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23/106)
  • #23

    앤지는 재빨리 젖은 뺨을 훔쳤다. 그리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야 주방으로 나가 보았다. 로라는 고소한 풍미가 흘러나오는 냄비 속을 분주히 휘젓고 있었다. 딸의 기척을 느꼈는지 모친은 곧장 돌아보았다.

    “도련님이 뭐라고 쓰셨니? 아직도 치료 중이래?”

    “네. 아직 더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저에겐 잘 지내냐고…….”

    앤지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친은 아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버지 역시.

    아직은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고, 카이 님과의 사이에 미래가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이 혹 낌새를 채지 않을지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모친은 다행히, 도련님의 안부 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네가 그래도 도련님 옆을 잘 지켜 주고 적적하지 않게 해 드렸으니 생각이 났나 보다. 빨리 완쾌되셔야 할 텐데. 어서 자리에 앉아서 아침 준비하렴. 네가 좋아하는 로스트 펌킨 수프인데 하마터면 태울 뻔했지 뭐야! 깜빠뉴도 어제 아버지가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무화과를 듬뿍 넣어 구워 놓으셨단다.”

    “와,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푹 쉴 거지? 오랜만에 작업실에 있을 거니?”

    “네, 마무리 못한 게 몇 개 있거든요. 오늘 다 끝내고 내일 예배당에 바로 가져갈 거예요.”

    아침 식사 후 로라 리즈델은 남편이 먼저 가 있는 별장 일터로 떠났다. 혼자 남겨진 앤지는 주머니 속에 있던 카일의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동시에 작업실의 편물과 남성용 손수건에 대해 떠올리기도 했다.

    카이 님에게 하나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어느 정도 회복해서 본관으로 돌아오시면 쾌유 축하 선물로 드리는 거야.

    마을 여자들은 그녀가 취미 겸 부업으로 만드는 레이스 손수건과 식탁보, 장갑을 무척 좋아했다. 투박한 천으로도 귀족의 것처럼 품위 있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이유였다. 공작가의 품격에는 한참 뒤떨어지겠지만 도련님은 기쁘게 받아 주시지 않을까.

    앤지는 찻잔 속 차가 다 식어 버린 뒤로도 한참 동안 주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 속, 제라늄의 연적색 꽃잎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젠가 서로 읽었던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카일이 휘장 너머로 한 송이 건넸던 꽃이다. 그녀는 제라늄 꽃말을 조용히 소리내어 발음해 보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카이 님은 그녀가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사랑했던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가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지.

    사랑의 감정이란 역시 가끔은, 책에서 읽었던 대로일까. 상대방의 음색을 듣기 전부터, 얼굴을 보기 전부터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심장을 움직이고 영혼 속에 스며드는 그런 것. 공기 중에 흩날리는 이 여름의 숨결과도 같이. 육안으로 잡히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진행되는 것처럼.

    * * *

    6월에 이르니 해가 조금씩 더 길어졌다. 태양 빛이 좀 더 따갑다고 느낄 무렵, 어느새 섬은 여름의 문턱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카이의 첫 편지를 받은 지 다시 한 달이 지나 있었다. 그 후로 두 번의 서신이 더 있었다. 똑같은 필체, 처음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내용에는 변화가 없지만 새로운 편지를 받을 때마다 앤지의 심장은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다. 처음 편지보다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 세 번째 편지가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카이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희망, 설렘과 애잔한 그리움, 그 모든 감정은 늘 함께였다.

    금요일 늦은 오후, 주말을 맞아 공작저에서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부모님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앤지는 테이블에 앉아 기퓌르 소맷단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잠시 바느질에 열중하느라 식어 버린 차를 한참 후에야 돌아보았다. 늦게나마 목을 축이려 찻잔을 집어 들려 할 때였다. 불현듯 마르틴 실바의 말이 떠올랐다.

    -앤지. 그 섬에서 핀 꽃, 특히 마약 성분이 있는 장미차를 입에 대지 말아요. 그럼 조금씩 기억이 날 겁니다. 기억해 내야 해요! 컬리넌 섬에 오기 전의 진짜 당신을! 당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앤지는 제 앞에 놓인 차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찻잔 위로는 더 이상 김이 모락모락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주방 개수대로 가져가 찻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렸다.

    섬사람들은 담수화 과정을 거친 바닷물을 섬에서 자라는 벵골장미, 로사 키넨시스 및 여러 풀과 함께 끓여 식수로 마셨다. 벵골장미에는 강력한 해독 작용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몰랐다. 하지만 섬 전체가 장미를 가루로 만들어 식수로 끓일 수 있게끔, 블랙웰 가문이 나서서 대량 제조를 맡아 하고 있었다.

    마르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기억이란 부분에서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느질 모임의 소녀들 중 분명, 누군가가 더 있었는데 망각하고 있었던 기시감이 최근 들었던 까닭이다.

    마르틴 실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예전에 섬에서 살았다가 죽은 유령일까? 만약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그녀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바다 위에 부표처럼 떠 있는 윈드의 기둥 끝부분이 보였다. 마르틴이란 남자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가 있는 곳은 저 부표 너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섬 바깥, 외부 세상은 안전하다는 의미일까? 그리고 난 여기서 태어나 쭉 자랐는데 컬리넌 섬에 오기 전의 나를 기억하라니. 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혹시…… 반대로 날 해치려는 건 아닐까. 미친 사람이거나.

    앤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스스로 묻자마자 스스로 답이 나왔다. 마르틴의 눈빛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 맑고 깨끗한 눈동자였다.

    그녀는 바닥 저장고의 문을 열고 아직 끓이지 않은 물을 꺼냈다. 담수화와 냉각 작업을 거친 물에는 소금기가 없었다. 그녀는 하루 동안 혼자 마실 분량을 냄비에 옮겨 담고 장미꽃 가루 없이 끓였다.

    앤지는 침실에 둔 도련님의 편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몇 번을 더 읽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편지 내용을 다 외울 수 있을 만큼 되풀이 읽은 다음에야, 편지지를 옷장 서랍 안 깊숙이에 넣었다.

    장미차를 입에 대지 않은 지도 석 달이 지나 있었다. 공작저에서 일할 때도 일부러 차를 마시는 척, 입에만 댔다가 개수대에 얼른 버리곤 물을 따로 마셨다. 그래서인지, 앤지는 이전에 없었던 누군가의 존재를 조금씩 기억해 내고 있었다.

    붉은 머리가 도드라지게 아름다웠던 아이, 소녀의 이름은 루시 페론이었다. 루시는 분명 앤지 자신뿐만 아니라 엠마와 마리사, 레티샤 모두와도 종종 어울려 다녔다.

    그런데 왜 아무도 그 애를 모르지? 어째서? 심지어 부모님도 그런 애가 있었다니 금시초문이다, 네가 뭔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냐고 어리둥절해 하셨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또 다른 소녀가 기억 속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름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탈리아…… 로헨.”

    그녀도 루시처럼 큰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소녀였다. 루시와 나탈리아 둘 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 틈에 있다가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왜 모두들 까맣게 잊고 있고…… 이제 와서 나만 생각이 나는 걸까.”

    앤지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갑자기 몰려오는 한기에 소름이 돌았다. 정말 장미차 때문인 걸까? 꿈속의 마르틴이 말한 대로, 정말로 장미차를 끊었기 때문에 잊었던 기억이 조금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지 의혹이 일었다.

    장미차를 끊은 이후로 그녀에게 생긴 또 다른 변화는 기억의 재생뿐이 아니었다. 앤지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쭉 훑어내렸다. 머리카락이 가을바람 아래 낙엽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눈 아래도 전에 없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영양 결핍 상태에 놓인 환자처럼 보였다.

    왜 이러지? 잠도 식사도 평소와 똑같은데. 어디 몸이 안 좋은 걸까?

    하지만 몸이 안 좋다기에는 가끔씩 밤에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날이 밝으면 던스트 부인에게 의논하거나 마을의 의사에게 가 보리라,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늘 평소처럼 안색이 맑고 환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앤지는 조그만 거울 너머, 초췌한 제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 꿈을 꿨던 기간에는 이랬던 것 같았다. 누군가 주위를 둘러싸고 팔에 주사를 놓는, 그 기괴하고 흐릿한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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