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26/106)
  • #26

    옷장을 열자 편지 보관용 상자가 있었다. 그 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린 드레스가 보였다. 도련님이 네 번째 편지와 함께 전달한 옷이었다. 처음 드레스를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고동색 리본이 달린 순백색 새틴 드레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게다가 눈에 익었다. 목 둘레의 메리골드 꽃장식 레이스는 다름 아닌 그녀가 직접 만든 직물이었다. 몇 달 전 던스트 부인이 부모님 편에 그녀에게 의뢰했기에, 정성껏 만들어 공작저에 직접 가져왔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앤지는 드레스의 소매를 쓸며 보드라운 촉감을 느껴 보다 편지로 주의를 돌렸다. 그녀는 편지를 주머니 깊숙이 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매우 따사로워서 휴식 시간 동안 저택 뒷문의 계단에 앉아 음미하고 싶었다.

    음미한다는 표현 자체가 허무할 만큼 매우 짧은 편지였다. 하지만 다시 읽고 곱씹을 때마다 심장을 전율케 했다.

    「앤지. 치료가 막바지까지 왔어. 성공인 것 같아. 앞으로 보름 후면 널 볼 수 있을 거야. 앤지. 사랑해.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어. 일 년 가까이 널 보지 못했다니 믿기지가 않아. 이제 곧 보게 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편지는 몇 번이나 되풀이 읽혔다. 행간마다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앤지는 읽고 또 읽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일 년 가까이, 정확히는 11개월 가까이 그와 만나지 못했다니 믿어지지 않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카이 님을 다시 보게 된다니……. 꿈은 아니겠지? 실감이 안 나.

    앤지는 편지를 다시 접어 치마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행복감에 마구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과거에 마르틴 실바가 꿈에서 글로 써서 보여 줬던 글씨가 뇌리를 스쳤다.

    -앤지. 깨어나야 합니다. 거기서…… 그 섬에서 벗어나야 해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아서 본 지 오래였다. 그는 사실 허상이 아니었을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지만 이렇게 오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앤지!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에 앤지는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햇살이 저택의 후문 계단 끄트머리까지 비쳐 들며 남자의 얼굴에 역광을 드리웠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얼굴 반이 가려지는 순간 앤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주 잠깐 동안 미카엘이 누군가와 무척 닮아 보였다. 죽은 에드워드 님, 그리고 도련님과 비슷했다. 머리색과 눈빛은 달라도 이목구비가 어딘가 그들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 갔나 했는데 여기서 쉬고 있었던 거야? 안 추워?”

    “어……. 으응. 잠깐 바람 좀 쐬느라.”

    앤지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이마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때 미카엘의 손에서 뭔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다람쥐를 볼 때마다 주려고 늘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밤들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밤을 줍자 앤지도 그를 돕고자 계단에서 일어나 땅바닥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무심코 그의 목덜미에 시선을 준 순간 희미한 문양을 보았다.

    모래색 머리카락 끝자락과 맨살 사이로 푸르스름한 장미꽃잎이 보였다. 잘못 본 걸까. 앤지가 눈을 끔뻑이기도 전에 미카엘은 읏차, 다시 몸을 일으켰다.

    “혹시 최근에 다람쥐랑 고양이들 본 적 있어? 이상해. 통 보이질 않아.”

    “응? 음……. 그러고 보니 요즘 본 적이 없어. 새들은 겨울을 나려고 멀리 떠난 것 같지만.”

    “어떻게 된 거지? 토끼도 못 본 지 꽤 된 것 같아. 겨울잠을 자는 동물도 아닌데.”

    미카엘은 저택 영지의 동물들을 무척 아끼고 귀여워했다. 앤지도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라 가끔 그에게서 자잘한 먹을거리를 받아, 보일 때마다 먹이를 주는 데 동참하곤 했었다.

    “그러게 말이야.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나중에 정원사 아저씨에게 여쭤봐야겠어. 늘 보이던 녀석들도 안 보이니 걱정되네.”

    앤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잠깐 망설였다. 조금 전 그의 목덜미에서 본 문양에 대해 물어봐도 될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침 그들을 발견한 시종장 야스민 부인이 도움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더 잡담을 나눌 새도 없이 일꾼들이 모여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 * *

    시타델 시내는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더 활기에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남겨 둔 광장에는 커다란 구세군 자선냄비가 걸렸고, 거리 곳곳마다 성탄 장식이 드물지 않게 보였다. 참혹했던 대륙전의 잔상은 이제 빈터가르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즐겁게 들떠 있지는 않았다. 마르틴 실바는 모처럼 이른 퇴근에도 무거운 표정이었다. 날씨는 그의 마음처럼 우중충하니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두터운 사복 코트 위에 우비를 뒤집어쓰고 공원을 가로질러 뛰었다.

    그의 아담한 아파트는 루벤 공원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마르틴은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뚫고 달려가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층과 2층 사이 계단의 창 너머로, 길 건너의 집들을 슬쩍 내다보았다. 공원의 이름을 따서, 루벤빌가(街)라고 불리는 부촌이다.

    가지런히 열을 지은 저택들이 나뭇가지와 빗줄기 사이로 보였다. 탁한 하늘 아래서도 새하얀 벽돌이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때 저택 중 한 곳의 2층 창문이 활짝 열렸다. 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실내복 차림의 여자가 그를 향해 한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건너와도 된다는 신호다.

    마르틴은 우비 아래 검은 코트를 벗어 반대로 입었다. 양면 코트는 순식간에 추레하고 우중충한 회색이 되었다. 그는 우비는 집에 던져 놓고 새로 꺼내온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그러고는 건물 쪽문으로 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를 보고 있진 않은지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브린 메이어 아미티지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목발에 지탱한 채 마르틴을 맞았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외관과는 달리, 저택 안은 식민지풍의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으로 가득했다.

    “마르틴.”

    “브린, 잘 지냈어?”

    둘은 서로의 뺨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 인사를 나누었다. 커튼이 단단히 둘러쳐진 거실에는 누군가 그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있었다.

    이 저택의 진짜 주인이자 아미티지 스틸 철강 회사의 설립자 겸 상원 의원인 빌렘 반 아미티지가 파이프 담배를 태우며 살롱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는 빈터가르의 시민 계급 중 가장 성공한 기업가이자, 브린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딸의 약혼자와의 밀회를 위해 대외적인 출장길 중 저택에 잠깐 와 있었다.

    “의원님.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왔나. 앉게.”

    40대 중반의 신사는 파이프를 들어 보이며 인사에 화답했다. 무뚝뚝하면서도 정감 어린 태도가 둘 사이의 친근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을 짧게 나누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2월 말까지 상선 한 척을 준비해 달라고.”

    “네. 위장용으로 적당한 범선이면 됩니다. 오래전 일이긴 해도 당시 기억으론 거리도 멀지 않았어요. 최대 일주일은 거뜬히 버틸 만큼 튼튼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정도 배를 준비하는 건 일도 아니네. 하지만 정말 괜찮겠나. 그러다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미티지가 브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내년 2월은 마르틴이 그 섬에서 탈출한 지 꼭 8년째 되는 달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달의 주기에 의해 섬을 방벽처럼 견고히 둘러싼 해무가 걷히며 항로가 뚫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염려 마세요. 이번엔 섬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고 해변 주위를 둘러보는 데 의의가 있으니까요. 섬 내부에 들어가지 않는 한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섬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여자애는 어떻게 찾으려고.”

    브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름다운 갈색 눈에는 여전히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앤지라는 아이 말이야.”

    “그건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해.”

    지금까지처럼 꿈을 통해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2월의 마지막 주, 시간을 정해 해변에 나와 있으라고 하면. 하지만 요즘은 꿈에 일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카일렉 블랙웰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 수 있었다. 그녀의 안전에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마르틴. 그 꿈 부분은 여전히 믿기 어렵네만…… 믿어야겠지. 자네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이야기엔 근거가 있으니.”

    아미티지가 턱수염을 쓸며 미간을 좁혔다. 5년 전, 빈터가르 시경의 신입 순경에 불과했던 마르틴이 열다섯 살 브린을 위험에서 구해 내 그녀가 컬리넌 섬의 제물로 납치될 뻔했다느니, 단순한 유괴 사건이 아닌 엄청난 배후가 그 뒤에 있다느니 주장할 때만 해도 웬 미친놈인가 했었다.

    -이보게. 우리 딸은 휴양지에서 길을 잃어 헤맨 것이고 하필 그때 조무래기 범죄자들의 눈에 띄어 붙잡혀 있었던 거네. 블랙웰 공작가라면 트리에스테 왕가의 방계에다 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 아닌가. 원한 관계도 없고, 내가 아무리 빈터가르에서 제일 부유하다지만 그 일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하네. 보아하니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힌 것 같은데 그 얘기는 그만해 주게나. 내 딸을 구해 준 은인이니 사례금은 원하는 대로 주겠네.

    -제가 그런 식으로 납치를 당해 그 섬에 끌려갔었습니다! 물론 저는 진짜 전쟁 고아였고 고아원을 도망쳐 길거리 생활을 하던 중 그런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런 식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은 대륙 전체에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그게 그들의 수법이지요. 행방불명돼도 찾을 사람이 없는 고아들 위주로 섬에 데려가 제물로 삼는 겁니다.

    당시 마르틴 실바의 눈빛은 너무도 진지했다. 도저히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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