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106)
  • #19

    친구들을 바라보던 뇌리에 뭔가가 빠르게 스쳤다. 묘한 기시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우리 중에 한 명 더 있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그게?”

    “몇 달 전에…… 분명히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자수 모임. 붉은 머리에 키 큰…… 여자애가 있지 않았어?”

    “어? 모르겠는데……?”

    소녀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레티샤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엠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앤지, 네 상상 속 인물 아니야?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현실과 혼동한 거 아니냐고.”

    엠마의 핀잔에 레티샤가 피식 웃었다. 흘깃 바라보는 비웃음은 앤지의 눈에도 보였다. 하지만 앤지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여자애였어. 상상이 아니라 실제였어.”

    “하지만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는걸, 앤지. 그리고 우리끼리 모이는 자수 시간은 오늘부터 시작한 거잖아. 지난주까진 예배당에서 아주머니들에게 주로 배웠고.”

    “그래, 앤지. 우리 마을에 붉은 머리 여자애는 없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구. 레티샤, 넌 어때? 본 적 있어?”

    “앤지는 원래 그러잖아.”

    레티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술 맞은 빈정거림이 얼굴과 목소리에 덕지덕지 묻어 났다.

    “원래 앤지는 책이랑 현실을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잖아. 몇 달 전에도 혼자 이상한 메아리를 들었다고 주장하고.”

    “자, 아가씨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미켈 아저씨의 부름이 그녀들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마리사,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이제 저녁이 다 되어 가니 너희도 어서 가야지.”

    소녀들은 제각기 편물 바구니를 들고 인사를 나눈 뒤 뿔뿔이 흩어졌다. 예배당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관목 너머, 서서히 다가오는 노을빛이 지평선 위로 번져 가고 있었다.

    앤지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보랏빛, 붉은 벨벳처럼 퍼지는 창공이 낯선 듯 낯설지 않은 한 얼굴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곱슬머리에 훌쩍 큰 키, 회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던 여자아이는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무슨 수로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인가. 허구의 얼굴은 이만큼이나 선명한 이목구비와 윤곽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여자애는 진짜야.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저 붉은 석양빛 하늘 아래, 바로 이 섬에 있었다. 그리고 앤지 자신을 포함한 마을 소녀들 사이에 존재했다. 그들 곁에서 걷고 웃으며 함께 떠들었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심지어 나도, 그 여자애를 기억하지 못하지? 어째서?

    * * *

    유제니아.

    에드워드는 꺼져 가는 가쁜 숨 속에서 죽은 처의 환영을 보았다. 유제니아는 엠파이어 드레스 차림으로 한 손에 회중 전등을 들고 서 있었다. 탐스럽고 찬란한 아마빛 머리카락을 촘촘하게 땋아 정수리 위로 몇 바퀴 돌린 머리는 참으로 작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유제니아…… 유제니.

    이름이 불리자 그림처럼 아름답던 여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쨍그랑, 전등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일어났다. 어디선가 마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 쓸 틈도 없이 아내가 작렬하는 불길에 활활 타며 미친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유제니! 안 돼! 내가 구해 줄게, 내가 지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리 허우적대고 몸을 일으키려 해도 소용없었다. 시야를 활활 태웠던 불길이 잦아들며 시간이 다시금 거꾸로 돌았다.

    다음 순간, 그는 순식간에 죽은 형 헨리 데이빗 블랙웰의 다락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생전의 헨리가 기거하던 침실 벽, 그 너머 비밀스러운 통로로 이어진 밀실이었다.

    에드워드는 거기서 유제니아를 목격했다. 여긴 어떻게 찾아냈는지, 앳된 얼굴의 아내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발치엔 존 피츠로이의 다이어리가 펼쳐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어리석은 부친이 거기 무엇을 적어 뒀는지, 그리고 유제니아가 그걸 읽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이게…… 이게 뭐예요? 다 허구죠? 소설이죠? 네?

    절규와 오열이 이어졌다. 유제니아는 쌍둥이 로이드와 카일렉이 우렁차게 첫울음을 떼고 일 년이 지난 후 죽었다. 후일, 카일렉은 어머니가 그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때로는 제가 괴물이 되어 어머니의 배를 찢고 나오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광증은 나날이 심해졌다. 유제니아가 죽은 슬픔과 괴로움에 휩싸여, 강보에 싸인 카일렉을 바닥에 집어 던지려 발악하기도 했다. 벽에 던져 그대로 숨이 끊어지길 염원하던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보모의 팔에서 아기를 낚아채 활활 타는 벽난로로 던져 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본격적인 정신 착란과 발작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결국 아이를 죽이지는 못했다. 자라날수록 유제니아의 것 그대로인 이목구비, 예쁜 웃음 때문에 카일렉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는 피의 대가를 치르고 참혹히 죽었지만,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 무사히 살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에드워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괴물처럼 뒤틀리고 망가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나날이 커져 가는 그 부성애만은 다행히 정상이었다.

    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고개를 살짝 돌렸다. 주치의가 저만치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카일을 부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제 아이를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두 눈에서 비애와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 아버지를 결국 제지하지 못했다. 신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도록, 인간이 아름답고 영준한 존재임은 결국 유한한 시간 속에 찬란히 빛났다가 스러지기 때문이라 설득했어야 했는데.

    이복형 헨리가 희생양이 되어 그 밀실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를 거기서 빼냈어야 했다. 아버지가 끝까지 설득되지 않았다면 헨리와 유제니아, 쌍둥이 모두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어. 더 늦어 버리기 전에 이 섬에서 벗어났더라면.

    감기는 두 눈에 유제니아의 모습이 다시 어른거렸다. 그녀는 눈부신 햇살 아래 초원 위에 서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신이 그에게 베푸는 마지막 한 자락, 최후의 자비와 다름 없었다.

    * * *

    그날 밤, 앤지는 장미차를 입에도 댄 적 없이 잠에 빠졌다. 마르틴 실바는 그녀의 꿈에서 다시 한번 등장했다. 그는 도화지로 보이는 커다란 종이를 들고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종이 위에는 뭔가 쓰여 있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울창한 거목들이 양옆에 빽빽이 서 있었고 시야는 안개로 흐릿했다.

    앤지는 마르틴 쪽으로,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종이 위의 글을 보기 위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취할 것 같은 꽃향기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잠에서 깰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프리지아 꽃의 냄새가 투명한 동공을 통해 몸속 깊이 파고들어올 것 같았다.

    -앤지. 그 섬에서 핀 꽃, 특히 장미차는 마시지 말아요. 환각 성분이 있는 오피엄 로즈니까 그걸 끊어야 돼요! 그럼 조금씩 기억이 날 겁니다.

    마르틴의 손에서 종이가 빠르게 교차되었다.

    -기억해 내야 해요! 그 섬에 오기 전의 진짜 당신을! 당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거기까지 글자를 판독한 직후 앤지의 의식이 활짝 떠졌다. 그녀는 짧은 신음을 토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침대가 출렁, 크게 움직였다.

    이미 동이 텄는지 방 안은 희끗희끗 회색 한가운데 있었다. 앤지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잠옷이 땀에 흠뻑 젖어 불쾌하게 끈적이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소리지? 섬에 오기 전의 나? 섬에서 핀 꽃을 입에 대지 않으면…… 조금씩 기억이 날 거라고?

    “앤지- 앤지, 일어났니?”

    모친의 목소리는 평소 그녀를 깨우던 때와 달랐다. 무언가에 격앙된 듯 다급하게 들렸다. 벌컥,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로라가 방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낯빛이 창백했다.

    “앤지.”

    “방금 일어났어요, 엄마. 무슨 일…… 있어요?”

    “검은색 공단 드레스를 꺼내 놔야겠다. 모자랑 리본, 구두도. 이틀 뒤 장례식이 있을 테니 그 전에 깨끗이 손질해 둬야 해.”

    모친은 청색 원피스 위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딸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간밤에 에드워드 님이 돌아가셨다는구나.”

    “네? 고, 공작님께서요?”

    앤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카이 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최근 예후가 너무 좋지 않아 예상은 했다만…… 정말 애석한 일이야.”

    “그럼 카이 님은, 카이 도련님은요? 저택 별관에서 치료받고 계시잖아요!”

    “도련님에게 제일 먼저 비보가 전해졌겠지……. 장례식에 오실지는 모르겠구나.”

    로라는 한숨을 폭 내쉬고 딸의 옷장으로 다가가 새틴 원피스와 숏재킷을 꺼냈다.

    “금요일에 장례식이 끝나면 공작저로 가서 야스민 시종장을 도와줄 수 있겠니? 일손이 부족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네가 손이 빠르고 야무지니까 와서 도와주길 바라는 눈치시더라.”

    “네. 괜찮아요……. 그건 상관없지만…….”

    모친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카이의 얼굴만 어른거렸다. 얼마나 슬프고 비통할까. 에드워드 님이 단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무척이나 귀애하셨다는데…….

    “그리고 말이다, 월요일부터 임시 메이드로 당분간 있어 달라 요청하실 수도 있어. 일이 많을 땐 거기서 숙식할 수 있게 방도 따로 주어질 테니 언제든 집이랑 자유롭게 오가면 될 거란다. 네가 워낙 손재주가 좋으니 잡일은 아니고, 기퓌르 뜨는 거랑 도련님 시중을 들게끔 지시하실 것 같던데…….”

    “네? 도련님 시중요?”

    로라의 마지막 말에, 충격과 염려로 잠시 멍하니 있던 앤지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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