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7/106)
  • #7

    앤지에게는 딱히 남자 친구라 불릴 만큼 자주 볼 수 있는 이성 친구가 없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공동체에는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나마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다닐 때는 소수의 남자애들을 만났지만 지금은 거의 접점이 없었다. 열일곱 이상의 청년들을 위한 학교는 따로 없었다. 교회 혹은 성당의 형태를 띤 커다란 예배당이 있었고, 거기서 일요일마다 자수와 책 읽기 모임이 열리는 게 다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남자애들뿐 아니라 언제부턴가…… 또래 여자아이들이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내 착각일까? 함께 자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수다를 떠는 친구들은 있는데 어쩐지 그들이 다가 아닌 것 같아. 게다가 어른들은…….

    섬사람들은 늘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늘, 서로를 아끼고 칭찬하고 뭐든 나누기를 아끼지 않았다. 등 뒤에서 헐뜯고 편을 가르거나, 혹은 드러내 놓고 저와 취향이나 의견이 소이한 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늘 서로를 향해 애정 어린 미소를 짓고 포옹하길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지나치게 화목한 그 평화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한 편의 연극 무대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선 늘 낯선 선이 느껴졌다. 지나친 선(善)이라고 표현이라 해도 될지.

    친하게 지낼 또래 남자아이도 있다면…….

    앤지의 의식은 다시 ‘성별이 남자인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엉거주춤 멈춰 섰다. 뭔가가 그녀의 뇌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쳐 갔다. 이성 친구가 없는 게 아니었다.

    앤지에게는 이미 이성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상대방은 그녀를 친구로 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휘장 너머, 서늘한 음색이 오랜 침묵을 깨고 들어왔다.

    “……앤지?”

    “저, 갖고 싶은 건 아니지만 원하는 건 한 가지 있어요.”

    “그게 뭔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카이 님이 들어주실 수는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카이 님이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내가…… 뭔가 해 주기를 바라는가 보구나.”

    그의 음색은 평소처럼 깊고 다정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속내가 잘 읽히지 않았다. 듣기 좋은 저음이 계속 이어졌다.

    “말해 봐. 원하는 게 뭔지.”

    “…….”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 혼자 단정 짓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어, 앤지.”

    “하지만…….”

    “물어볼 때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쉬워하게 될 거야. 기회를 놓쳤던 순간을 떠올리며 늘 후회하곤 하지.”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그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앤지는 저도 모르게 불쑥 말해 버렸다.

    “카이 님을……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그쪽에서 정적이 흘렀다. 숨쉬기도 버거운, 묘한 중압감이 앤지의 심장을 조금씩 짓눌러 왔다. 그것은 한 줄기 검은 강물과도 같았다. 절대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당연시하고 있던, 암흑 속 비밀의 상자를 수면에 띄운 검은 물살.

    앤지는 달싹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그러고는 제 혀로 엎질러 버린 물을 주워 담고자 애썼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시……”

    “준비해 볼게.”

    이어지는 도련님의 말에, 앤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네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

    “아……. 하지만……, 그…….”

    “수요일에 맞춰 준비하진 못할 거야. 며칠 걸릴 수도 있어.”

    “카, 카이 님.”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네? 네, 네! 그, 그럴게요.”

    “이만 나가 봐. 늦어지면 루이스가 올라올 거야.”

    이제 가 보라는 재촉에, 앤지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방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가슴이 마구 들뜨고 설렜다.

    도련님이 제 모습을 보여 주겠다니! 그녀에게! 세상에, 이게 꿈일까?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던스트 부인의 말처럼, 완전히 낫기 전까지 적어도 몇 년간은, 어쩌면 말동무를 그만두기 전까지도 영영 도련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앤지는 내면의 환호를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던스트 부인에게 인사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마차 안에 앉아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쁨으로 들떴던 감정이 가라앉자 착잡한 심경이 되었다. 맥베스를 읽을 때 도련님이 불쑥 털어놓은 말 때문이었다.

    -나도 그래. 나도 맥다프처럼……. 달이 채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났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정상이 아닌가 봐. 어머니도 결국은 돌아가시게 한 거고.

    어머니의 죽음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설령, 그의 탄생이 정말로 모친의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해도 그건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다.

    가엾은 카이 님. 너무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안에서 더 커져 가는 거겠지. 에드워드 님도 편찮으셔서 거의 만날 수 없으니…….

    그녀는 도련님이 원하는 한, 지금까지처럼 쭉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책도 읽어 주고 이런저런 속 얘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두 사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잘 통했다.

    감히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앤지는 그에게서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주제넘게 동등하다거나 남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거나, 그런 헛꿈은 꾸지 않았다. 다만 신분과 성별, 표면적인 것들과 무관하게, 서로 잘 맞게 조합된 영혼이 존재한다면 도련님과 자신이 그렇지 않을까 발칙한 생각마저 들었다.

    빨리 완쾌되어서 자유롭게 되시면 좋을 텐데. 카이 님이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

    그런 도련님의 모습을 보아야 앤지 자신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 * *

    앞으로 사흘 뒤, 앤지는 열여덟 살이 될 예정이었다. 패트릭과 로라는 무남독녀 외동딸의 생일 만찬을 사흘 앞당겨 식탁을 차렸다. 평일에는 별장 관리인 일을 하느라 귀가도 늦고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는 까닭이다. 가족 셋이 단란하게 마주한 저녁상은 앤지가 좋아하는 음식들, 특별한 공동체 경축일에만 먹는 별미로 가득했다.

    “우리 딸, 오늘 주말 모임에서 선물 많이 받았던걸?”

    “네. 아직 못 풀어 본 것도 많아요.”

    “저녁 먹고 천천히 풀어 보렴. 급할 거 없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거실 한옆에 차곡차곡 쌓인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컬리넌 섬의 만 명 남짓한 인구는 커다란 몇 개의 군락, 그 안에서도 지역별로 수십 개의 마을, 그 안에서 또 여러 개의 소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이웃들은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마을 한가운데 예배당에 다 같이 모여 생일 축하를 하고 각종 선물과 음식을 전달했다. 제빵사 토마스 아저씨가 직접 구운 생일 케이크도 그때 다 함께 나눠 먹고 촛불을 불어 껐다.

    “우와, 이거 메리네 농장 딸기로 만든 거 맞죠? 엄마표 특제 디저트!”

    앤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머니가 만들어 준 딸기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신선한 딸기를 으깨어 달콤한 아몬드 버터와 치즈크림을 버무린 필링이 기가 막혔다. 견과류를 뿌린 아이싱 쿠키에서도 고소한 풍미가 가득했다.

    세 식구는 아담한 주방 테이블에 앉아 디저트와 차를 나눴다. 머리 위로는 갓을 씌운 촛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워낙 밝아 촛불조차 켜지 않을 때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밤 열 시쯤 잠들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앤지, 도련님은 잘 케어해 드리고 있지? 요즘은 어떠신 거 같니?”

    “네, 항상 똑같으세요. 잘해 주시고…….”

    그녀는 그의 출생, 그리고 생일 선물에 대해 카이와 나눈 얘기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선물에 대한 말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그녀의 발칙한 요청을 나무라실 것 같았다. 다행히 모친은 도련님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앤지가 다음 주부터 예배당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노래로 화제를 재빨리 전환한 까닭이었다.

    “무슨 노래로 할 거니?”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어요. 바다나 밤에 대한 동요도 여러 개 있고…….”

    앤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어두운 나무숲 너머, 더 어두운 바다를 응시했다. 갑자기 경각심이 밀려왔다.

    저 바다 너머로 나가서는 안 돼. 윈드(wind)가 서 있는 곳 너머는 매우 위험해. 전에 엘리엇이란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파도에 떠밀려 온 것처럼…….

    그런데도 달빛에 비친 파도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태곳적부터 간직되어 왔을, 검은 파도는 살짝 밀려왔다 밀려나며 잔잔한 음률을 자아내고 있었다. 앤지의 목 깊은 곳에서 허밍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모르는 멜로디였다.

    “엄마. 혹시 나 어릴 때 이런 노래 불러 준 적 있어요? 아빠는?”

    앤지의 흥얼거림에, 두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노래 엄마도 처음 들어 보는데. 당신은 알아요?”

    “나도 몰라. 넌 어디서 들었는데?”

    “모르겠어요. 갑자기 기억이 났어. 이상해요, 이런 노래 배운 적 없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이상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하품이 바로 뒤를 이어 나오는 바람에, 두 분 다 그녀의 젖은 눈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늦었다. 어서 가서 자렴.”

    그러고는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해 주며, 따스하게 포옹하고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 주었다. 앤지는 기분 좋게 나른한 몸을 이끌고 제 방 침대에 가 누웠다. 잠이 막 들려는 찰나 조금 전의 그 멜로디가 다시 떠올랐다.

    이상해……. 아무도 이런 노래를 들려준 적 없는데.

    습관이란 무서웠다. 그다지 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도 까무룩 잠이 들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떠나간 바다 위 일몰,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

    봄날 초승달도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이 더욱 아름다워라.

    어딘가 정겹고 구슬픈 가락이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 사라졌다. 아련한 추억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흔적도 없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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