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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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지는 리즈델 부부를 뒤따라 공작저의 사용인 전용 홀로 들어섰다. 공작가에 직접적으로 고용되어 저택을 드나드는 일꾼과 그 가족들만 간단히 식사하고 차를 드는 자리였다. 어쨌거나 그녀도 도련님을 위해 책을 읽어 주는 말동무 상대로 고용된 상태였기에 동석할 수 있었다.

    전쟁 전에는 꽤 성대한 장례식 접대 문화가 있었다고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기껏 구축된 유럽의 평화가 깨어지고 두 번에 걸친 세계 대륙전이 끝났을 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부모님은 그녀가 책에서만 접한, 유럽 구대륙과 신대륙의 무수한 나라들은 사라졌다고 일러 주셨다. 각국의 많은 전통이 퇴색되고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사실 역시.

    치킨 캐서롤과 오븐에서 막 구워져 나온 비스킷 브레드, 스니커 두들에다 어른들이 마시는 버터 럼주까지 앤지는 잠시 식사에만 집중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실은 허기가 져 있었던 모양인지 접시를 깨끗이 비워 냈다.

    티타임까지 마치고 던스트 부인이 따로 불렀을 때 앤지는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아까 예배당과 묘지에서 봤던 남자가 사용인용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벽난로 앞에 등 돌리고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인사하렴. 이쪽은 앤지 리즈델. 카일 도련님의 말동무를 해 왔고 내일부터 당분간 임시 메이드로 일해 줄 예정이다. 그리고 이쪽은 미카엘 랜들.”

    던스트 부인의 소개말에 앤지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부시종장 헤스터의 조카란다.”

    앤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헤스터 아주머니의 조카라면? 그럼 오래전 병으로 죽은 메이드 에디스 랜들의 아들이구나.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최남단 마을에서 쭉 요양하며 살고 있다던. 아, 알비노 병이었던가? 그래서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헤스터 대신 오늘부터 저택에서 일하게 됐단다. 알다시피 헤스터는 지금 도련님이 치료 중인 별관에 상주하고 있으니까. 너보다 두 살 많은 스무 살이고 이 저택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게 많을 거야. 당분간 네가 이것저것 잘 일러 주고 도와주길 바란다.”

    “아아…… 네. 알겠어요.”

    “안녕? 잘 부탁해. 미카엘이야.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외모만큼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에 이어, 손이 불쑥 다가왔다. 앤지는 반사적으로 그 악수에 응했다. 커다란 손바닥에 온기가 흘렀다. 부드럽게 살짝만 잡았는데도 힘이 느껴졌다.

    정말로 알비노였는지 다른 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병에서 완쾌되어 무척 건강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어딜 봐도 병색이 없었다. 갑자기 가슴 깊이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오랫동안 두문불출할 정도로 긴 요양을 했는데도 이렇게 완치된 걸 보면, 도련님도 분명 희망이 있어. 반드시 좋아지실 거야.

    “반가워, 앤지라고 해.”

    그 사실이 무척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의 보랏빛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열렬한 환영이라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의 뇌리에는 카이의 회복된 모습만이 가득해 다른 것은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럼 괜찮다면 1층부터 안내해 줄래? 너무 넓고 미로처럼 복잡해서 구조를 대강 파악해야 당장 내일부터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아. 아까도 여기 오는 데만 한참 헤맸거든.”

    “아……. 그럼 부모님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올게. 기다려 줘.”

    “응. 기다릴게!”

    미카엘의 보랏빛 눈이 곱게 접혔다. 하늘이 눈 속에서 부서지는 것처럼 맑은 미소였다. 대천사를 본 땄을 이름 그대로, 햇살처럼 밝은 에너지로 충만한 얼굴에는 한 점 그늘도 없었다. 그 사실이 앤지의 가슴을 다시 벅차게 만들었다.

    카이 님도 반드시 저렇게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변모하실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

    정말로 바랄 것이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공표할 생각이라고 했지만 그때는 감정에 휩쓸려 나온 말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청혼한 것도 아니다. 청혼이라니,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앤지는 던스트 부인을 뒤따라 홀의 복도를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가슴이 찌릿, 통증이 일었다. 공작 부인이란 단어만으로도 어느새 설렘이 물러나며 묵직한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워 오고 있었다.

    카이 님의 아내…… 블랙웰 공작 부인.

    미래의 어느 날, 카이의 옆에 선 미지의 여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실감에 발아래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감히 바랄 수도 없지만, 도련님 옆에 그녀 외의 다른 여자가 있는 현실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련님이 우리 관계를 공표하겠다는 건……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어머니 유제니아 님도 귀족이 아니었다고 강조하신 건 역시 결혼에의 가능성도 내비친 거였을까.

    앤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제넘게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고자 애썼다. 하지만 제멋대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까지 억누를 순 없었다.

    * * *

    장례가 끝난 후 보름이 흘렀다. 가주를 잃은 저택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온을 가장한 적막함, 어딘가 위태로운 공기 속에는 차기 가주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늘 떠다니고 있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의 현재 상태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가끔 부모님의 볼일로 공작저까지 따라온 친구들도 늘 앤지에게 그의 생사를 묻곤 했다.

    “카일 도련님은 아직 별관에 계시는 거야? 어떡해.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늦은 오후, 오랜만에 만난 엠마와 마리사가 그녀의 메이드 침실에 앉아 이런저런 근황을 나눌 때였다. 처음은 늘 도련님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응. 의사가 새롭게 연구했다는 신약을 복용 중이신데 아직은 차도가 없으신 것 같아…….”

    전에 모친이 말했던 달의 주기라든가, 최악의 경우 그 주기에 맞춰 위험을 무릅쓰고 섬 밖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는 약속대로 일절 하지 않았다.

    무겁고 음울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마리사가 의자에서 일어나 아담한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와. 메이드 방에는 처음 와 봤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엄청 깨끗해. 래커칠도 새로 하고 창문도 너무 예쁘다. 볕이 잘 들어와서 반지하 같지 않은데?”

    “응. 위치도 수목원 앞이라서 나무랑 꽃이 잘 보여. 호수도 조금 보이는데 밤에는 수면이 달빛에 반사돼서 무척 예뻐.”

    “아, 맞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하인 있잖아. 헤스터 아주머니의 조카라던가? 엄청 잘생겼던데 어때? 눈이 보라색이라 깜짝 놀랐지 뭐야!”

    “맞아, 맞아! 미카엘 랜들 말야. 외모는 이름처럼 천사 같던데 성격도 그래?”

    엠마의 물음에 마리사도 귀를 쫑긋 세우곤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둘 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얼굴이, 아무래도 이 또한 방문의 목적에 포함된 듯했다.

    “응, 성품도 좋아. 친절하고 다정하고…… 일도 잘하고 늘 밝고 긍정적이라 다들 좋아하셔. 던스트 부인도 처음에는 유독 더 까다롭게 대하시면서 오래 지켜보시는 편인데 미카엘은 금세 신뢰하게 되신 것 같아.”

    “앤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메이드가 더 필요하진 않니? 임시라도 말이야.”

    “응? 그…… 글쎄.”

    “던스트 부인에게 한 번 여쭤봐 주면 안 돼? 혹시 필요하다면 나를 추천……”

    “앗, 나도! 엠마보단 내가 여러모로 더 나을 거야. 팔 힘도 세고 손바느질이나 세탁도 내가 더 잘해!”

    “마리사! 무슨 소리야. 넌 저번에 메이드 일만은 안 할 거라 장담하기도 했잖아.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땐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랬지! 근데 앤지를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서.”

    “잊었니? 앤지는 원래 도련님의 말동무 상대로 온 거니까 던스트 부인이 허드렛일은 시키지 않는 거잖아.”

    “얘들아, 이제 그만. 진정하고 어서 차부터 마셔. 10분 뒤면 돌아가야 하잖아. 쿠키 더 가져다줄까?”

    앤지가 한숨을 내쉬며 빈 접시를 들며 일어났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아웅다웅하던 소녀들이 문 쪽을 홱 돌아보았다. 앤지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친구들의 입을 막았다.

    “쉿! 던스트 부인이 시끄럽다고 주의를 주시려는 것일지도 몰라.”

    다행히 조용해진 가운데 앤지가 네에, 뒤늦은 대답과 동시에 문고리를 당겼을 때였다. 미카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고 명랑한 얼굴, 반짝이는 보랏빛 눈이 생기에 넘쳐 있었다. 엠마와 마리사가 탄식을 흘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전해졌다.

    “저런, 손님들이 있었구나! 미안해서 어쩌지? 던스트 부인이 에드워드 님의 서재 정리를 맡기셨는데 내가 서고 배치를 잘 몰라서…….”

    “아아……. 도와줄게. 잠깐만.”

    친구들을 이만 보낼 작정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흠칫 놀랐다. 두 여자가 어느새 등 뒤로 바짝 다가와 미카엘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생글생글 짓는 웃음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미카엘, 저기 이쪽은…….”

    앤지는 체념하고 그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행히 미카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싹싹한 태도로 소녀들을 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재로 가는 길에 현관까지 배웅도 해 주었다. 아이들이 집에 가는 내내, 그에 대해 얼마나 수다를 떨어 댈지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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