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2/106)
  • #12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준 것 같았다. 이별의 시간은 앤지의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그 뒤로 며칠 후, 집에 홀로 남아 책을 읽고 있던 앤지는 마차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던스트 부인이 보낸 저택 심부름꾼의 편지를 받아서 펼쳐 보았다.

    「앤지. 도련님이 만나고 싶어 하시니 가능하다면 지금 바로 와 주길 바란다.」

    그녀는 지체 없이 코트를 걸친 뒤 바로 마차에 올랐다. 가슴이 기쁨으로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이제 완쾌되신 걸까? 오늘은 평소처럼 만날 수 있는 거겠지?

    앤지는 창 너머, 웅장한 공작저가 보이자 크게 한숨지었다. 물론 기대감과 환희로 가득 찬 한숨이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현관까지 서둘러 걸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저택에 오지 못했던 근 3주간, 프론트 가든은 조금 변해 있었다. 눈이 녹은 대지에는 한겨울에도 왕성히 꽃을 틔우는 푸른빛 마가렛과 포인세티아,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앤지. 어서 오너라. 오랜만이구나.”

    던스트 부인은 덤덤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앤지가 묻기도 전에 덧붙였다.

    “도련님은 많이 좋아지셨다. 하지만 아직 안정이 필요하시니 오늘은 한 시간만 있다가 내려오너라.”

    “네! 많이 나아지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앤지는 가볍고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한 시간, 그것도 예전처럼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울적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이 정도라도 호전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 이상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다.

    “앤지.”

    그녀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휘장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심장이 늘 기억하던 목소리였다. 그 따스한 저음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카이 님.”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네. 저는 잘 지냈어요. 카이 님은…….”

    앤지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틈을 두었다. 반가움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바보같이, 왜 눈물이 나는 거야! 따지고 보면 난 카이 님의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잠깐 책을 읽어 주고 말동무를 해 드리러 오는 피고용인의 딸일 뿐인데.

    “카이 님은 잘 지내셨…… 아니,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어요.”

    “보다시피 많이 나았어. 그보다 생일 선물, 직접 전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마음에 들었어?”

    “그럼요! 정말 근사해요. 너무 신비하고 예뻐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들기 전이랑 일어날 때마다 보고 있어요…….”

    사실이었다. 그가 선물한 하얀 스노우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그보다 카이 님. 왜 저에겐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제 생일 바로 다음 날, 1월 6일이 카이 님의 생일이란 걸…….”

    한참 만에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

    그녀에게 말해야 할 필요성이 아니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앤지는 잠시 망설이다 불쑥 물었다.

    “전 생일 선물…… 준비 못 했어요. 오늘도 갑자기 오게 돼서.”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네 진짜 생일 선물- 아무래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제 진짜 생일…… 선물요.”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근 한 달 전 용기 내어 말했던 그 소원을.

    “그럼 카이 님도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서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 없으신지. 물론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앤지는 바랐다. 뭔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기를 바랐다.

    “앞으로 열흘 동안 북쪽 별채 안에만 있을 거야. 거기서 치료받을 게 있어.”

    그의 말에 앤지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말은, 당분간 또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열흘 뒤는 2월의 첫날이고. 그날 밤…… 이 저택 뒤 숲으로 올 수 있겠어? 그때 네가 바라던 선물을 보여 줄게. 그리고 내가 바라는 생일 선물 역시 말할게.”

    휘장 너머 목소리는 진지했다.

    “저택 뒤…… 숲에서요?”

    “숲 입구에 온실이 있어. 헤네랄리페 정원이라 부르는 곳……. 그때 직접 말할게. 내가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헤네랄리페 정원이라면 앤지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성역이었다. 그의 부친 에드워드가 아내 유제니아를 위해 공들여 만든 온실 가든은 엄선된 정원사 외에는 평소 사용인들의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일로 방문하는 것으로 명분을 만들어 뒀어. 마차를 보낼 테니 날이 저물어도 위험하진 않을 거야.”

    “네, 도련님.”

    “선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우리 둘만의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네, 그럴게요. 아무에게도……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잠시 후 저택을 나와 마차 안에 올라탄 앤지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도련님을 만난 반가움과 기쁨, 그의 상태가 점차 호전되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둘만의 비밀이란 설렘 속에서도 드디어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 그 모든 압도적인 감정이 그녀를 가슴 들뜨게, 한편으로는 긴장되게 만들었다.

    * * *

    그로부터 열흘째 밤, 앤지는 식탁보 아래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평소처럼 단란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제대로 음식을 씹고 삼킬 수가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사방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앞으로 30분 뒤, 블랙웰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부모님과 막 디저트를 끝낸 순간, 현관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예정보다 더 일찍 온 것이다.

    매년 2월 1일부터 며칠간 공작저의 메이드들은 다가오는 봄을 맞이해 저택을 대청소하고 인테리어를 바꾸는 작업으로 바빴다. 앤지는 독감으로 쉬게 된 메이드 대신 일손을 거들어 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앤지. 어서 나가 보렴. 그럼 오늘 밤은 저택에서 머물고 내일 오후에 오는 거지?”

    “네. 내일 뵐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부부는 딸의 코트와 모자를 챙겨 주며 현관 밖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앤지는 평소처럼 마차 위에 올라탔다. 살짝 열린 차창 밖으로 푸드덕, 겨울새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오늘 드디어…… 카이 님을 볼 수 있게 된다니. 믿기지 않아.

    그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했다. 그녀의 부모님, 자수 모임의 친구들도 도련님을 본 적이 없었다.

    떠도는 풍문과 초상화를 통해, 선대 공작님과 에드워드 님 둘 다 젊은 시절 매우 기품 있는 미남자였고 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이었다는 추측만 퍼져 있었다.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도련님의 외모도 평범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잖아. 미추(美醜)는 중요하지 않아. 휘장 너머 목소리만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어릴 때부터 좋아해서 몇 번이나 읽었던, 야수 왕자와 미녀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론 카이 님이 야수일 리는 없었다. 몹쓸 저주에 걸려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는 단지 빛에 극도로 민감하고 심장이 매우 허약한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카이 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을 동안 마차는 블랙웰 힐을 가로질러 공작저 앞에 당도해 있었다. 달빛 가득한 밤에 보는 블랙웰 하이츠는 낮에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대저택과 정원은 밝을 땐 동화 속 공주와 왕자가 살 법한 궁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약간의 음산함과 신비함을 두른 지금은,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초월한 미지의 존재들이 머무는 성채 같았다.

    “이쪽으로 오렴.”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 앞으로 메이드복의 여자가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얀 메이드용 레이스 모자에 가려져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는 접한 적 없는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름 모를 메이드를 따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저택의 후문 복도로 들어섰다. 어두침침한 벽 양쪽에 희미한 불빛을 뿜어내는 촛대들이 걸려 있었다.

    실내 가득 짙은 향이 흘렀다. 진한 이국의 차 같기도 하고 꽃내음 같기도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은 커다란 유리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헤네랄리페 정원의 입구였다.

    “여기, 안에서 기다리도록.”

    안내인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고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앤지는 잠시 망설이다 유리문을 밀고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헤네랄리페 정원은 명성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아래, 넓은 실내는 다양한 꽃과 수목, 각종 화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윽하고도 강렬한 향이 몸속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착각마저 들었다.

    온실 안은 어둡지 않았다. 앤지는 고개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천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이 꽤 밝았다. 달빛 외에도 촛불들이 구석구석 자리해 있었다.

    “와아……. 저택 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앤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어디를 둘러봐도 꽃들이 넘쳐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라일락, 프리지아, 카트레야, 산사나무 꽃들도 있었다. 온실이라기보다 식물원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앤지는 드넓은 온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커다란 빙카 꽃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나무 아래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다기 세트와 각종 과일 무스 타르트, 핑거 케이크가 접시에 풍성하게 담겨 있었다. 한밤의 은밀한 티타임을 위한 식탁 같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푸른색 티포트를 들어 올려 제 앞에 놓인 찻잔 위로 기울였다. 쪼르륵, 가느다란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분홍빛 차에서는 장미 향이 났다.

    카이 님은…… 언제쯤 오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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