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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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 님을 앞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도 힘들 만큼 괴로워요.”

    게다가 만에 하나 치료가 성공적으로 되지 않으면? 그럼 카이 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설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마지막 의문은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그녀의 의중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반드시 잘 견뎌 낼 거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꼭 완치될게, 앤지. 그러니까 그동안 기다려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돌아오면……”

    그의 이어지는 말에 앤지의 붉게 젖은 눈이 크게 떠졌다.

    “우리 관계를 정식으로 공표할 생각이야.”

    “카, 카이 님…….”

    “방금 확신했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그의 손이 뻗어 와 앤지의 머리 뒤를 부드럽게 받쳤다.

    “사랑해, 앤지. 언제부턴가…… 아니, 처음 네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였던 것 같아. 나는 너 하나밖에 생각하지 않게 됐어. 네가 여기 오는 그날, 그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고…… 네가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는 순간부터 난 미칠 듯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 심장이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서 터져 버릴 것 같았어. 네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만 들려도 기뻐서, 매일 발작으로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건 까맣게 잊곤 했어.”

    “카이 님.”

    지금 앤지의 심장이야말로 잔뜩 흥분되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로던 가의 도련님, 이렇게 지체 높고 아름다운 사람이 그녀를 사랑한다니.

    “사랑해, 앤지.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에 성공해서 완치된 몸으로 돌아올 거야. 지금은 반지도 아무것도 없지만…… 몸이 이래서 무릎 꿇고 멋있게 구애할 수 없지만 말야.”

    그의 눈이 한순간 서글픈 웃음을 띠었다. 웃음은 이내 사라지고 진지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반드시 완치돼서 돌아올 테니까. 그럼…… 돌아오면 날 받아 줄 거지?”

    앤지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 건 처음이었다. 기쁨과 슬픔, 안도감과 혼란스러움,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한 사람의 내면에 혼재하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카이 님. 자, 잘 모르겠어요, 저는. 카이 님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지만 이게 진짜 사랑이 맞는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요.”

    카이는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앤지의 말을 들었다.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을 스스로 정의하기에, 그녀는 너무 어리고 순수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카이 님을 진심으로 좋아해요. 카이 님은 저에게 제 가족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슷한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끔씩 만날 수 없을 때는 그가 사무치게 그립고 병세가 악화되는 건 아닌가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최소한 몇 달간 볼 수 없을 거라는 통보에 이렇게나 가슴이 아프고 벌써부터 슬퍼져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리라.

    “너도 나를 사랑해, 앤지.”

    카이는 담담하게, 동시에 확고하게 말했다. 그의 한 손이 다가와 앤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상상해 봐. 최악의 경우를. 만약에…… 내가 치료에 실패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면…… 그럼 어떨 것 같아?”

    앤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정에 불과할 뿐인데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더 옥죄어 왔다.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에 그런 가정은 얼마든지 고문이 될 수 있었다.

    “싫어요, 그런 상상……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잘 견디고 무사히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 약속, 반드시 지켜 주세요. 대답은 그때 들려드릴 테니까.”

    앤지는 가까스로 울먹임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카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반드시 지킬게. 꼭 완치되어 널 만나러 갈 테니까. 대신, 내가 돌아오면……”

    카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날 내 여자가 되어 줘. 블랙웰가의 반지를 끼고……. 그날 밤 정식으로 내 사람이 되어 줬으면 해. 그게 내가 바라는 치유 축하 선물이야.”

    앤지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카이의 보드라운 입술이 그녀의 것 위로 곧바로 겹쳐 왔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천천히,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환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그의 혀는 치밀하게, 집요하게 앤지의 입 안 구석구석을 탐했다. 그 강렬하고 농밀한 혀의 윤무 아래서, 앤지의 혀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탐스러운 과육처럼 애무를 받았다.

    짜릿한 쾌감과 전율 아래 정신이 빠르게 몽롱해져 갔다. 가수면 상태에 놓인 듯한 흐릿함 속에서 앤지는 엉거주춤 늘어뜨렸던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둘렀다.

    그녀의 호응에 화답하듯, 앤지의 가냘픈 허리에 두른 팔 힘도 더 강해졌다.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첫 번째 키스 때보다 더 격렬한 황홀함이 영혼까지 송두리째 앗아 갈 기세로 전신을 에워쌌다.

    길고 달콤한 열락이 끝난 후로도 카이는 그녀를 제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을 더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갈 시간이 되어 앤지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카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도 날 사랑해, 앤지. 날 기다리면서…… 절실히 깨닫게 될 거야.”

    그는 머리를 숙여 앤지의 이마에 최후의 키스를 남겼다. 지금까지의 온기와는 다르게, 묘하게 차가운 입술이었다.

    * * *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은 이제는 확실히 죽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막연한 절망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침상 위에 내던져진 그는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최악의 상태였다.

    그러나 사지를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몸과는 달리 정신은 말짱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운명과 직결된 마지막 사안에 대해서만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확실히 처리할 수 있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지막 레머디와 생체적으로 맞는지 다시 검사해 봤나?”

    “그렇습니다, 주인님. 찻잔 손잡이에 유리 알갱이를 살짝 묻혀 최근의 피를 다시 뽑아낸 결과, 도련님의 것과 상성이 여전히 잘 맞았습니다 ”

    공작의 충실한 심복 제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통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감정 절제가 뛰어나다 해도, 오랫동안 섬겨 온 주인의 임박한 최후를 앞두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앤지 리. 일곱 번째 레머디……. 그럼 역시 그 애와 맺어져야겠군.”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님. 카일 도련님께서는…….”

    “말해. 난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더더욱 아무것도 숨겨서는 안 돼.”

    잠시 머뭇거리던 제롬은 말을 이었다. 경직된 턱 위로 긴장이 역력했다.

    “그 아이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생각한다니……?”

    에드워드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마흔이 살짝 넘은 나이였지만 황폐한 얼굴은 흡사 육십이 가까운 노인의 그것 같았다.

    젊은 시절, 컬리넌 섬을 굽어보는 햇살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던 아름다움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약물과 독, 그 부작용의 여파였다. 보다 정확히는, 실패한 실험체의 비참한 최후에 걸맞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설마…… 정말로 정이 들어 버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전에 레머디의 활용에 대해 물었을 때만 해도 혹시나 했는데.”

    제롬의 침묵은 곧 긍정의 의미였다. 에드워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지만 물 한 모금을 들이켤 기력도 없었다. 간신히 혀를 놀려 대화를 나누는 것만도 기적 같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이제 혀까지 마비되어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던스트 부인 말로는 레머디를 바꿔 달라는 요청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카일이? 하…… 몇 달간 왕래하면서 정이 들기라도 한 건가. 설마 그럴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이 무슨……”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송구합니다, 주인님.”

    “아니. 날 때부터 감정적인 공백이 있었던 아이였잖나. 기억해? 내 아들은 태어난 순간, 울지도 않았어. 정서적으로 뭐가 비틀린 것인지 희로애락 자체가 마비된 상태였단 말일세. 그래서 그렇게 이성에 눈을 뜰 줄은 미처……”

    그는 눈을 떴다. 젊었을 때는 하늘만큼 푸르고 맑았을 탁한 눈에 고통이 어려 있었다.

    “결혼은 순리대로 진행되어야 해. 카일도 결국은 뭐가 옳은 건지 판단이 설 테니까. 레티샤 데르반과의 정략혼을 깨고 앤지 리즈델과 혼인을 시켜야 한다.”

    세상이 규정한 윤리의 기준에 옳은 것은 아니다. 블랙웰의 이름이 앞으로도 세상을 발밑에 두고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부친이 궁극적으로 바랐던 숙원은 에드워드 대에서 실패했다. 그렇다고 카일에 이르러 성공할 수 있기 바라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오직 그 목표 때문에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상 이상의 고행을 겪어 왔다.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온 것이다. 죄다 빌어먹을 부친의 몹쓸 욕심 때문이었다.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 들다니! 그래서 지금 이렇게 대대로 대가를 치르다 못해, 결국 내 아들마저 고통을 받고 있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어설픈 감정으로 제 안위를 뒤로할 만큼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다. 카일이 누구와 결혼하고 후사를 가지는지는 상관없어. 그저 제 피와 가장 잘 맞는 레머디를 합법적으로 옆에 붙들어 두고 안전하기만을 바라. 그 녀석은 레머디 없이도 살 수 있도록 완쾌되겠다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신도 장담할 수 없어.”

    그가 괴로움에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알아. 앤지라는 아이에겐 몹쓸 짓이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세상 무엇보다 내 아들의 행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어. 내 아들의 육신만은 최대한 건강히, 오랫동안 살다가 편안히 여생을 마쳐야 돼. 그게 내가 죽기 전에 염원하는 유일한 소망이야. 그러니 뒷일은 모두 네게 맡긴다, 제롬…….”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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