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9/106)
  • #9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로 맞은 1월, 하늘은 서서히 만월의 지배하에 놓여 갔다. 달이 가득 차오르는 밤은 사위가 지독하게 고요했다.

    블랙웰 하이츠, 화려하고 장엄한 대저택에서 한 남자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올리며 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구름이 고요히 스쳐 갈 때마다 달 위의 핏빛은 조금씩 더 짙어만 갔다.

    밤의 정적을 찢는 괴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섬을 통째로 울릴 기세였지만 놀라서 뛰쳐나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산짐승들마저도 고요히 숨을 죽이고 은닉하기에 급급했다. 사람의 형체를 지닌 이들 중에 깨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또 다른 현실 속에 의식을 담그고 있었다.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 그리고 그 안의 또 다른 현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원 안에서 영혼들은 그렇게 기만되고 농락되고 유린당했다.

    “응…….”

    앤지의 의식이 현실 안의 또 다른 현실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새도 울지 않는 고요한 밤, 어디선가 기묘한 메아리가 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정체 모를 괴음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마을 한가운데, 숲 어딘가에서 희미하나마 분명히 울려 오고 있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나 부모님의 방으로 가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코까지 골면서 곤히 자고 있었다. 앤지는 잠시 망설이다 잠옷 위에 클로크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메아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앤지는 문가 신발장에서 조그만 랜턴을 찾아들고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좀 무섭긴 했지만 호기심이 그 두려움보다는 좀 더 강했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숲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 몸을 이끄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이상해. 아무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어둠에 싸인 숲 어귀에 들어서자 메아리는 뚝 그쳤다. 흡사 소리의 근원이 그녀의 침입을 알아채고 재빨리 숨을 죽인 것 같았다.

    맹수가 없는 숲은 밤이라도 위험하진 않았다. 사슴류의 초식류 동물들이 서식하는 금렵구 지역은 울창한 겨울 덤불로 둘러싸여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채 녹지 않은 눈이 앙상한 나뭇가지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바삭, 앤지의 장화 끝이 마른 가지를 살짝 밟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가 천천히 어둠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저 멀리 늘어선 나무들, 잎새 없이 텅 빈 가지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형체가 있었다.

    앤지는 소스라치게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숨을 들이켜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겨울 산짐승일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림자는 관목 덤불 뒤로 빠르게 이동했는지 더는 기척이 없었다.

    억겁 같은 몇 분이 흘렀다. 한 손에 든 랜턴에 불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앤지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움직였다. 방금 본 게 무엇이었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달빛은 안개에 싸인 듯 훨씬 엷어져 있었고, 그녀는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머리 위 어디선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울렸다. 앤지는 흠칫 놀라 발을 헛디딜 뻔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실감 나지 않았던 공포가 확 몰려왔다. 갑자기 달빛이 흐려져 사위가 더 어둑해져 있었다. 기분 탓일까. 갑자기 주변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도 같았다.

    앤지는 서둘러 걷다가 집으로 이어지는 덤불 쪽 지름길을 택했다. 그러고는 성냥을 그어 랜턴에 불을 켜곤 발아래를 비추며 걸었다. 달빛이 어두워져 어쩔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녀는 두 번째로 비명을 삼켰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완전한 암흑이 시야를 덮쳤다. 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섬에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식이었다.

    앤지는 기절할 것 같은 충격 속에서 랜턴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건 용기도, 호기심도 아니었다. 공포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이 절로 몸을 움직여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덜덜 떨리는 랜턴이 희미한 광채를 발했다. 그리고 앤지는 목격했다.

    “다…… 당…… 당신 누……”

    보랏빛 조명에 비친 남자는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 빛에 반사된 두 눈은 바다를 닮은 청회색을 띠었고, 고운 컬을 그린 풍성한 머리칼은 달빛에 반사돼 검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두 눈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수려한 얼굴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 아니었다면 여자라 착각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자가 막 입을 열 때였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숲 건너편에서 울려 왔다. 깜짝 놀란 앤지의 손은 랜턴을 놓치고 말았다. 사위는 순식간에 암흑에 뒤덮였다. 그리고 앤지의 의식도 거기서 암전되었다. 가녀린 몸이 땅에 내려앉기 직전 남자의 손이 번쩍 위로 끌어 올렸다.

    남자는 축 늘어진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두 손은 품 안의 여자를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받쳐 들고 있었다.

    행여나 떨어뜨릴까 바짝 끌어당겨 안은 탓에, 앤지의 코트 위에도 붉은 얼룩이 점점이 번져 가고 있었다. 최대한 제 옷에 묻은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피가 얼굴에까지 튀어 있진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랜턴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의 목 위만 비추고 있었다. 그의 얼굴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는 괴음이 들리지 않았다. 산짐승을 찢어발기던 부친의 정신이 이제야 돌아온 듯했다.

    달이 천천히 제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앤지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신기했다.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볼 뿐, 이렇게 가까이 보고 살을 맞대기까지 하는 건 처음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차디찬 입술이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위 눈두덩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은 창백하리만큼 하얀 뺨, 그 아래 붉은 입술에도 내려앉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찔하도록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도, 아무 인공적인 향도 없는 누군가의 살 내음이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다니.

    묵직한 슬픔이 가슴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랑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 조부와 부친처럼, 그 역시 저주받은 운명이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감정은 철저히 사치였다.

    기나긴 유예 기간이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그해 여섯 명의 소녀들이 그의 방문을 넘어섰다. 단정한 용모와 건강한 신체, 그리고 초경 이후 3년이 넘지 않은 조건하에, 수많은 여자아이 중에서도 여러 번의 꼼꼼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선별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여자아이는 전무했다.

    몇몇은 과정 중 의식이 지나치게 동화되어 자아란 것 자체가 거의 없었다. 자연히, 대화다운 대화가 되지 않았다. 기계와의 교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 주관이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아이들은 그에게 지나친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나친 호기심, 혹은 야심으로 똘똘 뭉친 꿀벌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개한 꽃잎 위에 어떻게든 내려앉아, 다디단 꿀을 한껏 빨아들여 꽃과 하나로 융합되고자 하는 꿀벌과도 같았다.

    카일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권리도 없었다. 몇 달에 걸친 혈액 검증이 끝났을 때 던스트 부인은 소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기계류는 기억만 소실된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가했지만, 피의 조화를 이룬 꿀벌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의 방문을 나서는 즉시, 지하로 보내져 ‘적절한’ 조치를 받고 레머디로서의 쓰임을 다했다. 섬의 누구도, 홀연히 사라진 딸이나 이웃집 소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일곱 번째 레머디(remedy)가 도착했다. 카일은 아무 느낌도, 감흥도 없이 노크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과거 몇 명의 소녀들이 기계 부품처럼 반응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자신의 감정이 결여되어 버린 것 같았다.

    결여? 아니야. 이대로는 완전히 말라비틀어질 거야.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이 질긴 목숨 따위 끊겨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통을 견디며 살 바에는……. 죄 없는 아이들의 양분을 빨아먹어 연명할 바에는.

    그는 진심으로 스스로의 종말을 꿈꾸었다. 그는 늘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한 개인의 미약한 심신이 버티기에, 고통은 지독하게 잔혹하고 끔찍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아이는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자신을 앤지라고 소개한 소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고 예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제가 혼자 상상해 본 이야기예요. 선한 주인공들이 죄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부당해 보여서 만약 이렇게 제대로 인과응보가 되었으면 어떨까…… 그런 상상에서 바꿔 본 거예요.

    이 애는 뭐지…….

    카일은 휘장 너머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울거리는 천 조각에 가려져 소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의식 장치에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각색하는 능력이라니……. 자아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불필요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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