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신분을 숨기고 공권력에 소속되어 공작가의 동향을 늘 주시하고 있을 뿐이죠.

    -자세한 것은 오직 공작 일가와 그 측근만이 안다는 것이군.

    -네. 저는 레머디로 쓰임을 당하기 전에 그 배에 타게 됐으니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늘 물처럼 음용하던 장미차가 어느 순간부터 효력이 없어져 납치되기 전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 또한…… 신의 보살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오피엄 로즈의 성분이 듣지 않는 면역 체질이었던 거죠.

    마르틴의 얘기가 끝나고 나서도 빌렘은 제 귀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마르틴 실바가 중대한 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납치범의 소굴을 알아내 브린을 구출한 은인이었고, 빈터가르 시경 내에서의 평판도 매우 훌륭했다. 아무리 봐도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의원님?”

    “아, 아니네. 잠시 옛날 생각을 하느라고.”

    마르틴이 주의를 환기시키자 빌렘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5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지난 수년간 블랙웰 가문의 행적을 비밀리에 조사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혀 더 깊이 파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은 마르틴의 주장을 신빙성 있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운명처럼 딸 브린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아임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청년이었다. 기실 막을 의도조차 없었다는 게 정확하리라.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브린의 암묵적인 약혼자가 되어 있었고 자신은 그를 도와주는 예비 장인의 위치에 있었다.

    돌아보면, 마르틴이 언젠가 블랙웰 가문에게 추적당해 변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딸의 은인이 그렇게 비명횡사할 가능성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어쩌면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믿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배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걱정하는 건 자네의 안전이야. 게다가…….”

    빌렘은 브린과 짧게 눈빛을 교환하다 입을 열었다. 주름진 미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결국 자네 말대로 되었으니 말일세. 얼마 전 트리에스테 황실이 카일룸교를 정식 종교로 승인하지 않았나. 5년 전, 자네가 했던 말이 지금 현실이 된 거지.”

    “네. 그리고…… 에드워드 블랙웰 공작도 몇 달 전 세상을 떠났지요. 이변이 없는 한, 내년 3월엔 차기 공작의 계승식이 있을 듯합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 고인의 유일무이한 아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에드워드가 결국 죽었다는 건 이터니티(eternity), 그 흑미사 의식이 결국 실패했다는 의미겠지. 이제 다음 공작이 될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어떤 상태인지…… 과연 실험이 성공했는지 여부를 전혀 알 수가 없군.”

    “아이들의 생사 또한 알 수가 없죠. 지금은 성년의 나이까지 성장했을 아이들이나 가장 최근 그 섬에 끌려갔을 아이들까지…… 반드시 구해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앞으로의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섬의 존재는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야 하네. 그럼 그 이터니티 의식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실체도 확실히 밝혀지겠지.”

    마르틴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약 카일렉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면- 그랬다면, 자신도 이미 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레머디의 용도로 섬에 끌려간 아이들의 성비는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공작의 첫 아이가 아들일 경우에는 여자아이가, 딸일 경우에는 남자아이가 각각 치료제의 후보군으로 상시 대기 중에 있었던 셈이다. 그게 블랙웰 일가가 손을 댄 의식, ‘이터니티’가 정한 자연의 섭리였다.

    “수도의 블랙웰 본가가 이미 황실을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야. 세력이 더 확장되기 전에 막아야 할 텐데…… 우리로선 한계가 있네.”

    “공작가가 아무리 실세를 쥐어도 황실 자체는 결국 와해되지 않을까요. 트리에스테 곳곳에서 폭동의 기미가 보입니다. 봉건제로의 회귀를 반대하고 빈터가르처럼 입헌 군주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농민들이 나날이 목소리를 키워 가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무력으로 제압하곤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갈지 의문입니다.”

    “그렇지. 시대의 흐름을 막을 방법은 없어. 결국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될 거야.”

    세 사람은 서로 결의를 다지듯 남은 찻잔을 제각기 기울였다. 마르틴은 금발 머리 소녀의 심상을 다시금 떠올렸다.

    어떻게든 앤지가 꿈속에 다시 나타나야 할 텐데. 그래야 그의 계획을 전달해 구출할 수 있을 터였다. 반드시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다시금 솟았다. 앤지를 무사히 탈출시켜야만 그를 기점으로 섬의 다른 이들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앤지는 그 해의 마지막 주, 휴가를 맞아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공작저의 심부름꾼이 편지를 전해 준 것은 늦은 오후, 일터에 있는 부모님 대신 섣달 그믐날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편지를 받자마자 앞치마를 벗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 보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도련님이 마침내 치료를 끝내고 본관으로 돌아오신 걸까? 부디 그렇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편지를 펼치는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새하얀 지면에는 단 네 줄만이 쓰여 있었다.

    「Dear Angie.

    오늘 밤 자정 마차를 보낼게. 전에 보냈던 드레스를 입고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기다려 줘.

    사랑하는 카이가.」

    “아……. 카이 님!”

    가슴이 환희로 들썩였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부풀어 올라 호흡조차 버거웠다. 앤지는 편지를 가슴에 대고서 꼭 눌렀다. 그렇게 하면 심장이 진정되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어느새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앤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에서 리본 상자를 꺼냈다. 가장 소중한 것만을 담은 보물 상자 안에는 그동안 도련님에게서 온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오직 스노우볼 하나만이 제 존재를 마음껏 드러내며 창가에 고요히 자리할 따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