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1/106)
  • #11

    늦은 오후의 티타임은 창 너머 비쳐드는 겨울 햇살과 벽난로 장작불의 열기로 따스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앤지는 내내 궁금하던 것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친구 같은 모녀라도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 어떤 절대적인 관계 속에서도 상대적인 비밀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엄마. 도련님은…….”

    그녀는 제 목소리가 최대한 덤덤하게 들리도록 애썼다. 매일매일, 거의 매 순간 뇌리에 떠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 사람에 대해 묻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랐다.

    “도련님은 여전히 상태가 안 좋대요?”

    “그런 모양이야. 아까 별장 일 때문에 공작저에 잠깐 들렀는데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어. 그렇다고 아주 무겁고 침울한 건 아니고…….”

    “계속 그렇게 아프면 어떡해요?”

    앤지는 황급히 덧붙였다.

    “공작가의 유일한 자손이잖아요. 에드워드 님도 몸이 계속 안 좋으신데 유일한 아들까지 그러면……”

    “의원들이 신약을 거의 완성한 단계래.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앤지 너,”

    모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을 빤히 보았다.

    “그동안 말동무해 드리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나 보구나.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하긴 1년 반쯤 됐으면 그럴 만도 하지.”

    “아, 아니에요. 그냥 안타까워 그러죠. 정들었다고 해도 뭐, 주인집 도련님과 도련님 모시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

    “도련님이 이전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던스트 부인이 도련님 생각하는, 그런 거죠.”

    “그래. 어쨌든 도련님은 점점 좋아지고 계셔.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니까. 당장 다음 주에라도 널 다시 부르실지 몰라.”

    로라는 말없이 파이를 먹는 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주전자를 들어 딸의 빈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엄마, 그런데 나 슬립워킹 같은 거…… 정말 없는 거죠?”

    앤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몽유병 증세에 대해 모친에게 재확인을 구했다.

    “그런 거 없대도. 엄마가 가끔 새벽에 깨는데 한 번도 네가 그러는 거 본 적 없어.”

    “정말 그냥 자고 있었죠? 지난달부터 쭉…….”

    “그렇다니까. 그냥 꿈에서 누굴 보고 돌아다니고……. 그랬던 걸 거야.”

    “아니에요. 아니면 됐어요. 그런데 엄마……. 수우 아주머니 레몬파이 레시피 여쭤본다는 거 깜빡했네요. 내일 잠깐 들러서 적어 올까 봐요.”

    앤지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해 로라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이 이상은 그 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았다.

    며칠 전, 야밤에 숲을 헤맨 그 다음 날 그녀는 해가 중천에 떠오른 뒤에야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엄마와 아버지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온 마을에 울리던 이상한 메아리,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 그리고 숲 안을 헤매고 있던 검은 형체,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한 남자에 대해 잔뜩 흥분해서 늘어놓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앤지. 간밤에 우린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리고 네 옷이랑 장화는 바싹 마른 채 문 옆에 그대로 걸려 있고. 문도 꼭 잠겨 있었어.

    -그래. 내가 동트자마자 네 방에 와 봤을 때 넌 평소처럼 쿨쿨 자고 있었어. 지금 그 잠옷 차림 그대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새해부터 무슨 꿈을 그리 요란하게 꾼 거니. 아무튼 간밤엔 아무 일도 없었으니 어서 일어나 아침 먹으렴.

    얼떨떨했다. 간밤에 그녀가 겪었던 일이 꿈이라니? 분명히 클로크를 걸치고 부츠까지 신고, 현관문을 열고 숲으로 가서 그 이상한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

    서걱서걱, 고요한 정적을 깨고 눈 위를 밟던 제 발소리가 지금도 생생한데. 그리고 멀리서 빠르게 움직이던 검은 실루엣을 보았을 때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던 그 전율은? 그 공포심은 지금 돌이켜 봐도 섬찟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남자.

    달빛에 반사되어 푸른 회색빛으로 반짝이던 두 눈. 완전무결한 피부. 도저히 이 세상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았던 아름다움.

    등 뒤에 날개, 아니, 깃털 비슷한 것이라도 보였다면 그녀는 단박에 수긍했을 것이다. 삽화책에서만 보았던 대천사 라파엘이 그들에게 강림한 것이라고. 그들의 조그만 둥지나 다름없는 섬, 컬리넌에 어떤 계시를 가지고 내려온 것이라고 말이다.

    그 뒤로는 암흑만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목격한 직후부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꿈이었을까? 하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혹시 내게 몽유병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무의식중에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옷과 장화를 제자리에 두고 침대로 돌아와 스르르 잠이 든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 메아리와 검은 그림자는 뭐였지? 그리고 그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정체는?

    앤지는 며칠 전의 회상에서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수우 아주머니의 레몬파이 레시피, 종이에 그렇게 적고 난 그녀는 자수 바구니를 끌어당겨 바늘을 집어 들었다.

    장미차를 끓일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뜨거운 물에 꿀 한 수저를 탔다. 요사이 목이 살짝 칼칼해 며칠째 장미차 대신 꿀차를 마시고 있었다.

    * * *

    그날 밤 앤지는 꿈속에 있었다. 정체 모를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꿈은 아니었다. 다른 남자, 정확히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계속 듣는 꿈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봐요! 내 목소리 들려요? 아가씨!

    목소리는 예전에 처음 들었던 때보다 조금 더 선명해져 있었다. 간절함을 띤 음색은 젊은 남자의 것이었다.

    앤지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들린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꼭 감긴 두 눈도 뜨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깊은 물에 가라앉은 것처럼 몸이 무중력 상태에 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팔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내 말이 들리면 고개를 끄덕여 봐요!

    앤지는 간신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 작은 동작 하나에도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내 이름은 마르틴. 마르틴 실바입니다!

    마르틴 실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내 말 잘 들어요, 아가씨. 나는…….

    갑자기 거대한 폭발음 같은 게 들렸다.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파장은 온몸으로 전달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앤지는 눈을 떴다.

    “하아……!”

    앤지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큰 숨을 내뱉었다. 꿈속에서 내내 숨이 막혀 있기라도 한 걸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내내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뭐였지, 방금 그건. 그 남자는……?

    악몽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꿈도 아니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꿈속에 계속 나타날 수 있지? 게다가 전의 상황과 이어져서?

    앤지는 전율로 몸을 떨었다. 남자의 정체가 뭐였든 간에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째서 꿈속에서 연이어 만나게 되는지, 그 이유는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르틴 실바……? 누구지, 그 사람은.”

    앤지는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성냥갑을 찾아 책상 위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책장에서 노트 하나를 꺼냈다. 주말마다 예배당에서 만나는 이웃 사람들의 생일 날짜 명단이었다. 하지만 마르틴 실바란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바란 성을 가진 가족도 없었다. 다른 공동체에서도 그런 성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실바……. 라틴계인가?”

    블랙웰 공작가의 일꾼 중 페드로 호레이스 씨 일가만이 그녀가 알고 있는 지중해인 라틴계였다. 그리고 공작저의 던스트 부인 휘하, 시종장 야스민이 주축을 이루는 투르크계 몇 가족 외에는 모두가 코카서스 계열이었다.

    섬은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다문화 집합체였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전 세계가 휘말린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각국의 생존자들로 형성된 공동체니까. 앤지는 희미한 불빛 앞에 앉아, 자신을 마르틴이라 소개한 남자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보았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어. 카이 님처럼 풍부한 울림에 저음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공작저의 어두운 방 안에서 투병하고 있을 도련님이 퍼뜩 떠올랐다. 앤지의 머릿속은 이내 그에 대한 상념들로 빠르게 물들어 갔다. 어느덧 꿈속의 남자는 잊은 채였다.

    그녀는 램프를 입김으로 훅 불어서 끈 뒤 어둑어둑한 창가로 다가갔다. 겨울밤 달은 그날도 어김없이 밝았다.

    카이 님은 괜찮으신 거겠지……? 엄마 말씀대로라면 점점 완쾌되고 있는 거니까. 의사들이 개발한 신약이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다니까.

    앤지는 가슴 위에 한 손을 얹었다. 그 속에 조금씩 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무의식적인 몸짓인지도 몰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도련님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 같은 것에 심장이 천천히 잠겨 들고 있었다. 카이 님이 무척 보고 싶었다.

    빨리 카이 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얼굴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 주제넘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목소리만 들어도 괜찮아. 그러니 빨리 나아서 예전처럼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

    앤지는 창가에서 물러나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녀는 두 손을 기도하듯 깍지껴서 가슴 위에 올린 채 눈을 감았다.

    하나님. 카이 님이 빨리 나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빨리 나아서……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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