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20/106)
  • #20

    “네, 할게요. 당연히 해야죠!”

    “시중도 따로 남자 하인들이 있으니 별건 없고, 예전처럼 적당히 말동무가 되어 드리면 될 거야. 일단은 치료를 끝내고 본관으로 오셔야 할 텐데 그게 언제가 될는지……. 이제 공작님이 돌아가셨으니 하루빨리 완쾌해 올해 안엔 계승 절차를 밟으셔야 할 텐데 말이다.”

    로라는 병마에 시달리는 공자가 딱한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기뻐하던 것도 잠시, 앤지의 낯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충격에 병세가 더 악화되진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죠? 꼭 나아서 제대로 계승식을 하실 수 있겠지요?”

    모친은 딸의 장례식용 의복과 솔을 집어 들며 대꾸했다.

    “그래야지. 도련님이 이제 유일한 블랙웰가 자손인데 만에 하나 잘못되시면…… 그럼 우린 어쩌니. 이 섬은 어떡하고.”

    “…….”

    “정 나아지지 않으면 좀 무리해서라도, 던스트 부인과 제롬이 도련님을 섬 밖으로 보내지 않을까.”

    “네? 하지만…… 우린 밖으로 나갈 수 없잖아요. 섬은 상어 떼에 둘러싸여 있고, 트리에스테 본토까지 간다고 해도 전쟁으로 인한 독가스의 잔해가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다는데. 그럼 도착하자마자 죽을지도 몰라요. 버틴다 해도 병이 더 나빠질 게 뻔하잖아요.”

    “네 말이 맞아, 앤지. 하지만 말이다.”

    로라는 갑자기 경계심 어린 눈빛이 되더니 살그머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곤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댔다.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돼. 엄마랑 아빠, 너, 이렇게 우리 셋만 알아야 돼. 약속하지?”

    앤지는 겁먹은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 년에 두세 번씩 안개가 걷히고 상어들도 다른 데로 이동하는 주기가 있대. 그 밤은 달의 주기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해 붉게 변하는데 그때는 배를 띄워 항해가 가능하다고 들었단다.”

    “저, 정말요? 그럴 수가……!”

    언젠가 마을 도서관의 오래된 책자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지상의 생명체는 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어떤 동물들은 생체 주기와 활동에도 강한 영향을 받는다 했던가.

    “에드워드 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셔서 8년 전, 치료약을 찾아 딱 한 번 본토로 항해를 하신 적이 있어. 비밀리에 제롬과 몇몇 시종, 노련한 선원들과 길을 떠나셨는데…… 결국은 풍랑에 시종들을 잃고 일주일 만에 돌아오셨단다. 그 뒤로도 몇 번 시도하셨다가 잘 안 되신 모양이야.”

    “저런……!”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일절 함구하고 계셨던 거야. 자칫 잘못하면 너도나도 시도를 해 볼 수 있고, 달의 주기도 확실히 모른 채 엘리엇이 당했던 것처럼 사고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엘리엇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앤지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작님은 결국 수확 없이 돌아오신 거구나. 그래서 결국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아빠도 뱃일에 능하셔서 원래는 그 일행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단다. 그렇지만 하필 전날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같이 가지 않으신 거야. 넌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도 안 날 거야.”

    “응…….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안도감의 탄식이 절로 나왔다. 모친도 같은 생각인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신이 보살펴 주신 거지. 죽은 사람들에겐 정말 죄스럽지만 아빠가 다리를 다치지 않으셨다면 파도에 같이 휩쓸리셨을 테니.”

    “그럼, 그 달의 주기란 건 언제 또 발생하나요?”

    “나야 모르지. 공작저의 오랜 시종들만이 아는 방법이 있지 않겠니? 혹시라도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렴, 앤지. 방금 엄마와 한 얘기는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고. 알았지?”

    “네. 알겠어요.”

    “도련님은 꼭 좋아지실 거야. 위험한 바깥 세계에 나가실 필요 없이 말이다.”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는 아침 먹을 준비를 하라 이른 뒤 방을 나갔다. 잠시 혼자가 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에드워드 님의 죽음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이웃들이 인사를 해 오며 비보를 나누게 되면서부터 현실로 체감이 될 터였다.

    도련님은 장례식에 잠깐이라도 오실 수 있을까.

    부디 그 정도는 가능할 만큼 회복되셨기만을 바랐다. 마을 사람들 태반은 아직 그의 장성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올해 안에 공작위 계승식을 할 때는 모두에게 얼굴을 보여야 하리라.

    아. 혹시……!

    불현듯 마르틴 실바가 떠올랐다. 조금 전 어머니가 들려준 8년 전 사건, 그리고 매해 두 번씩 달의 주기가 변화해 항로가 뚫리는 사실도 되새김했다.

    “혹시…… 마르틴 실바도 그 풍랑에 휘말린 한 사람일까?”

    충분히 가능할 법했다. 그는 분명 8년 전 이 섬을 탈출했다고 했으니까. 당시 어딘가 불시착해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충분히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른 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섬을 빠져나와야 한다니…… 어째서? 그 사고로 어쩔 수 없이 타지에 정착한 게 아니었나?

    여전히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만약 마르틴 실바가 정말로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그럼 섬 바깥 어딘가에 안전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 *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미숙한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었다.

    망각될 눈(雪)으로 대지를 뒤덮고

    메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유지시켜 주었으니.

    ―T.S. Eliot 「Wasteland(황무지)」,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 공작의 장례식 당일은 새벽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탁한 안개마저 끼어 있어서 날은 한층 더 우중충하고 황량했다. 그날 섬 주민 대부분은 일손을 놓고 예배당을 찾았다. 조문객이 너무도 많아 추도 방문은 스무 살 이상 성년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앤지는 아버지, 어머니가 엠바밍(embalming, 방부 처리) 상태의 관에 다가가는 뒷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열려 있는 예배당의 문 너머, 빗줄기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누군가 검은 우산을 쓰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검은 애스콧 타이와 재킷, 바지와 구두까지 단정하게 갖춰 입은 남자였다.

    앤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짧은 순간 그 남자를 도련님으로 착각해 깜짝 놀란 까닭이다. 카이 님은 오늘 나오지 않으실 거라 했는데. 도련님처럼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건장한 체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시감 비슷한, 기묘한 느낌이 선득했다.

    스무 살 초반으로 느껴지는 사내의 얼굴은 눈가까지 드리운 모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앤지는 제 옆을 지나치는 사람의 기척에 앞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조문을 마친 사람들은 목사를 선두로 하여 블랙웰 힐 쪽을 향해 걸었다. 공작저 부지의 블랙웰가 묘지에 에드워드 선공작을 안장하기 위해서였다. 고요한 우산의 행렬이 침묵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힐의 가족묘에 당도했을 때, 어른들을 뒤따라 걷고 있던 앤지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게 아까 봤던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어느 쪽 해변가 마을에서 왔을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남자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엔 모자를 벗은 채였다. 하지만 기침이 살짝 났는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서 코 위까지만 보였다.

    앤지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비로 인해 햇살은 거의 비치지 않았는데도 한순간 눈이 부셨다. 아마꽃 색이 드문드문 섞인 밝은 금발 아래, 보랏빛을 띤 눈동자가 앤지의 것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처음 보는 보라색 눈이었다. 짙은 이질감을 자아내는 그 색깔이 모래 색깔 머리카락이나 수려한 이목구비보다 더욱 인상 깊었다. 뇌리에 각인이 새겨진 것 같았다. 카일과는 또 다른 느낌의 미색인 동시에 그와는 첨예한 대조를 이루는 듯도 했다.

    카이 님이 흑(黑)이라면 저 남자는 백(白)의 느낌이랄까.

    기침이 멎었는지 사내가 입가에서 손수건을 물렸다. 체격에 비해 앳된 얼굴은 십 대 중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다. 앤지는 한 번 더 놀랐다. 고운 선을 그린 입술까지, 전체가 다 드러난 얼굴은 확실히 도련님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닮은 듯, 닮지 않았는데도…….

    아니야. 확실히 닮았어. 혹시 공작가의 먼 친척인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먼 촌수의 방계라도, 혈족이라면 공작저에 살지 않을 리 없으니까.

    “앤지.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똑바로 서야지.”

    그때 친구 마리사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응, 대꾸하며 다시 옆을 돌아봤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헛것을 본 것은 아니겠지, 눈을 의심한 순간 안장이 시작되었다.

    애도와 사의 찬미, 영생의 기원을 담은 테 데움(Te Deum)의 선율이 빗방울 틈을 뚫고 좌중에 울려 퍼졌다. 앤지는 정체 모를 남자에 대한 생각은 젖혀 둔 채 두 눈을 감고 기도에 참여했다.

    신이시여, 부디 에드워드 님께 안식과 평안을 주소서. 그리고 그 끝에 거룩하고 신성한 재생과 부활이 있게끔 축복하소서.

    카이 님.

    홀로 남겨져 병마와 싸우는 도련님을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앤지는 울지 않기 위해 애쓰며 점점 뜨거워져 가는 눈시울을 위로 치켜들었다. 무수한 바늘처럼 창공을 그어 대는 빗줄기가 뿌연 각막 위로 비쳤다. 하늘마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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