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24/106)
  • #24

    다행히 다음 날은 안색이 평소처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머리카락도 빠져 있지 않았다. 앤지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갈 짐을 꾸렸다. 어느새 다시 주말이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 앤지는 어머니와 단둘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버지 패트릭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밤늦게나 귀가할 예정이었다. 앤지는 화덕에 구운 닭다리와 감자를 썰면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전에 아버지, 어머니 둘 다 있을 때 루시아나 나탈리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들이라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다시 꺼낼 생각이 없었다.

    “엄마. 저 요즘 이상한 일이 있어요.”

    “이상한 일? 무슨?”

    “가끔 이상한 꿈을 꾸는데…….”

    어쩌면, 마르틴 실바에 대해서만은 엄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르틴이란 그 남자야말로 나탈리아나 루시아의 기억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열쇠일 거란 생각이 나날이 확고해지고 있었다.

    “무슨 꿈인데?”

    모친 로라는 딸의 감자 위에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어 주며 미간을 좁혔다.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는 아니었다.

    “엄마. 혹시…… 마르틴 실바란 사람을 아세요? 이 섬에 살던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요.”

    “마르틴 실바? 글쎄…… 처음 들어 보는데?”

    “비슷한 이름의 사람도 없었어요? 남자예요. 나이는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사이?”

    “그런 사람 전혀 몰라. 도대체 그 남자가 누군데?”

    “꿈에 가끔 나타나. 나타나서…….”

    모두가 상용하는 장미차를 절대 마시지 말라고, 그래야 이 섬에 오기 전의 자신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거라 주장했어요.

    앤지는 잠시 틈을 두었다. 그렇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나타나서?”

    모친의 나이프를 든 손이 멈췄다. 로라가 미간을 좁히며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 섬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어요. 엄마, 나…… 정말 이 섬에서 태어나 자란 것 맞죠?”

    딸깍, 나이프가 접시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모친은 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앤지. 전에도 웬 여자애들 얘기를 하더니…… 그건 또 대체 무슨 꿈이야? 너 요즘 정말 이상해. 엄마 걱정되게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니?”

    “엄마.”

    “안 되겠다. 너 내일 아침에 엄마랑 존슨 선생님에게 가 보자! 애가 몸이 허한 건지,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요즘 아주 이상하다니까. 게다가 너, 요즘 안색도 안 좋고 생기 하나 없이 앙상해졌어.”

    “아니에요, 엄마. 병원에 갈 일은 아니고…….”

    앤지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이거 하나만…… 알고 싶어요, 엄마.”

    앤지는 모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이것도 차를 끊은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역시 엄마 말대로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왜 요즘 엄마와 아빠를 보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왜 자꾸…… 낯선 느낌이 드는 걸까.

    “엄마. 나…… 엄마 딸 맞죠? 엄마랑 아빠 딸…… 맞는 거죠.”

    “뭐?”

    “전 대륙에 역병이 퍼지고 전쟁이 일어나 나라들이 전멸해 버리고…… 엄마랑 아빠는 다른 생존자들과 이 섬에 와서 정착하게 되고, 그리고 내가 여기서 태어난 게 맞는 거죠?”

    “앤지.”

    “그리고…… 우린 언제까지나 여기서 행복하게 살 거죠? 지금처럼.”

    “당연하지! 앤지, 도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니?”

    “그런데 엄마…… 혹시 이젠 섬 바깥도 안전한 게 아닐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이제는 병의 전염도 멈춰서 안전해졌고 다른 생존자들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아니야. 너 작년에 엘리엇, 기억 안 나니? 윈디 밖으로 나갔다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어떻게 비참한 꼴이 되어 왔는지 알잖니. 괴상어가 있다는 건 여전히 섬 바깥이 흉흉하단 증거가 아니겠어?”

    “그건 알아요. 알지만…….”

    “제발 엉뚱한 생각 좀 그만하렴. 안 되겠어,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현실과 공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당분간 책은 읽지 말고 옷 만드는 거에만 집중하는 게 좋겠다. 응?”

    로라는 전례 없이 매서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앤지는 대꾸 없이 고개만 떨궜다. 이렇게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날 밤, 로라는 딸의 방문을 살짝 열었다. 한 손에는 작은 약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딸의 책상 위에 놓인 물병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약병을 기울였다. 병 속의 투명하던 물은 순식간에 장밋빛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서서히 다시 무색으로 변해 갔다.

    로라는 빈 약병을 앞치마 주머니 속에 넣고 딸의 침대로 조용히 다가섰다. 앤지는 희미한 숨소리만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로라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살며시 손을 뻗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길에는 거짓 한 점 없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제 자식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어머니의 눈빛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앤지.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렴.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로라는 딸의 턱 바로 아래까지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주었다.

    “우린 이 섬에서 행복할 거란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얼굴에 기묘한 빛이 언뜻 어렸다.

    “운명에 순응하는 게 곧 행복이란다.”

    그녀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오랜 기간 몸에 동화되어 있던 오피엄 로즈의 성분이 일시 멈췄을 때 신체적 변화가 생기는 것은 사실 좋은 징조였다. 그것은 장미차에 중독되어 있던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자생하기 위한, 일종의 과도기로 접어드는 과정이었다.

    딸아이는 한동안 장미차를 마시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일부러 피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다른 대체 방안이 필요했다. 로라와 패트릭은 지금 앤지가 누리는 평화와 행복을 끝까지 지켜 주고 싶었다. 부모로서 지극히 순수한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 *

    신들의 정원- 사람들은 가을 막바지 추수가 끝나고 황금빛으로 물든 논과 밭을 그렇게 불렀다. 바이러스의 창궐과 전쟁의 아비규환을 피해 이 섬에 정착한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흉작이 있었던 해가 없었다. 늘 기대보다 더 풍요롭고 보다 큰 수확만이 있어 왔다. 신의 축복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우리는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신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들이죠.

    작고한 공작가(家)의 선대,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늘 강조했었다.

    -정체불명의 병균체와 유전자 변형으로 바닷속 생명체가 죄다 괴어들로 변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바깥의 생존자들도 먹이를 구할 수 없어서 조금씩 자멸해 가고 있어요. 우리가 안전한 이 섬 안에서 우리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자급자족하는 동안 세상은 언젠가 평화로워질 겁니다. 그때 우리 후손들은 다시 각자의 땅에 돌아가 새롭게 삶을 개척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처음에 반신반의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순응하게 되었다. 블랙웰가의 지휘 아래 주민들은 아무 부족함 없이 살게 되었다.

    농업, 임업, 어업부터 과수원과 양재, 양봉, 별장 관리까지 주민 전체가 블랙웰가에 종속되어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된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노동은 노동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적당했고, 블랙웰 공작가는 매우 너그럽고 자애로운 고용주였다.

    앤지는 9월 끝 무렵,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언덕 위에 서서 황금빛의 밀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손이 머리 양쪽을 잡고 살며시 훑어내렸다. 머리칼은 한두 가닥 외에는 더 빠지지 않았다. 눈 아래에 끼어 있던 까만 기미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몸의 이상 현상이 사라졌어. 그리고 조금씩 재생되던 정체불명의 기억도 멈췄어.

    어떻게 된 걸까. 마르틴이 말한 대로 장미차는 그 후로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몸은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온 반면, 기껏 기억해 낸 루이사와 나탈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 역시 그랬다.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

    봄날 초승달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이 더욱 아름다워라.

    이다음이…… 뭐였지? 분명히 노래 끝까지 다 기억이 났었는데.

    앤지의 공허한 시선이 언덕 아래, 예배당 쪽으로 향하는 그림자를 쫓았다. 엄마 로라 리즈델이었다. 예배당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안내하는 이는 아버지 패트릭이다. 두 부부는 이내 앤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예배당의 첨탑 끝이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앤지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늘 그렇듯, 컬리넌 섬은 질서정연하고 풍요로운 하나의 작은 낙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