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0/106)
  • #10

    불현듯 깨달았다. 이 여자아이에겐 최면제 향이 듣지 않았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하기도 전에, 맑고 꾸밈없는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한 번 들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도련님? 그리고 의견을 들려주세요. 말도 안 된다, 형편없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화내지 않을게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다 듣고 난 뒤에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 왕은 비운의 공주 코델리어의 걸출한 무용담으로 해피엔딩이 되어 있었다. 뜬금없고 어이없는 듯했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나름 개연성도 갖춘 결말이었다. 다른 비극도 얼마나 엉뚱하게 코믹하고 경쾌한 결말이 되어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처음으로 레머디를 30분 만에 내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일곱 번째 여자아이는 두 시간이나 그의 방에 머물렀다. 던스트 부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다과도 동이 나 있었다.

    소녀는 한 시간 더 머물다 돌아갔다. 일주일 뒤에는 햄릿과 오디세이의 다른 버전을 끄적거린 노트를 가져와 들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레 후 그는 지나치게 독창적인 제2의 햄릿과 각색된 오디세이를 들으며 혼자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여자아이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어쩌면 들으나 마나 한, 부질없을 신상 이야기를 들려줄 때조차 그녀의 음색은 꿀처럼 달콤했고 꽃처럼 향기로웠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심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휘장 너머 자리할 때마다, 영혼은 날아오를 듯 행복하고 황홀했다. 동시에 몸은 늘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였고 그럴 때는 하체를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쿠마에의 무녀 시빌의 얘기를 들려줬을 때는 잃어버린 반쪽 영혼을 찾았다는 착각에마저 빠졌다. 영생, 그리고 유한한 것, 그 본연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스스럼없이 피력했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카일은 던스트 부인에게 소녀의 방문을 주 1회에서 3회로 늘리도록 명했다. 그의 일과에서 앤지 리즈델의 의미는 점점 더 커져 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니,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지옥 속에서 그녀의 존재는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있을 때면 시계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어떻게 그토록 시간이 빨리 갈 수 있는지. 숨만 쉬며 연명하는 하루하루가 죽을 만큼 지루하고 괴로웠지만 앤지가 오는 날만은 달랐다.

    방문일이 다가오고, 앤지가 저택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카일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설렘과 기대, 두근거림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 감정은 이내 바닥 모를 죄책감과 또 다른 고통으로 변했다. 여자아이의 존재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행복이 되려는 찰나, 그는 몇 달 만에 마주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정확히 레머디(remedy)란 무엇입니까. 만약 누군가…… 저의 레머디로 최종 선별되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왜 만약이란 표현을 쓰지? 너의 레머디는 이미 결정된 거야, 카일.

    -이미 결정…… 되었다고요?

    -네 선택은 이미 완료되었다. 앤지란 아이를 마음에 들어 했잖니. 검증 결과도 잘 맞는 편이었고, 서로 마음이 통하면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날 거야.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네 피가 그 애를 택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 에드워드는 다시 발작 상태에 빠져들었다. 카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버지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길어야 수년일 것이다.

    깊은 밤, 그는 지하 깊숙이 숨겨진 비밀 서고로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어서 장시간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레머디, 정확히는 레머디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내야만 했다. 부친 에드워드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쓰러진 후부터,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슬픔보다 더 큰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밤마다 서고의 장서들과 조부의 기록들을 샅샅이 파헤친 지 두 달, 그리고 앤지가 저택에 출입하게 된 지 석 달째 된 어느 날, 드디어 그는 레머디에 대한 실마리를 풀었다.

    유제니아 블랙웰, 그를 조산하고 죽었다던 생모 역시 레머디였다. 그녀는 아버지 에드워드의 레머디였다.

    그 외의 잔혹한 사실들,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과 앞으로 벌어질 것이라 예상되는 것들을 알아낸 카일은 서고의 장서들을 벽과 바닥에 미친 듯 집어 던졌다. 그는 한참이나 광인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울부짖었다.

    깊고도 견고한 지하의 벽은 그의 광기 어린 울분을 조용히 삼켰다. 본 저택 지하에 존재하는 ‘그것’을 알기 전이었는데도 참혹한 절망에 치가 떨렸다.

    다음 날 그는 앤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낭독 중 대뜸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서 그녀를 방 밖으로 내쳤다. 루이스는 도련님의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라 명했고 앤지는 걱정으로 침울해진 얼굴을 한 채 돌아섰다.

    카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차 쪽으로 걸어가는 앤지를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등 뒤의 심복을 향해 말했다.

    -루이스. 앤지를 이제 여기 못 오게 해. 레머디를 바꾸겠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도련님. 그 아이는 이미 레머디입니다.

    -바꾸라면 바꿔! 명령이야!

    -되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설령 에드워드 님의 명령이라 해도 말이지요…….

    -불가능하다니. 다른 레머디로 대체가 가능하잖아!

    -대체를 구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도련님. 저만큼 도련님의 체질과 잘 맞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물론, 만약을 위한 비상용 레머디는 곧 확보해 둬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저 아이가 최적입니다.

    이틀 뒤 앤지가 다시 오기 전까지, 카일은 약물 외에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잠들지도 못했다. 다음 날 방문 시간이 가까워지는 동안, 그는 하루 종일 혼자만의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틀간 그리웠던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휘장 너머 바라보고, 새소리보다 더 달콤하게 지저귀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어떻게 그 아이를 마주해야 할지 몰라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바닥 모를 죄책감과 지독한 자기혐오의 파도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다. 제 손으로 가슴을 후벼 파고 심장을 쥐어뜯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이 저주는 여기서 끝나야 돼. 내 선에서……. 차라리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제 의지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저주받은 운명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제 생사를 결정할 권리마저 빼앗긴 채, 그는 선대의 용서받지 못할 탐욕이 뿌리를 내린 저주의 굴레 안에 갇혀 있었다. 덫에 걸린 한 마리 쥐새끼보다 더 나을 게 없다.

    앤지. 넌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네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로, 절대로 이 저택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긴 상념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카일은 앤지의 뺨에서 입술을 뗐다. 그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난 달빛은 붉었다. 그리고 달빛에 반사된 카일의 옷 여기저기, 목 아래, 손등과 맨발까지 죄다 뒤덮은 피는 그보다 더 붉었다.

    또다시 유예 기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 에드워드의 발작처럼, 이제는 그가 치료를 위한 동면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부친은 말했다.

    -카일, 넌 조금씩 치유될 거야.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원했던 소망…….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블랙웰가(家)가 모든 걸 갖게 되고 세상이 이 집안의 발아래 놓이는 일은 하등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네 의지와 관계없이 묶여 버린 그 인과……. 그 약물로부터 무사히 완쾌되어 정상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란다, 카일. 내 사랑하는 아들.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장중한 어조였지만 음색은 피로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 * *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단검이 아닌가. 칼자루가 내 손 쪽으로 향하고 있다. 잡을 수 없다. 잡을 수 없다니, 눈앞에 보이는데. 이것은 눈에 보이기만 할 뿐 만질 수 없는 저주스러운 환영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만들어 낸 가짜 단검일 뿐, 단지 열에 들뜬 머리 탓인가.」

    앤지는 햄릿의 한 구절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해가 바뀌고 벌써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 둔 창 너머로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입술을 둥글게 오므려 입김을 살짝 불었다. 이내 투명한 유리 위로 뽀얗고 동그란 안개가 그려졌다. 겨울치곤 하늘이 너무 푸르고 맑았다.

    “앤지. 뭐 해? 책 읽고 있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모친 로라의 부름이 동시에 들려왔다. 그녀는 턱을 감싼 모자 리본을 풀며 활짝 열린 딸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모녀는 수우 아주머니가 갓 구운 미트파이를 식탁 한가운데 놓고 다정하게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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