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8/106)
  • #8

    아침 해가 밝았다. 앤지는 단잠에서 깨어났다. 평소처럼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수면 상태처럼 몽롱했다.

    이맘때쯤 창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새소리는 없었다.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귓전에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눈도 떠지지 않았다. 두 팔, 두 다리를 열심히 휘저어 보았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부름이 물속 파동처럼 둔중하게 울렸다.

    -이봐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처음 들어 보는 음성은 조금씩 더 또렷해져 갔다.

    -이봐. 거기 아가씨- 내 말 들려요? 내가 보여요?

    앤지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하지만 뜰 수가 없었다. 선명하던 목소리도 물속에서 뭉그러지듯 띄엄띄엄 들렸다.

    -아가씨! 내 말 들려요, 안 들려요? 내 이름은…….

    “하앗!”

    앤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너무 세게 뛰어서, 몸이 어디 안 좋은 건 아닐까- 한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낯익은 방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 박동도 조금씩 평정을 되찾아 갔다. 앤지는 가슴 한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목소리는 뭐였지……? 꿈?”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꿈이 아니라면 대체 뭐였단 말인가.

    “생일 아침부터…… 별 희한한 꿈을 다 꿨네. 무슨 징조인가?”

    앤지는 침대를 들추고 몸을 똑바로 폈다. 창 너머로, 1월 초 따스한 겨울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 안온한 햇빛 때문에 섬의 겨울은 차갑고 시리면서도 종종 온기를 머금곤 했다.

    오늘은 1월의 다섯 번째 날, 그녀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던스트 부인은 현관 앞에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배 위에 올린 몸짓은 표정만큼이나 엄숙해 보였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다, 앤지. 아직 도련님 몸살이 낫지 않으셨구나.”

    “네? 아직도 아프신 거예요?”

    그저께 월요일도 걱정하며 그냥 돌아갔는데 오늘까지 아직 낫지 않았다니. 앤지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전에 한 번, 갑자기 나가라고 발작적으로 외쳤을 때도 이렇게 며칠 내내 상태가 나쁘진 않았었다.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오늘은 내 생일인데…….

    물론 그녀가 원했던 그 특정한 선물은 좀 더 나중에 받게 될 거라 말하긴 했었다. 그래도 하필 그녀의 생일날인 오늘, 만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니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금요일까지는 괜찮아지실 테니.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거라.”

    “앗, 케이크인가요. 가, 감사합니다.”

    “이미 가족들과 케이크를 커팅했겠지만……. 특별히 준비한 에클레어도 같이 들어 있어. 그리고 이건 도련님이 준비하신 거다.”

    “네? 도련님이…….”

    앤지는 깜짝 놀라 부인의 손에 들린, 또 다른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그 특별한 요청은 이런 실재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늘 준비할 수 없을 거라는 말 또한 들은 바 있다.

    “어서 가거라. 재커리 아저씨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실례잖니.”

    앤지는 던스트 부인에게 꾸벅 인사해 보이고 마차 쪽으로 뛰듯이 달렸다. 얼떨떨한 표정에는 놀라움과 설렘, 그가 아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근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 앉자마자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 그 안에 있었다.

    “이건……?”

    유리공처럼 생긴 동그란 구체 안에는 초록색 지붕의 미니어처 집이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알록달록 예쁜 모형이다.

    “와아……. 너무 예뻐!”

    앤지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공을 들어 올리자 함박눈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유리 속에는 하나의 작은 세계가 들어 있었다. 무척 신기하고 예뻤다.

    상자 바닥에는 금박 꽃으로 장식된 카드도 있었다. 앤지는 구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카드를 펼쳐 보았다. 그림처럼 우아하고 단정한 필치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과 겨울을 사랑하는 앤지에게. 열여덟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이건 스노우볼이란 거야. 곁에 두면 1년 내내 눈을 볼 수 있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진짜 선물은 몸이 좀 나을 때까지 기다려 줘.」

    처음 보는 카이의 친필이었다. 그는 앤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것만은 앤지 자신도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웬만해선 그녀의 방문을 물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오자마자 돌려보낼 정도면 정말로 몸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이렇게 직접 축하 카드까지 써서 예쁜 공까지 준비하다니.

    앤지의 가슴에 뭉클, 파란이 일었다. 물론 공작가 도련님에게 이 정도 호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와 주는 사용인의 딸, 딱 그 정도의 호의. 까마득한 귀족 나리에다 고용주의 아들이 큰 의미 없이 베푸는 자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앤지가 받은 감동이 덜하지는 않았다.

    카이 도련님…….

    앤지는 스노우볼을 두 손안에 소중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고작 며칠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공백이었다. 도련님을 방문하게 된 이후, 사흘 이상 그를 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

    가슴이 아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이렇게나 그립다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커다란 공허함은, 제 소망이 내포한 모순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카이 님이 보고 싶었다. 휘장 너머 실루엣 외에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듣고 싶었다. 차갑고 건조하다가도 어느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게 변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그리웠다. 아주 가끔, 그가 그녀의 낭독을 따라 읊을 때마다 앤지는 그 감미로움에 눈을 감곤 했다. 안온한 그윽함이 담긴 음색은 귀에 꽃처럼 박혀 들었다.

    마차가 집 앞에 멈추자 앤지는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담한 농가 앞, 눈이 채 녹지 않은 덤불 창가에 모친의 그림자가 어렸다. 별장 일을 끝내고 돌아와 일찌감치 저녁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앤지는 마부 재커리에게 공손히 인사해 보이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진한 비프 스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있었다. 주방 쪽에서 모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머, 앤지! 왜 이렇게 빨리 왔니?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도련님이 아직도 누워 계셔서요. 심각하진 않으니 금요일에는 완쾌되실 거라고 던스트 부인이 말해 주셨어요.”

    “저런! 내일이 생일이신데 아직도 병석에 누워 계시다니- 어쩌면 좋으니…….”

    “생일?”

    앤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모친에게 보여 주려던 스노우볼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일이…… 1월 6일이 도련님 생일이에요?”

    “그렇단다. 너한테 말 안 했었니? 하긴 공작님과 도련님의 생신 모두 늘 쉬쉬하며 지나갔었지. 에드워드 님이 워낙 질색하셨으니.”

    “내일이…… 카이 님 생일이란 말이죠.”

    앤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자도 벗지 않고 망토도 그대로 두른 채였다. 우연치고는 퍽 이채로웠다. 두 사람 다, 한 해의 시작을 고하며 세상에 태어났다니.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차이는 없단다. 어차피 조용히 넘어가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니까. 금요일에 가더라도 아무 말 않고 모른 척하렴.”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그래도 생일인데…… 에드워드 님은 왜……”

    앤지는 모친에게 내내 품어 왔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섬의 모두가 그렇듯, 부모님도 공작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지만 내밀한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도 앤지 자신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계실 것이다.

    “엄마. 카이 님은…… 도련님은 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픈 걸까요?”

    “……내가 오히려 묻고 싶구나. 이젠 네가 도련님을 훨씬 자주 뵙고 저택에도 정기적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야.”

    로라는 커다란 주걱으로 스튜를 저으며 한숨지었다.

    “그 집에서 태어나 쭉 일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니. 가엾고 딱한 도련님……. 의사랑 약제사들이 몇 년째 치료약을 개발하고 있다니 그저 잘 되기만 바랄 뿐이야.”

    “엄마.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 주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뭘?”

    “카이 님 나이. 지금 몇 살이에요?”

    “전에 말했잖니, 앤지. 정말 몰라. 마님이 생전에 여럿을 낳았다가 죄다 죽고 도련님 하나 남았다는 소문만 있으니……. 너보다 한 살 많다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아아, 그렇지! 빵을 좀 구워 놓아야 하는데, 아빠 오시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앤지, 어서 손 씻고 와서 거들어 주렴.”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앤지는 엄마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넣는 동안 스튜가 눋지 않게 주걱으로 저었다. 열심히 손을 놀리면서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경쾌한 문소리에 이어 아버지 패트릭이 들어설 때까지 그녀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