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106)
  • #15

    마르틴의 눈이 화들짝 떠졌다. 꿈은 또다시 그를 밀어내 버렸다. 그 소녀를 보는 전체적인 시간은 매번 조금씩 더 짧아져 있었다. 이번엔 그녀와 단둘이만 있지 않았다. 이번 꿈속에서의 그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여자는 처음으로, 눈을 감은 채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무중력 상태 속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선명하게 뜨고 있었다. 거대한 숲 같은 곳 한가운데 서서 시선은 눈앞의 남자에게 고정한 채, 마르틴에겐 옆모습만 보여 주고 있었다.

    -앤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이로써, 마르틴도 여자의 이름이 앤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앤지라는 이름의 여자는 그를 카이라고 불렀다. 카이 님이라고 부르던 중, 분명 카일렉 도련님이라고도 했었다.

    마르틴은 경악에 찬 신음을 뱉었다. 카일렉? 설마 카일 로던 블랙웰-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의 아들, 그 카일 말이야?

    마르틴은 전등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등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그가 두 남녀를 목격한 순간은 매우 짧았다. 둘은 마주 보고 있다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서로를 포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의식이 개입하기 직전, 포옹 이상의 뭔가가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앤지라는 여자의 홍조 띤 얼굴과 눈빛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그것이었다. 부정할 나위가 없었다.

    안 돼, 더 이상…… 그 남자와 가까이해서는 안 돼.

    마르틴의 뇌리에 뭔가가 번개처럼 스쳐 갔다.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 앤지라는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어째서 그의 꿈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는지. 단지 우연일 수도 있었다. 동시에, 단순한 우연 같지가 않았다.

    일부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연이고 아니고, 나는 그 애에게 알려 줘야 해. 알게 된 이상,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경고해 줘야 한다고.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알려 줄 수 있지.”

    마르틴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 감쌌다. 알려 주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안다 해도, 그의 정체와 위치를 노출하지 않고 알려 주기란 불가능했다.

    섬에서 탈출한 지 어언 8년이 지나 있었다. 마르틴은 이제 더 이상 컬리넌 섬의 주민이 아니었다.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탈출자, 도망자, 그리고 이제는 외부자였다. 이제야 빈터가르의 평온한 삶에 안착하게 되었는데, 얼굴과 이름밖에 모르는 한 여자아이를 위해서 새로운 삶 전체를 걸 수는 없었다.

    마르틴은 한 시간 뒤 경시청으로 출근해 모스 부호 송신기에 다가섰다. 빌렘 반 아미티지는한참 뒤 답장을 송신해 왔다.

    -마르틴. 무슨 일인가? 안 좋은 일은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뵙고 말씀드릴게요.

    그는 마지막 메시지를 송신하기 직전 한 마디 덧붙였다.

    -컬리넌 섬에 대한 것입니다.

    자판을 누르는 손끝이 긴장으로 뻣뻣해져 있었다.

    * * *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여느 때와 같은 방문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와도 다른 방문이었다. 늘 그랬듯이 대답은 없었다.

    앤지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방 안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산사나무 꽃, 혹은 카트레야 꽃 같기도 한 향기가 실내에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아직 1월 중순이었지만 방 안은 일찌감치 봄을 품은 분위기였다.

    “카이 님……?”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방이 무척 환했다. 창을 늘 가리고 있던 커튼이 창 가장자리까지 밀려나 있었다.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휘장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던, 거대한 장막 같던 휘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른 서너 명이 누워도 넉넉할 크기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앤지.”

    그의 목소리는 침대와 창 사이, 좁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앤지는 L자 형태로 이루어진 침실 안쪽, 꺾어진 벽 너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쪽이야. 이리 와.”

    그의 목소리는 그윽했다. 앤지는 마법에 홀린 듯,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걸었다.

    분명히 이런 음색이었을 거야. 어두운 파도 한가운데, 바위에 앉아 황홀한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홀리던 세이렌이 남자였다면…… 분명히 이런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희미한 삐걱임이 점점 가까워졌다. 삐걱대는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도련님이었다. 카이는 두터운 실내 가운을 몸에 두르고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완벽한 얼굴은 창을 딛고 들어선 햇살에 살짝 그림자가 져 있었다.

    앤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모자를 꼭 쥐고 있던 두 손이 떨렸다. 온기가 모든 곳에 있었다. 따사로운 겨울 햇살과 벽난로 안에서 조용히 춤추는 불꽃, 그리고 그의 눈빛- 그중 어떤 것이 가장 깊은 온기를 품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본능적으로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앤지는 도련님이 앉아 있는 마호가니 의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 앉아.”

    앤지는 바로 그 앞의 의자에 앉았다. 도련님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지만 의자를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카이는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앤지의 시선은 그의 허리부터 발치까지 가린 무릎담요로 향했다. 뭔가 이상했다. 밝은 표정과는 달리 몸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카이 님. 몸……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아. 별로 좋지는 않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앤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무릎 위의 제 손 위를 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따뜻해…….

    온몸이 녹아 버릴 것처럼 기분 좋은 온기에 앤지는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지만 별로 좋지 않다니 그건 무슨 뜻일까. 이렇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는 괜찮지만, 실제로는 건강상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좋지는 않지만? 아직 안 좋은 거예요? 완치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완치되어 가고 있어.”

    앤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다. 환자라기에는 너무나 붉고 선정적인 입술이었다. 햇빛을 거의 본 적 없는 안색은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위태로울 정도로 투명했다.

    “완치는 되어 가고 있지만…… 그 과정은 역시 좀 힘들어서. 그래도 견딜 만해.”

    앤지는 어느새 카이에게 거의 붙을 듯 바짝 끌어당겨져 있었다. 한 손은 그의 크고 따스한 손안에 갇혀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떨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카이의 조용한 통보에 앤지의 눈이 크게 깜빡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그의 귀에도 들렸을 것 같았다. 만날 수 없다니? 어째서?

    “만날 수 없다니. 왜요? 설마…… 어디 떠나시는 건가요?”

    치료를 위해서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섬 밖으로는 나갈 수 없잖아. 아직은 전쟁의 여파가 남아 있어서 위험한 데다 인근 해역엔 안개와 상어들이 득실거리니까. 검푸른 파도 위에 우뚝 선 윈드가 앤지의 뇌리에 떠올랐다.

    “아니,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 앤지. 여기 있을 거야.”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앤지의 가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그래. 섬 밖으로는 아무도 나갈 수 없잖아. 그런데 왜 당분간 만날 수 없다는 거지? 대체 왜?

    “몇 달간 치료에만 전념해야 돼. 주치의들이 새로운 치료 약을 개발했어. 지금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치료가 잘 끝나게 되면,”

    그는 햇살이 서서히 옅어져 가는 창 쪽을 바라보았다.

    “낮에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다른 사람들처럼…… 너처럼 정상적으로 햇빛 아래 설 수 있게 될 테니까.”

    카이의 시선은 다시 앤지에게 향했다. 저물어 가는 햇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일순 황금빛을 띠었다. 앤지는 그 노을색 동공에 영혼마저 삼켜질 듯한 전율을 느꼈다. 두려움과 불안 또한, 나란히 밀려오고 있었다.

    “그럼 그 몇 달 동안…… 카이 님을 전혀 볼 수 없게 되는 건가요?”

    카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앤지는 다시 물었다. 부질없는 물음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확인하게 되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없을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었다.

    “몇 달이라면 언제까지일까요. 5월? 6월?”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어. 가을이 넘어갈 수도 있고……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그동안은 전혀…… 잠깐이라도 볼 수 없는 건가요.”

    “앤지.”

    다음 순간, 그녀는 카이의 넓은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가 다리가 불편한 건 확실했지만 팔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앤지는 아기처럼 그의 무릎 위에 편안히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카이의 넓은 품은 기억처럼, 아니, 기억보다 더 따스하고 안온했다.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내가 얼마나 절실히 바라는지……. 치료 중간에 잠깐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널 볼 수 없을까 미리부터 바라고 아파하는 건 내 쪽이야.”

    그의 아름다운 눈에는 고통이 선연했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심장을 저미는 듯한 아픔이 너무 깊었다. 앤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안타까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별에 대한 두려움의 광풍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카이 님.”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카이의 말을 듣고서야, 앤지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알아차렸다. 그의 보석 같은 눈이 흔들리며 숨길 수 없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앤지. ……왜 울어.”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젖은 눈가와 뺨을 닦아 주었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하게 빚어진 손인지.

    앤지는 제 얼굴을 쓸던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카이의 손은 그녀의 것 두 배 이상 컸지만, 살결은 더 하얗고 투명했다. 게다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연약한 유리 세공품처럼 매만지고 있었다.

    “앤지.”

    “모르겠어요. 카이 님…….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그냥, 그냥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눈물이 몇 방울 더 떨어졌다. 주인집 도련님의 상태에 대해 안타까운 동정심, 단지 그것뿐일까? 아니다. 그를 향한 앤지의 감정은 이미 동정심 그 이상의 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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