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8/106)
  • #18

    그날 밤 마르틴은 석 달 만에 여자와 조우했다. 한동안 사건들로 정신없이 바빴던 탓인지, 지난 석 달간은 꿈속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마자, 바깥의 수탉이 요란하게 깨울 때까지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어제부로 급한 수사가 끝났다. 며칠간의 휴가를 맞아 모처럼 늦잠 자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일까. 앤지는 그의 무의식 저편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안개 같은 꿈속에서 그녀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흐릿해서 주변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 방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요! 아가씨! 아니…… 앤지!

    한참을 부른 뒤에야 여자는 눈을 떴다. 두 쌍의 초록빛 눈동자가 안개 속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앤지라는 이름의 여자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당신이군요. 왜 다시 나타났죠? 놀랍게도, 물음은 버찌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마르틴 실바……?

    그녀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제대로 의사 전달을 하고 있었다. 꿈속에서의 교류는 조금씩 최종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도미노 게임처럼, 더디지만 확실히 발전되어 가고 있었다.

    -맞아요. 앤지.

    마르틴의 어조는 새삼 감격에 젖어 있었다. 이상해. 왜 이 여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이렇게 떨리고 압도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꿈을 통한 두 사람의 교류는 우연이 아니었다.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운명이라니.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 브린만을 향한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마치 잃었던 여동생을 찾은 듯한 묘한 전율이 일었다.

    그들의 의식 속 만남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마르틴은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설령 8년에 걸쳐 가까스로 얻은 평안이 그녀로 인해 흔들린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앤지. 나 역시 컬리넌 섬에 살았습니다. 8년 전 당신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탈출했어요.

    -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여자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녀 역시 꿈속의 가상 현실이라 각성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두 눈에는 그를 향한 경계심이 짙게 서려 있었다.

    -앤지. 말해 주세요. 블랙웰 공작가(家)의 후예…… 카일렉 로던 블랙웰이 지금 의식 불명 상태인가요? 당신과 서로 만날 수 없는 상태인 거죠?

    마르틴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은 강력한 무형의 힘에 의해 꿈속에서 밀려났던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를 위협하는 기운은 안개 속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것은 앤지를 지배하고자 하는 기운의 부재를 의미했다.

    -도련님을…… 카이 님을 아세요?

    앤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연달아 물었다.

    -잠깐. 당신도 이 섬에 살았다고 했죠? 8년 전 여기서……

    앤지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두 귀는 똑똑히 들었다. 8년 전 이 섬에서 그녀처럼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다 탈출했다고 마르틴이란 남자는 말했다. 그런데 왜 탈출했다는 표현을 쓰는 거지? 여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데.

    -그런데 어떻게 섬 밖으로 나간 거죠? 섬 밖의 세상은 끔찍하고 위험한데……

    -앤지. 깨어나야 합니다. 거기서…… 그 섬에서 벗어나야 해요!

    마르틴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를 밀어내곤 했던 힘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꿈속에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꿈은 언제든 갑작스럽게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 섬에서, 컬리넌에서 하루빨리……

    시야가 흐려지며 머릿속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꿈은 갑작스레 파해에 이르렀다. 마르틴은 숨을 크게 헐떡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끄응, 뜨겁고 축축한 것이 그의 뺨과 턱을 핥았다. 동료 경관이 잠시 맡겨둔 셰퍼드 루디였다. 친구의 충견은 숨을 학학거리며 임시 주인에게 뛰어올라 끙끙거렸다.

    “쉿, 루디. 괜찮아. 괜찮아…….”

    그는 루디의 검은 털을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는 정말로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쪽은 꿈속의 앤지였다. 사슴같이 맑고 순수한 눈을 한 여자.

    실제로 한 마리 사슴과 다를 바 없었다. 제 심장이 과녁으로 겨눠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피와 고통 앞에 철저히 무방비한, 사슴의 운명과도 같았다.

    * * *

    다음 날 오후, 앤지는 예배당 내 작은 도서관에서 존 미켈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사서이자 주민들의 신상 기록을 관리하는 그는 난감한 듯 콧수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미켈 아저씨. 정말 그런 이름이 없어요? 비슷한 이름도요? 다시 한번 검토해 주시면 안 될까요…….”

    “글쎄. 마르틴 실바란 이름은 없대도. 봐라, 이 명부는 지난 20년간 알파벳 순서대로 마을 주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꼼꼼히 다 기재한 기록부야. S와 M 카테고리 모두 세 번이나 샅샅이 살펴봤지만 그런 이름은 없지 않으냐.”

    중년 남자는 콧수염을 까딱거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듯 장부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앤지는 명단을 제 앞으로 끌어당겨 몇 번이나 훑어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체념한 표정이었다.

    “네……. 성가시게 해 드려 죄송해요, 아저씨.”

    “아니다, 성가시긴.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데 그러니? 외부인일 리는 없고……. 난 태어나서면서부터 쭉 이 마을에 살아왔는데 명단에 누락된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

    존 미켈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섬의 모든 주민을 알지는 못하지만 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저씨. 혹시 전에 윈드 밖으로 배를 끌고 나갔던 엘리엇처럼…… 그렇게 된 섬 주민이 예전에 또 있었나요?”

    엘리엇. 등대처럼 커다란 윈드, 절대 넘어서면 안 되는 파도의 경계선을 넘어가다 결국 무언가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죽은 청년의 이름이다. 작년에 붉은 살점 몇 토막으로 해변가에 쓸려왔던 무참한 시체를 떠올리자 소름이 쫙 끼쳤다.

    혹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의 유령이 꿈에 나타난 건 아닐까? 탈출이란 표현이 사실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내가 알기론 없다. 출생자 명부처럼 사망자도 따로 적고 있는데 그렇게 죽은 사람은 없었어.”

    “아아……. 네.”

    최소한 죽은 사람은 아니란 의미다. 그럼 그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왜 수시로 꿈에 나타나 이상한 말을 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게다가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 쪽에서 제 입으로 이름을 밝힌 적은 없었다.

    그때 도서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앤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앤지- 아직도 여기 있어? 오늘 모여서 기퓌르 짜기로 했잖아!”

    수우 아주머니의 딸 엠마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매주 수요일, 엠마와 레티샤, 마리사와 넷이 예배당 자수실에서 기퓌르(guipure, 실 레이스) 손수건을 짜기로 한 것을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앤지는 미켈 아저씨에게 공손히 인사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엠마를 따라나서는 동안에도 생각은 여전히 꿈속의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미켈 아저씨랑 무슨 얘기 했어?”

    “아, 아냐. 책 내용 뭐 여쭤보느라…….”

    “앤지는 진짜 책벌레야. 우리 엄마가, 나중에 아저씨 후임 사서는 네가 딱이래.”

    일찌감치 자수실에 모여 있던 소녀들은 깔깔거리며 인사를 나눴다. 다들 앤지를 향해 꾸밈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한 명만은 달랐다. 엷은 금발에 파란 눈을 한 레티샤의 웃음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랬다. 어릴 적부터 도도했던 레티샤 데르반의 거만함은 앤지 앞에서 더 선명하게 도드라지곤 했다. 앤지는 먼저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안녕, 레티샤. 부모님은 안녕하시지?”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는 응, 짤막한 대답만 돌려주고 다시 손안의 레이스로 시선을 거뒀다. 레티샤의 아버지 해럴드 데르반은 블랙웰 공작가의 회계와 행정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블랙웰이란 이름 아래, 섬의 모두가 신분상 서열이나 맡은 바의 귀천 없이 평등했다. 적어도 공동체의 가치는 그러했다.

    하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데르반 집안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자수실 안의 소녀들, 아니, 자수실 바깥도 포함해서 레티샤는 그들 중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본래 인간과 짐승은 무리 안에 살면서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고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숙명적이고도 필연적인 불평등에 지배되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앤지는 소녀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레이스를 능숙하게 수놓으면서도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르틴 실바의 정체, 그가 꿈에서 말한 것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레티샤의 날카로운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손수건 한 장을 막 완성했을 때 앤지는 얼굴을 들었다. 소녀들은 손으로는 바늘을 놀리며 입술로는 이런저런 수다를 재잘대기 바빴다. 갑자기 앤지가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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