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4/106)
  • #14

    “…….”

    앤지의 두 눈이 더 크게 열렸다. 조금 전의 놀라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자신을 카이라고 밝힌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날 밤 우리가 숲에서 마주친 게 맞아. 너무 놀랐는지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내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하지만 엄마는 꿈일 거라고……. 제가 밖에 나간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셨어요.”

    “혹시 걱정하실까 봐 내가 흔적을 다 없앴어. 눈이 묻은 발자국을 다 지우고 코트도 원래 자리에 걸어 둔 거야.”

    “그날, 그날 밤 왜 숲에 계셨어요? 전 이상한 소리를 듣고 나갔는데 카, 카이 님은 왜…….”

    “나도 이상한 메아리에 잠이 깼어. 그래서 숲으로 가 봤는데 너랑 마주쳐서 깜짝 놀랐지.”

    “나무 사이로 검은 형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걸 봤어요. 카이 님도…… 보셨어요?”

    “아니……. 난 보지 못했어.”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 잔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메아리의 정체는 밝혀졌어. 윈드에 작은 이상이 생겨서 기계음이 울린 거라고 던스트 부인이 말했는데…… 신기하게도 마을 사람 중 그 소리에 깨어나 밖으로 나와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지.”

    카이는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는 이제 앤지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널 제외하고.”

    “…….”

    “아무도 없었어.”

    “그렇……군요.”

    앤지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렇군요. 정말 이상하군요. 어째서 그 많은 사람 중, 저 하나만 그 소리를 들었을까요. 하지만 그 말들은 입술 안쪽에서만 맴돌 뿐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 무엇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법에 홀린 것처럼,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조금 덜 속내가 보이고, 눈 속에 조금 더 짙은 애틋함을 담은 쪽이었다.

    “생일 선물…… 마음에 들어?”

    “…….”

    그윽한 울림에 앤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가 말하는 생일 선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인지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확고한지도 깨달았다. 단순명료하고도 명쾌한 한 마디가 자연스럽게 목 안쪽을 간지럽혔다.

    네, 마음에 들어요. 깜짝 놀랄 만큼 너무. 너무나…….

    앤지는 제 심장 소리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너무 커서 바깥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카이 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결국 그 말은 입 밖으로 한 음절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앤지는 혀가 아닌, 무언가 다른 소통 수단으로 그런 마음을 오롯이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만 모를 뿐, 상대방은 그녀의 소리 없는 대답을 또렷이 새겨듣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가도 될까.”

    카이의 물음에, 앤지는 수 초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미끄러지듯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분명 푸른 청회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달빛 아래 반짝이는 동공은 신비로운 바다색이었다.

    그렇게 보석처럼 예쁜 눈을 하고서 그는 오히려 앤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녹색 눈에 영혼 깊이 매료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었지, 앤지.”

    “네.”

    앤지는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심장이 점점 더 거세게 뛰었다. 그녀의 직감은 그가 다음 순간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이제 막 밝힐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어쩌면, 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앤젤라.”

    그녀의 직감은 맞았다. 카이의 한 손이 앤지의 어깨 위로, 그리고 뺨으로 서서히 올라왔다. 그의 손은 너무도 따스했다. 다정한 두 눈빛처럼, 손가락 마디마디 품은 그 온기에 몸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선물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다른 한 손이 앤지의 머리 뒤를 부드럽고도 힘 있게 받쳤다. 앤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그녀의 입술 앞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미동도 않고 있었다. 카이는 지금 일부러 틈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거부할 수 있게끔 여유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앤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를 밀어내지도 않았고 자신이 물러서지도 않았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자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싹 다가온 그의 숨결만이 느껴졌다. 푸른 달의 차가움을 단숨에 녹여 버릴 것처럼 그의 숨이 무척이나 달콤하고 포근하다는 감각만이 있었다.

    다음 순간 앤지는 그의 차가운 입술에 흠칫 떨었다. 한발 물러설 뻔했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그의 손과 입술의 온도는 명확히 달랐다. 하지만 냉기는 잠시뿐, 그의 입술은 그녀의 따스한 입술, 그리고 그 안쪽의 보다 더 따뜻한 감촉에 빠르게 흡수되어 갔다.

    그의 입술이 앤지의 보드라운 아랫입술 표면을 살며시 쓸기 시작했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 야릇한 감각은 앤지의 등골에 한 줄기 강렬한 전율을 일으켰다.

    낯선 혀가 천천히, 강하게 입 안을 밀고 들어왔다. 그의 혀는 치열과 보들보들한 안쪽 점막을 천천히 자극해 왔다.

    그 관능적인 리듬과 감미로운 감각에 앤지의 정신은 몽롱해져 갔다. 어느새 두 발끝은 가지런히 위로 들려 있었다. 그의 혀가 일으키는 쾌감이 전신을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밀려 갔던 전율은 어김없이 되돌아왔다. 영원할 것처럼 이어지는 반복 끝에 앤지는 한순간 숨쉬기를 멈췄다.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던 혀가 그녀의 것을 휘감고 세차게 빨아당겼다. 보다 역동적으로 변한 그 움직임에, 야릇하고 간질간질하던 감각도 보다 더 강렬한 것으로 바뀌어 갔다. 숨 막힐 듯한 전율 속에서 앤지의 호흡은 다시 자유로워졌다. 뜨겁고 농밀하던 황홀감이 그녀의 입술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앤지는 감았던 눈을 떴다. 카이가 얼굴을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어진 입술 대신 한 손이 올라와 앤지의 뺨을 감쌌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제 도톰한 아랫입술을 문지를 때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꿈이 아니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카이 님이야. 그리고 방금 나는……

    그와 키스를 나누었어.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앤지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카이의 한 손이 다가와 뒤로 멀어지려는 그녀를 저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다시 키스하거나 다른 행위를 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달빛에 반사된 아름다운 푸른 눈, 그 동공에 깃든 욕망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욕망보다 더 크고 간절한 다른 감정들도 있었다.

    “앤지. 괜찮아?”

    “……아뇨.”

    앤지는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아요.”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카이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쳐 갔다.

    “내가 갑자기 그래서…… 싫었어?”

    “아뇨.”

    그녀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 깃든 불안과 아픔이 더 진해질까 봐 앤지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싫지 않았어요.”

    그는 처음부터 암묵적인 거부권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어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럴 의지가 전혀 없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싫지 않았지만…… 카일렉 도련님과 저는, 우리는 이러면…… 이럴 수 없는……”

    이러면 안 되는 관계잖아요. 이럴 수 없어요.

    원래는 감히 다가갈 수도 없는 상대였다. 그는 고귀한 블랙웰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그리고 그녀는 일종의 시종이자 피고용인의 딸에 불과했다. 앤지의 눈빛에서 무언의 메시지를 읽었는지 카이는 그녀의 양어깨에 다시 손을 올렸다.

    “너는 내게 특별해, 앤지.”

    “…….”

    “그리고 우리는 얼마든지 이럴 수 있어. 내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버지의 피아노 교습을 해 주던 음악 교사의 딸이었어.”

    뜻밖의 고백에 앤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돌아가신 블랙웰 공작 부인이 입주 가정 교사의 딸이었다니. 당연히 공작가만큼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였을 거라 생각했었다.

    “앤지. 나는 널 진심으로 특별히 생각해. 네가 처음 저택에 왔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2년 전 그 가을부터…….”

    “카이 님…….”

    앤지의 눈은 더 커졌다. 잠시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크게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낮으면서도 강했다. 그의 음색은 굳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어떻게 최대한의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최선의 예시와도 같았다.

    “널 좋아하게 됐어, 앤지. 진심이야.”

    그의 두 팔이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앤지는 그를 밀쳐 내지 않았다. 넓고 단단한 어깨에서,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덜미와 귀 아래서 은은한 체향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몸에서, 맨살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엉거주춤 허공에 떠 있던 앤지의 두 손이 천천히 카이의 등 뒤로 향했다. 등에 살포시 와 닿은 손길에, 그녀를 안은 팔에도 좀 더 힘이 가해졌다.

    안 되겠어. 달빛이 너무 눈부셔.

    앤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달빛은 결코, 지나치게 눈부신 적이 없었다.

    이건…… 꿈일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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