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6/106)
  • #6

    해가 새로이 바뀌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앤지는 불안한 가슴을 안고 다시 블랙웰 하이츠를 찾았다. 던스트 부인은 그녀를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맞았다. 앤지의 까닭 모를 심란함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휘장 너머 카일의 음색에도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도련님은 그날도 두꺼운 휘장 너머, 침대에 상체만 일으켜 앉아서 그녀가 낭독하는 맥베스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방 안에는 알싸한 유칼립투스 잎과 요크셔 티 향이 갓 구운 스콘, 비스코티의 달콤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늘 그랬듯 앤지는 한 챕터를 끝내고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은 뒤 테이블 위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비스코티 하나를 조용히 씹고 차를 몇 모금 넘기는 동안, 방 안에는 장엄한 그레고리안 챈트가 오래된 축음기를 통해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생 모리스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사들이 테 데움(Te Deum), 찬미의 성가를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도련님. 혹시 이틀 전, 제가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을 창밖에서 보고 계셨어요?

    앤지는 휘장 너머를 향해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것을 물었다.

    “카이 님.”

    언젠가부터 그를 부르는 호칭은 도련님에서 카일 님, 그리고 다시 카이 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도련님의 허락하에서였다.

    휘장 너머로는 침묵이 흘렀다. ‘나가’란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 침묵은 암묵적인 승인이었다. 계속해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든, 다른 뭔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인 것이다.

    지난달, 그는 딱 한 번 나가 달라고 말한 적 있었다. 뭔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희미한 신음이 휘장 너머로 울려 왔었다. 앤지가 카이 님, 그를 불렀을 때 도련님은 단 한 마디로 그녀의 부름을 일축했다.

    -나가. 당장.

    앤지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아주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 길로 방에서 나가 던스트 부인을 불렀다.

    부인은 황급히 도련님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고, 다른 하녀가 앤지를 서둘러 집 밖으로 내보냈다. 현관 밖으로 나서자마자 마부 아저씨가 다가와 오늘은 특별히 집까지 데려다주겠노라, 그녀를 마차에 태워 주기까지 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이는 순간, 어디선가 멀리서 비명 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초겨울 해가 부쩍 짧아지긴 했지만,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끝나 아직 땅거미가 지기 전이었다. 햇살이 잔존한 회색빛 하늘 아래,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이 앤지의 귀에 파고들었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설마 도련님? 아냐. 아닐 거야. 까마귀 울음소리 같기도 해.

    사람의 비명이라기엔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새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처연하고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 못 할 고통을 음색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밖엔 해석할 수 없었다.

    마차 안에서 앤지는 희미하게 떨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저녁을 들면서도, 그 비통했던 비명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문 너머로 들었다.

    -어제 공작저 정원에 커다란 까마귀 시체가 널려 있었다지 뭐야. 서로 물고 뜯다 죽은 것처럼 보기 끔찍하더군.

    역시 새였던가, 그제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말해. 뭐야?”

    도련님의 목소리에, 잠시 과거를 더듬던 앤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몰라서. 카이 님의 건강……”

    앤지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계신 게 맞는 거죠?”

    침묵이 흘렀다. 너무 오래 정적이 흘러서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괜한 걸 물었구나, 혀를 깨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휘장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왜……. 걱정돼?”

    기분 탓일까.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들렸다. 돌이켜 보면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더 온기를 띠어 가긴 했었다. 첫날 차갑고 건조했던 음색은 그녀의 방문이 거듭될수록 좀 더 친근하고 따스하게 변모해 왔다.

    “네. 걱정돼요.”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항상…….”

    집 안에만, 방 안에만 있어야 하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하는데. 앤지는 그 속내를 다른 말로 표현했다.

    “카이 님이 빨리 건강해지셔서 밖에 쌓인 눈도 직접 만져 보고 눈 위도 밟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눈이 정말 예쁘거든요.”

    던스트 부인의 말이 생각난 앤지는 재빨리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밤에는 나가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낮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를 수 있으니까요.”

    대답은 없었다. 혹시 공연한 말로 그를 불쾌하게 한 건 아닐까, 숨을 죽였다. 다행히 도련님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다음 챕터 계속 읽어 줘.”

    담담한 음성이었다. 앤지는 도련님의 요청에, 맥베스를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마녀들이 자신을 찾아온 맥베스 앞에 지옥의 혼령을 소환해 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는 구절에 다다를 때였다. 앤지는 피투성이 여자아이 모습을 한 혼령이 맥베스 왕의 미래를 예견하는 대목을 읽고 있었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은 맥베스를 해칠 힘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앤지.”

    그가 그녀를 불러서 낭독을 멈췄다.

    “그 여자아이 혼령의 예언……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니?”

    “네. 맥베스를 공격한 맥다프가 달이 채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결국 예언이 맞은 거죠.”

    그런데 그 예언이 왜? 앤지의 얼굴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그 의아함은 도련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나도 그래. 나도 맥다프처럼…… 달이 채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났대.”

    “…….”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정상이 아닌가 봐. 어머니도 결국은 돌아가시게 만든 거고.”

    “…….”

    “놀랐어?”

    “네.”

    앤지는 솔직하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말했다. 그런 점이, 처음부터 휘장 너머 견고한 성을 쌓고 모든 방문객을 내쳐 왔던 도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했다.

    “무서워?”

    “네……?”

    “내가 무서워? 끔찍해?”

    “…….”

    “대답해, 앤지.”

    휘장 너머 도련님의 음성에 조금씩 날이 섰다. 그 서리한 날에, 앤지의 가슴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그건 도련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산모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제왕절개로 조산한 것은 아이의 의지가 아니잖은가. 어머니의 죽음 역시 그의 죄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생명체처럼 카이 님도 자신이 태어나길 선택한 게 아니니까.

    “아뇨. 무섭지 않아요. 끔찍하지도 않고요.”

    앤지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그건 카이 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한참의 정적 끝에 도련님은 말을 이었다.

    “……계속 읽어 줘.”

    앤지는 한 번 목을 가다듬고 무릎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다시 낭독을 시작하는 그녀의 어조에 동요라고는 전혀 없었다. 다음 챕터가 거의 끝날 무렵, 겨울의 이른 황혼빛이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갈 시간이었다.

    “카이 님. 그럼 주말 잘 지내세요. 월요일에 다시 뵐게요.”

    “잠깐만, 앤지.”

    그녀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도련님이 휘장 너머에서 다소 머뭇거리는 어조로 물어왔다.

    “다음 주 수요일…… 열여덟 번째 생일 아니야?”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던스트 부인에게서 들었어. 생일 전날 여기 오니 케이크를 미리 준비할 거라고.”

    “엇, 정말요?”

    항상 엄숙하고 무뚝뚝한 던스트 부인이 제 생일을 그렇게 신경 써 주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하지만 진짜 의외는 부인의 호의가 아니었다.

    “갖고 싶은 걸 말해 봐.”

    “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뭘 좋아할지 아는 게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 상대방이 정말로 기뻐할 선물을 하는 게…… 선물로서 의미가 있으니까.”

    “어…… 하지만. 그게 저도…….”

    앤지는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특별히 갖고 싶은 건 없었다. 다른 모든 가정처럼, 그녀의 집도 소박하나마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옷은 어머니나 양장점 수우 아주머니가 늘 다양하게 만들어 주셨고 그녀가 직접 만들 원단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은 기름진 토양을 잘 활용한 농장과 해산물로 먹을 것은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도련님의 말동무 상대로 여기 오면서부터는, 구경도 해 보지 못했던 진귀한 과자와 디저트를 늘 맛보고 집에 가져갈 수도 있었다.

    “갖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잘 모르겠어요. 뭔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책인데…… 책이야 마을 도서관에 많이 있고, 특별히 부족한 것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요.”

    뭔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훗날 앤지는 이 대화를 회상하며, 자신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전율했었다. 그 한마디 말이 담은 엄청난 의미를 되새겨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이 말살되었던, 그 무시무시한 일상의 행복이었다니.

    “아, 가끔……”

    가끔 책에서 본 ‘남자 친구’란 존재에 호기심이 생길 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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