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7/106)
  • #17

    에드워드는 눈을 감았다. 피가 조금씩 몸 안에서 말라붙는 한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유제니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를 볼 때마다 얼굴이 불에 데인 듯 붉어지곤 했다. 볼의 홍조가 정점을 이뤘던 혼례식, 첫날밤 이후로도 늘 그랬다.

    하지만 블랙웰의 여주인이 되고 나서, 당사자인 그녀에겐 철저히 차단되었던 진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로는 그렇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때 알았다. 거대한 분노에 휩싸이거나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할 때, 사람의 얼굴이 핏빛 하나 없이 창백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제니아는 죽는 순간까지 남편인 그를 향해 핏기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유제니아. 이제 곧 당신 곁에 갈 거야. 용서해. 아니…… 당신 곁으로도 갈 수가 없겠군. 나는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까 천국에 있을 너의 옆으로는 다가갈 수조차 없는 것을.

    그녀가 스러지고 나서야 아내를 향한 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여리고 하얀 몸에서, 마침내 한 방울의 피도 나오지 않게 되고서야 그는 제 감정을 깨달았다.

    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유제니아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제 몸을 조금씩 갉아먹는 독(毒)에서 벗어나기 위해 뭐든 해야만 했다. 아내가 죽고 나서도 인간성을 저버린 만행은 계속되었지만, 결국은 이 빌어먹을 독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속절없이 신의 철퇴를 달게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신이시여, 부디 제 아들만은 구원해 주소서. 아버지의 원죄…… 앤지 리즈델에게 갚아야 할 죄악까지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기꺼이 지옥불로 떨어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카일만은 살려 주십시오.

    유제니아와 제 다른 아이, 로이드를 잃은 것만으로도 이미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 * *

    굴뚝 연기가 안개처럼 뿌연 회색빛 하늘에 퍼져 나갔다. 빈터가르의 수도, 시타델 1구역 경시청은 작년 최초로 지어진 대규모 방직 공장 단지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한 달 후에 있을 산업 혁명 1주년을 맞는 기념 행사로 벌써부터 도심은 들뜬 분위기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휴게실은 노랫소리와 웅성거림으로 어수선했다. 적당히 떠들썩한 방 안은 한 사람을 둘러싼 유쾌한 기운으로 넘쳐 있었다. 케이프 가운을 벗은 경관들은 애스콧 타이를 느슨히 풀어 헤치며 팔꿈치를 걷어붙였다.

    “해피 버스 데이 투유- 자, 빨리 끄라고!”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가장 연륜 있어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의 주인공을 독촉했다. 말린 과일과 버터 크림을 잔뜩 올린 케익에는 초가 네 개 꽂혀 있었다.

    마르틴은 스물네 번째 생일을 맞이해서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케이크를 후, 힘주어 불었다. 검은 제복 차림의 동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를 올렸다. 마르틴은 경시청 보안 지부에서 가장 촉망되고 신뢰받는 신예 중 한 명이었다.

    “생일 축하하네! 근데 약혼녀와 식은 아직인가?”

    “다음 생일 전까지는 빨리 식부터 올리라고! 아무리 승승장구 잘나가도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리는 행복보단 못하다네.”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마르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웃음 지어 보였다. 케이크가 한 조각씩 돌려지고 사과주로 건배를 나눈 후에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저마다의 주말을 만끽하기 위해 해산한 뒤에야, 마르틴은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오전에 발간된 신문을 다시 펼쳤다. 그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와 달리 굳어 있었다.

    구석의 기사를 훑는 눈길이 어두웠다. 지면에는 국경을 사이에 둔 이웃 국가, 트리에스테의 최신 소식이 인쇄되어 있었다.

    「오늘 트리에스테 제국의 황실은 창시 이후 수백 년 동안 비종교 활동으로 간주되었던 고대 토속 신앙 ‘카일룸(cælum)교’를 최초로 정식 종교로 공식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황제 레니에 7세를 대리하는 황실 의전장관은 트리에스테의 드루이드교에서 기원한 카일룸 교파 특유의, 자연과 영혼에 대한 예배 의식을 종교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기로 인정했음을 알렸다. 그 결과, 카일룸 교단을 대표하는 비영리기관 ‘카일룸 교단 협회’는 앞으로 정식 종교단체로서의 세금 우대 조치의 혜택을 받게 되고 황실 지원도 받게 될 예정이다.

    블랙웰 공작의 방계이자 카일룸 교단 협회 의장인 사무엘 데르반 남작은 4년간의 공인 신청 심사 기간 끝에, 트리에스테 황실 종교위원회가 카일룸 교단을 하나의 종교로써 공식 천명한 데 대해 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는 카일룸 교단을 정식 종교로 인정하는 이러한 발표가, 트리에스테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도의 신앙을 고양시키고 앞으로의 신앙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예견했다.

    트리에스테의 인근 국가인 아제르반, 비첸틴 및 변방 하이랜드의 사제들에 의해 최초 창시된 카일룸교는 영혼의 불멸, 윤회, 전생, 죽음의 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유일신이나 유일창조신에 국한되지 않고 땅과 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의 힘을 숭앙하는 교리를 따른다. 그에 따른 예배 의식을 드리는 관습도 전해져 오고 있다.

    카일룸교는 구교와 신교가 전 대륙에 전파되고 뿌리를 내린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까지도 고대에 존재했던 토속 신앙적인 이단종파 정도로만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종전 후, 자연숭배 및 자연 친화적인 사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서서히 교세를 키워 나가고 있는 추세이다.」

    마르틴은 몇 번이고 기사를 되풀이 읽었다. 교세, 즉 종교의 세력이 확장된다는 것은 실권자의 활동 반경이 보다 넓고 자유로워짐을 뜻했다.

    부서 내 누구도 이 기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매일 새로운 사건에 집중하고 얘기를 나누는 동료들조차 이 기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웃 국가의 소규모 종교 공동체가 황실의 인가를 정식으로 받았다는 사실은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내용 자체가 아니었다. 평범한 세인들은 이 작은 기사에 도사린 엄청난 파장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카일룸 교단의 실세, 그 가문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일반인은 빈터가르에 그 자신을 포함해 브린과 그녀의 아버지, 세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마르틴은 책상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얹고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짚었다. 한기가 돌았다. 날은 아직 차가웠지만 벽난로가 타닥타닥 소리 내고 있는 휴게실 안은 따뜻했다. 그런데도 전신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땀구멍마다 얼음 바늘이 촘촘하게 파고들어 몸속 깊은 곳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토를 장악하려는 건가.”

    마르틴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두 눈을 감아도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앤지라는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지금은…… 그 여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세상이 서서히 뒤집힐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그의 뇌리에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신약 성서 끝머리, 붉은 책갈피에서 보았던 짧은 글귀였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요한묵시록 21:5)

    * * *

    안락한 겨울이 지나가고 사방에 봄이 열린 지 수십 일이 흘렀다. 내일이면 봄의 절정을 앞둔 4월이었다. 도련님과 그렇게 이별의 포옹을 한 지도, 어느덧 석 달 하고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섬의 4월은 섬의 원래 이름인 컬리넌즈 헤븐, 구 명칭처럼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란 창공과 바다 사이 수평선은 경계를 구분 짓는 게 무의미했다.

    올해는 특히 더 아름다웠다. 섬 곳곳을 뒤덮은 녹음과 평원, 초원과 꽃밭은 그 어느 해보다도 더 싱그럽고 풍요로웠다. 봄에 수확을 맞는 농작물과 수목, 각종 약초는 풀 한 포기, 씨알 하나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고 가축들은 건강한 새끼들을 대량 생산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안정된 상태하에 있었다. 섬 구석구석, 신의 축복이 와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내달 5월은 더 아름답고 풍요로울 터였다.

    앤지는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짧은 아침 기도를 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이 평소처럼 출근길을 나서기 무섭게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은 금세 무표정으로 변했다.

    앤지는 꿀을 탄 차를 마신 뒤, 부모님이 창고 귀퉁이에 꾸며 준 자수 작업실로 향했다. 그날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눈부신 하늘을 봐도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집 앞에 흐드러지게 만개한 봄꽃들에도 동화될 수 없어 유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평온한 일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앤지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의 대상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의식주의 풍족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존재였다.

    며칠 전,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른 것처럼 블랙웰 힐 근처를 배회할 때 마침 공작저를 나오던 던스트 부인과 마주쳤었다. 그녀는 앤지의 속내를 읽었는지 타이르듯 말했다.

    -앤지. 도련님은 잘 치료 받고 계실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부인께서는 카이 님을 만나실 수 있나요? 최근에 뵌 적이 있으세요?

    -아니. 주치의 외엔 누구도 도련님을 뵐 수 없단다.

    부인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앤지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애써 밝은 척을 했지만, 지금처럼 혼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바늘을 놀리던 손길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석 달째가 다 되어 가는데…… 언제쯤 치료가 끝나는 걸까.”

    사무치는 그리움은 가시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맑고 투명한 눈물방울이 레이스 원단 위로 똑 떨어졌다. 주말 예배당 모임 때 식탁보 위를 장식할 소품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레이스 위 눈물 얼룩을 문질러 닦아 냈다. 하지만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꾹꾹 억눌렀다 터져 버린 격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앤지는 레이스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머리는 작업대 위, 교차된 팔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음성이 뇌리에 몇 번이고 되새김질을 해 댔다. 저택 3층 방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석 달 전, 그가 그녀에게 들려줬던 속삭임이다.

    -너도 날 사랑해, 앤지. 날 기다리면서…… 절실히 깨닫게 될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뼛속 깊이 통감되는 사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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