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13/106)
  • #13

    그녀는 차를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가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도련님이 바로 눈앞에, 바로 맞은편에 앉게 될 터였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도련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카이 님의 서늘하고도 달콤한, 묘하게 부드러운 음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그녀가 지금까지 들어 본 남자의 음색 중 가장 매혹적이고 듣기 좋은 음색이었다. 두 번째는…….

    “맞아, 그 남자. 어떻게 된 걸까.”

    두 번째로 가장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 마르틴 실바라는 남자는 최근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가끔 꿈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꿈과는 달리, 음성이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져서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르틴 실바가 꿈에서 나타났을 동안에 그녀는 카이 님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최근 다시 카이 님을 만난 이후로, 꿈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수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장미차 대신 꿀차를 연이어 이삼일 마셨을 때마다 마르틴이 꿈에 나타났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단순한 우연이겠지만 어쩐지 기묘했다.

    그때 끼익, 유리문 열리는 마찰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앤지는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뒤돌아보았다. 키 크고 건장한 누군가의 실루엣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앤지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대신 그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두터운 케이프 코트로 감싸인 가슴이 무서울 정도로 뛰고 있었다.

    카이 님……?

    각 잡힌 넓은 어깨, 긴 팔다리가 우아하게 이쪽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앤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카이 님이야.

    검은 옷으로 둘러싸인 형체가 조금씩, 달빛의 어두운 면을 비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음영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앤지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옆에 우뚝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사람은……!

    앤지의 한 손이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그 몸짓에 테이블이 약간 흔들리며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찻잔은 파삭,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 * *

    “헉……!”

    마르티네즈 다 실바는 신음과 동시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잠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침대 옆 램프를 켰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소녀가 다시 꿈속에서 보였다. 소녀라기에는 성숙했고 여자라기에는 너무 앳되고 청초한 얼굴은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뭔가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마르틴 자신의 것처럼, 한 쌍의 녹색 눈동자가 뭔가 무서운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극심한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르틴은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좀 더 버텨 보려 애썼다. 하지만 의식 밖의 뭔가가, 자꾸만 그의 무의식을 현실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결국 꿈은 그 미지의 힘에 의해 밀려났고 그는 의지에 반해서 깨어나고 말았다.

    “그 여자아이…… 이대로는 안 돼.”

    마르틴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창가에 기대섰다.

    키 크고 다부진 근육들이 창 너머로 비쳐드는 달빛의 음영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월광 너머로는 밤을 맞아 잠시 중단된 공사장 철골과 시청 청사, 공장의 굴뚝 등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쾌활한 낮과는 달리, 수도 시타델의 밤도 여느 도시처럼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그 애를 구해야 돼.”

    여자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난 그 소녀의 이름도 모르고 방법도 몰라. 설령 안다고 해도…….

    마르틴은 귀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냉장고 위쪽에 기댔다. 그는 복잡한 심경에 두 눈을 꼭 감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아니, 나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혈연도 아니고 아무 관계도 아닌,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기껏 힘겹게 일궈 놓은 그의 삶을 스스로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단순한 위험이 아니니까, 이건.

    약혼녀 브린과 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그를 저지할 것이다.

    -마르틴, 안 돼. 그 섬을 간신히 탈출했는데 다시 휘말리다니. 일단 섬을 둘러싼 안개가 걷히기 전까지는 섣불리 나서는 건 위험해.

    하지만…….

    마르틴은 선반으로 다가가 물이 담긴 저그를 세면용 볼 위로 기울였다. 그는 뒤통수가 뻐근하게 당겨올 때까지 흐르는 차가운 물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정신이 번쩍 들기는커녕,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뇌수가 혼선을 일으킨 것처럼 더 혼란스럽고 탁해진 느낌이었다.

    그 눈이 잊히지가 않아.

    여자아이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영롱하게 빛나던 커다란 초록빛 눈과 투명한 피부, 햇살처럼 반짝이던 긴 금발.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남녀노소, 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셨고 매혹적인 끌림 그 자체인 외양이었다.

    그러나 마르틴은 그의 약혼녀. 브린 메이어 아미티지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 꿈속이 소녀를 여자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 눈빛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물속에 빠져서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안개 속에 떠 있었다. 마르틴은 그녀와 대화를 해 보기 위해 몇 번이고 애써서 말을 걸었다. 여자는 번번이 그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 쪽에서 자신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타월로 젖은 머리를 닦고는 옷걸이에 걸린 회중시계를 보았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정신이 산란해서 차라리 꼭두새벽처럼 출근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마르틴은 두툼한 코트까지 걸치고 나서야 낡은 건물의 문을 열었다. 2월의 새벽 공기는 한겨울의 그것처럼 차갑다. 그는 한 발을 단단한 돌바닥 거리로 내디디며 모자를 머리에 깊이 눌러썼다.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날개를 펼치는 문양이 눈에 확 띄었다.

    빈터가르 왕국의 수도, 시타델 경찰청을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빈터가르는 작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대전쟁 이후 가장 빠른 회복 중에 있었다. 기존의 전제 군주제를 빠르게 탈피하여 현재는 입헌 군주제로 향하는 과도기를 헤쳐 가고 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장이 들어서고 전기가 발명되는 등, 빈터가르의 산업은 나날이 도약해 갔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왕실이 완전히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것도 허황된 얘기만은 아닐지 모른다고 다들 거리낌 없이 논하기도 했다.

    국경 너머의 트리에스테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이웃 국가는 허울뿐인 황실과 실세를 쥔 블랙웰 공작가의 영향력 아래 점점 더 암흑기로 접어드는 모양새였다. 공작가의 방계 일족들이, 요양으로 부재중인 공작과 무능한 왕을 대리해 나라를 전쟁 전의 봉건 사회로 되돌리고자 실제적인 치세를 펼치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마르틴은 경시청에 도착하자마자 해상 지도를 펼쳐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빈터가르와 트리에스테 인근 해역 한쪽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 * *

    앤지의 입술이 놀라움에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녀는 다른 한 손도 입가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드러낸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달빛에 반사된 보랏빛 흑발이 풍성한 컬을 그리며 이마 위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지금처럼 똑같이 고요한 밤, 똑같이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서 본 적 있는 머리칼이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얼굴 역시 낯설지가 않았다.

    어두운 파도색을 띤 눈매와 그 사이 자리 잡은 코와 입술은 너무도 우아하고 완벽했다. 아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눈부신 대천사나 왕자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당신은…… 전에 분명히…… 작년, 그러니까 섣달 그믐날 밤에……”

    앤지는 몇 발짝 멈춰 선 남자를 향해 간신히 입을 뗐다. 그는 분명히 그 남자가 맞았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녀가 꿈을 꾼 것이거나 몽유병 증세였을 거라고 치부했지만, 지난번 이상한 메아리에 숲으로 갔다가 마주쳤던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분명했다.

    그와 맞닥뜨린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다음 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평소처럼 자신의 방 침대 위였고, 부모님은 그녀가 꿈을 꾸었을 뿐이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신에게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신을 봤어요. 당신도 날 봤고요.”

    남자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느슨하게 맨 하얀 크라바트와 회색 베스트, 발치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가 사락, 스쳤다. 워낙 키가 큰 탓에 전체적인 윤곽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색은 무척 부드러웠다.

    “앤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음성이었다.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항상 꿈결처럼, 때로는 꽃잎 속에 촉촉하게 젖어 드는 이슬처럼, 낮고도 달콤한 음색은 앤지의 귀에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카이…… 님……?”

    “그래, 나야. 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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