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5/106)
  • #25

    리즈델 부부는 드문드문 횃불이 걸려 있는 지하 복도를 걸었다. 예배당의 지하는 공작저와 연결되어 있었다.

    루이스 던스트가 저택의 지하 서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는데도 상대방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던스트 부인의 시선이 찻잔 위 차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꽃잎으로 향했다.

    “다시 음용하고 있으니 문제없겠죠. 끊었던 이유는 단순히 다른 차로 바꿔서인 게 맞나요?”

    “네. 아무것도 모르고 밭에서 나는 허브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장미 향이 질렸을 수 있겠죠. 워낙 예민하고 닫혀 있던 옛 기억까지 되돌아오고 있었으니까.”

    로라의 입에서는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딸을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마음에서였다. 파리한 안색, 앙상해져 가는 몸과 윤기 없는 머리칼은 모두 금단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일부러 음용을 중단한 것은 확실했다. 던스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젠 괜찮을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긴 하지만…… 정말로 괜찮을까요. 기억 상태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해도 그 꿈은 대체 뭘까요. 그 애는 꿈속의 남자가 마르틴 실바라고 했어요.”

    로라 리의 말에, 던스트 부인의 한 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마르틴 실바……?”

    의아함이 눈빛, 음색, 찻잔을 내려놓는 손끝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다.

    “섬에서 탈출했다고 했대요. 그 애 꿈속에서. 혹시 이스케이피(escapee, 탈주자) 중 하나가 아닐까요?”

    “지금까지 탈주자는 끝까지 추격되어 처리됐어요. 물론 바다에서 행방이 묘연한 사람도 있지만, 생존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던스트 부인은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로라 쪽으로 밀었다. 로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백색 가루가 든 병을 받아들었다.

    “제 기억으론 그런 이름의 레머디도 없었어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죠. 앞으로는 장미 외 이 수면제도 섞으세요. 당분간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게 될 테니까.”

    “부인. 우리 딸 말입니다만,”

    패트릭 리즈델은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주름진 눈매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앤지는 확실히 무사하게 된 거겠지요? 카이 도련님이 치료기에 들어가기 전 그 애를 레머디와 공작 부인 후보 둘 다로부터 제외시키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련님이 그렇게 하기를 강력히 주장하셔서요.”

    “맞아요.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지만…… 결국 도련님이 마음을 바꾸셨지요.”

    “그럼 그 애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받게 되는 거죠? 그 아이의 혈액이 유독 도련님에게 잘 맞긴 하지만, 그 정도 잘 맞는 아이들은 바깥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네. 그렇긴 하지요. 두 분…… 그간 앤지에게 정이 많이 드셨나 봐요.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것 같군요.”

    “솔직히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워낙 사랑스러운 아이라…….”

    리즈델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부모처럼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해 버렸지만 이미 정이 들어 버린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 로라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잠깐씩 깨어나실 때마다 앤지에게 항상 편지를 보내시던데…… 무슨 내용인지 혹시 부인은 모르시나요?”

    “저도 모릅니다. 알다시피 블랙웰 가문의 서신에는 봉인이 찍혀 버리니 미리 뜯어 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단순한 안부 편지일 겁니다. 비록 레머디나 신붓감에는 배제됐어도…… 미련은 남아 있으신 게지요. 그 정도 안부 편지를 보낼 만큼은.”

    던스트 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깍지 낀 두 손을 무릎께로 내렸다.

    “이로써, 앤지는 지금처럼 이 섬에서 평화롭게 살면 되는 겁니다. 원래 레머디의 역할이 끝난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두 분도 잘 아시겠지만…… 다행히 앤지가 건강하기도 하고요. 도련님께서 레머디의 피 없이도 워낙 잘 버티셔서 앤지가 활용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렇겠지만.”

    패트릭과 로라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 떨렸다.

    “도련님은 앤지만은 안전히 내버려 두라 명하셨습니다. 루시아와 나탈리아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알다시피 그분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이제 에드워드 님도 계시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부인. 앤지의 정신력은 매우 강하고 약물 면역성이 강해요. 장미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그 애는 가끔 묘한 말을 했어요. 제 과거의 기억들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돌아오고 있는 느낌이었단 말이지요. 만약…… 이 약이 듣지 않아 마르틴이라는 사람이 계속 꿈속에 나타나면, 그리고 장미차랑 상관없이 조금씩 옛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여의치 않을 시에는…….”

    던스트 부인의 입가가 조금 더 굳어졌다.

    “두 분의 동의하에 2단계로 망각제를 주입하면 됩니다.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드물긴 해도 지금까지 2단계를 거친 몇 명은 오히려 더 행복해졌으니까. 죽을 때까지 이 섬에서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부인의 단언에 부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2단계는 망각제에 의한 리셋(reset) 과정을 의미했다. 불운하게도 옛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 경우, 그리고 약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간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추억들을 심는 리셋 작업이 시행되어야 했다.

    그것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섬의 규칙이었다. 무형의 법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무사히 살아 있는 편이 낫지요. 도련님은 앤지가 계속 살아 있길 바라시니까요. 도련님께서도 두 분처럼 그 아이에게 정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

    던스트 부인은 옅게 미소 지었다. 부부는 다소 안심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식어 버린 차를 마저 들이켰다.

    리즈델 부부에겐 비밀이지만, 앤지는 도련님의 상태에 따라 레머디로는 계속 활용될 수도 있었다. 비록 공작 부인은 되지 않겠지만 앤지의 혈액은 도련님의 체질에 너무 잘 맞았다. 만약 앤지보다 더 나은 레머디가 나타나 도련님의 반려가 된다면, 그때는 앤지도 더는 제 몸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으리라.

    원칙대로 다른 레머디처럼 쓰임을 다한 뒤 처리되든가, 리셋 과정을 거친 후 새로운 앤지로서의 평온한 삶을 살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전자가 될 경우, 망각제를 음용하는 쪽은 리즈델 부부가 될 터였다. 처음부터 딸이 없었던 것처럼 앤지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는 편이 나을 테니. 엘리엇이 죽은 뒤 그의 부모 역할을 맡았었던 호킨스 부부가 지금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아차.”

    던스트 부인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잔을 내려놓고 펜을 집어 들었다. 트리에스테 본토에 있는 공작가의 방계, 사무엘 데르반 남작에게 전갈을 보내야 했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카일렉 도련님께서 더디게나마 확실히 회복되고 계십니다. 따라서 경의 질녀 레티샤 데르반과의 혼인은 예정대로 추진될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도련님을 대리하여 하달합니다.」

    중년 여인은 서신을 하얀 봉투에 넣고 입구를 황동 인장으로 꾹 눌렀다. 봉투는 블랙웰 공작가를 상징하는 하얀 독수리 문양으로 단단히 밀봉되었다. 천장의 설렁줄을 당기자 오래지 않아 고 에드워드 블랙웰의 충복, 제롬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 * *

    초록이 진 자리에 그 해의 첫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서리 위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명체의 것인지 피는 신선하고 미지근했다.

    목이 잘린 새와 다람쥐의 참혹한 시체가 공작저의 숲, 움푹 파인 구덩이 한가운데 산을 이루고 있었다. 양분이 될 시신 더미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섬뜩한 한기가 서려 있다. 쾌락이 어느 정점을 넘어서서 도착(倒錯) 상태에 이른 것 같았다. 그린 듯 고아한 입술 사이로 나직한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작년에 만든 무덤, 시체에서 큰 새싹들이 관을 뚫고 피어나기 시작하노라-”

    마더구스의 한 구절처럼 무시무시한 가사가 듣기 좋은 저음에 실려 바람결에 흩어졌다.

    “올해는 붉은 꽃이 만발하겠구나-”

    이렇게 많은 피가 양분으로 대지에 스며들었으니.

    아름다운 두 눈이 반으로 접히며 비소를 머금었다. 살생 때마다 극에 치닫는 환희를 억누르기 힘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피를 흘리는 단도를 흘깃 내려다보곤 짐승들의 시신 위로 무심히 던졌다.

    매장은 그 희열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자의 무덤은 또 한 번 소리 없이 만들어졌다가 흙 속에 묻혔다.

    숲은 무섭도록 고적했다. 살아남은 새들도 날갯짓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모두가 눈만 활짝 연 채 침묵만을 지킬 따름이었다.

    * * *

    겨울, 12월의 막바지가 다가올 때까지 앤지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다. 자연히 마르틴 실바를 보는 일도 없어졌다. 조금씩 머리를 쳐들고 의식을 혼란스럽게 하던 옛 기억도 빠르게 퇴색되어 갔다.

    앤지는 하루에 몇 번은 깊은 번민에 빠져 있었다.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점차 잊어 가고 있다는 위태로움, 지금까지처럼 평안한 일상에 젖어 아무 고민 없이 지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매일 갈등을 겪곤 했다.

    앤지는 지난주 네 번째로 도착한 편지를 다시 꺼내 보려고 메이드룸 옷장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애타는 심정을 유일하게 달래 줬던 낙이었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기 직전에 번번이 날아오는 이 편지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훨씬 더 커다란 갈등 속에 스스로를 파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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