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22/106)
  • #22

    두 사람은 고인의 서재로 나란히 들어섰다. 앤지가 서고 정리하는 법을 설명하고 방 안 곳곳에 자리한 사이드 수납장까지 일러 줬을 때였다. 실수로 책상 위 꽃병을 손으로 치는 바람에 앞치마가 흠뻑 젖어 버렸다. 미카엘은 재빨리 타월을 가져와 앤지에게 내밀었다.

    “미안해, 날 도와주는 바람에…….”

    “아니야. 내가 실수한걸. 다 닦아 냈으니까 괜찮아.”

    “잠깐만 쉬자. 이번 주까지만 정리하면 되니까 급한 것도 아니거든.”

    미카엘은 서재 구석의 안락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쫙 켰다. 그가 깍지 낀 손의 관절을 풀면서 앤지를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온화하고 따뜻한 눈빛이었다. 보름 만에 저택 일에 적응됐는지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앤지. 너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나 힘도 세고 입도 아주 무겁거든.”

    그가 우스꽝스럽게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 보였다. 앤지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서 웃었다. 역시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한 사람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아까 베티 아주머니가 감자를 꺼내시고 훈제 저장고에 들어가시는 걸 보긴 했는데 말야. 감자수프와 소시지겠지?”

    “닭요리도 있을 것 같아. 짐 아저씨가 닭 잡으시는 소리를 아까 들었거든. 에드워드 님이 살아 계실 때는 우리에게도 인색하지 않으셔서 늘 풍성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고 우리만 있으니까 아무래도 간단히 먹게 되는 것 같아.”

    도련님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카이 님은 조금이라도 제대로 드시고 있을까?

    “저…… 앤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미카엘이 운을 뗐다. 그녀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카일렉 도련님은 어떤 분이야? 난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어서 궁금해. 물론 생전의 에드워드 님도 뵌 적이 없지만…….”

    앤지는 수 초간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표현할 말은 너무도 많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묘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은…… 좋은 분이야. 굉장히 박학다식하셔서 모르는 게 없으셔. 요양하시는 동안에도 저택의 책을 매일 부지런히 읽으시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거든.”

    “와, 1층부터 4층까지 서재만 네 갠데 매일 읽으셨으면. 어쩌면 다 읽어 가시거나 이미 그러셨는지도 모르겠다.”

    “…….”

    “빨리 나으셔서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어.”

    앤지가 응, 모깃소리처럼 들릴락 말락 대꾸하자 미카엘이 그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앤지, 괜찮아……? 안색이 창백한데.”

    “어? 아니. 괜찮아.”

    “내가 괜한 걸 물었나 보다.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게, 너는 이만…….”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일 때였다. 그가 앤지의 팔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거 뭐야? 주사 맞은 자국이네. 꽤 엷어지긴 했지만…… 혹시 얼마 전에 아팠어?”

    “응?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앤지가 꽃병 물에 젖어서 겹겹이 접어 올린 소매 위, 팔꿈치 안쪽 살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혈관 위에 희미한 구멍이 나 있었다. 벌레에게 물린 자국 같았다.

    “이게 뭐지……? 어디 물린 기억은 없는데.”

    “아무리 봐도 주삿바늘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요양할 동안 주사를 차 마시듯 맞아 봐서 잘 알거든.”

    “…….”

    “아니면 여름벌레에 물린 것일지도 몰라. 방에 물약은 있어? 없으면 내가 던스트 부인에게 물어보거나 헤스터 이모 방을 찾아볼게.”

    “아냐. 이따 집에 갈 거니까 괜찮아. 주말 동안 집에 다녀올 예정이거든. 부모님 뵌 지도 며칠 돼서.”

    “앗, 그래? 그럼 내일은 못 만나겠구나.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재커리 아저씨 따라다니는 동안 마차 모는 법 배웠는데.”

    “그것도 괜찮아. 던스트 부인이 금요 예배 가시는 길에 데려다주시기로 했어.”

    “아, 그래……. 할 수 없지.”

    미카엘은 정말로 아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앤지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소년처럼 머쓱하게 웃다가 잘 다녀오라고 어른스럽게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그날 밤 블랙웰 하이츠, 공작저 별관은 고요한 아비규환 속에 있었다. 야수의 것보다 더 광포한 포효가 땅을 울릴 듯 지하 가득 퍼져 나갔다. 제롬은 던스트 부인과 헤스터를 향해 다급하게 독촉해 댔다.

    “레머디의 혈액이 다 떨어졌습니다. 당장 필요해요, 지금 바로!”

    “비축분이 이렇게 빨리 떨어지다니!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건가요? 가만, 이럴 게 아니라…… 헤스터.”

    던스트 부인이 옆에 선 깡마른 여자를 돌아보았다. 신호를 받은 여자는 다급하게 치료실을 나섰다. 위층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 다른 문을 넘는 순간까지 짐승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비처(秘處)의 충복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에드워드 님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혈육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블랙웰 공작가의 명맥은 반드시 이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모두,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리라. 블랙웰의 후손 없이는 이 땅의 모두가 영원히 죽은 자로 남겨지게 될 터였다.

    이상한 밤이었다. 몇 번이나 가위에 눌렸다가 반쯤 의식이 드는가 싶더니,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기를 하염없이 반복했다.

    앤지는 지금 기괴한 꿈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침대의 머리맡이며 발치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제 미카엘이 그런 말을 해서일까, 팔 어딘가에 따끔한 통증도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제 팔뚝에 고무 튜브를 칭칭 감고는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 느낌도 들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뜰 수가 없었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차디찬 손들이 어깨며 머리, 발목을 꼭 누르고 있어서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실험대 위에 올려진 새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 아빠! 저 좀 도와주세요. 이 사람들 누구야? 무서워……. 카이 님! 카이 님, 저 좀…….

    “……님!”

    하아, 앤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잠옷도 축축했다. 그녀는 창 너머, 이른 햇살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비쳐드는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아침이었다.

    역시 기분 나쁜 꿈이었어. 기다리던 사람은 꿈에 나오지 않고 이상한…….

    갑자기 마르틴 실바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꿈에 나타나지 않은 지도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역시 상상 속의 인물일 뿐일까?

    몸을 일으켜 시트를 정리하고 책상을 돌아본 순간 깜짝 놀랐다. 도련님이 생일 선물로 줬던 스노우볼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앤지는 눈두덩을 비비며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 여긴 집이잖아. 그건 저택 침실에 가져다 놓고는…….”

    임시 메이드로 일할 동안에는 공작저에 있는 날이 더 많을 것이기에 첫날부터 여러 옷가지, 소지품과 함께 가져다 두었다. 하도 오랜만에 집에 와서 잊어버린 모양이다.

    세수를 막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을 때 노크 소리가 똑똑 울렸다.

    “앤지, 일어났니?”

    “네, 엄마.”

    로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 너머에서 아버지가 먼저 나간다고 경쾌하게 외쳤다. 모친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딸의 안색을 찬찬히 살폈다.

    “웬일로 늦잠을 다 잤구나. 공작저 일이 많이 고단했던 건 아니니?”

    “아뇨, 힘든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편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인걸요. 밤에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가 봐요.”

    “꿈? 무슨 뒤숭숭한 악몽이라도 꾼 거니?”

    로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모친의 걱정스런 얼굴에 앤지는 아니라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의미도 없을 꿈보다는 엄마의 손에 들린 봉투에 더 신경이 쏠렸다.

    “그보다 그건 뭐예요, 엄마? 편지?”

    “맞아. 도련님에게서 편지가 왔단다.”

    “네에? 카이 님이요?”

    앤지는 머리를 묶던 손을 멈추고 서신을 받아들었다. 아이보리색 편지봉투 위에는 블랙웰 가(家)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 도련님이 보내셨대. 어서 뜯어 봐.”

    “이제 많이 나으신 거래요? 그럼 별관에서 본관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새벽에 저택에 우유를 배달하는 잭슨 씨가 던스트 부인의 부탁을 받고 전해 주는 거라고만 했단다.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지신 게 아닐까?”

    앤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단단히 밀봉된 봉투 한가운데를 잡아 뜯었다.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모친은 불 위에 냄비를 올려 둔 걸 기억해 내고 황망히 주방으로 달려 나갔다. 앤지는 편지를 황급히 펼쳐 들었다.

    「Dear My Angie.

    사랑하는 앤지. 잘 지냈니? 새벽에 잠깐 의식이 돌아왔고 컨디션도 꽤 좋아서 편지로나마 안부를 전하고 싶었어.

    안타깝게도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야. 왼손이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현기증이 나서 잠깐 서 있기도 힘들기도 하고. 석 달 만에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기분이야. 주치의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했어. 여기서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예상보다 치료가 더 진척될 모양이야.」

    한 줄 한 줄 빠르게 읽어 나감에 따라 앤지의 맥박은 빨라졌다. 필체는 좀 비뚤어지긴 했어도 카이의 것이 맞았다. 과거, 생일 선물과 동봉한 카드에 적힌 글씨 그대로였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기다려 줘, 앤지. 치료 중에도 나는 항상 너만을 생각해. 의식이 없을 동안에도 분명히 그럴 거야. 반드시 치료를 잘 마치고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 주길 바라. 약 기운이 강해지면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답장은 아직 보내지 말아 줘. 내가 혹시 눈이 흐릿해 직접 읽을 수 없으면 제롬이 읽어 줘야 할 텐데 그건 싫거든. 네 편지는 반드시 내가 먼저 뜯어 보고 혼자서 읽고 싶어.」

    그다음, 마지막 인사에서 앤지는 더 참지 못하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따스한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랑해, 앤지. 건강히 잘 지내기를. 그리고 내가 많이 나아져서 3층 침실로 다시 돌아갔을 때,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너이기를 간절히 바라. 매 순간 신에게 빌고 있어.

    신의 가호와 축복이 너와 함께하길.

    너만을 생각하는 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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