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5/106)
  • #5

    카일은 단 한 번도 이성에게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는 병으로 또래 이성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고, 최근까지 그에게 찾아왔던 소녀 중 누굴 봐도 감흥 자체가 없었다.

    처음에는 소녀들과 그 사이에 휘장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들이 그의 외모를 찬탄하며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인 이후로는 침대와 소파 사이에 휘장을 드리우게 했다. 하지만 그 때도 지금처럼 불투명하진 않았다. 상대방 쪽에서는 흐린 윤곽만 보이겠지만 그가 앉아 있는 침대에서는 방문객의 얼굴이 대략 보였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라는 것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도 미추를 분별하는 안목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소녀들의 미색은 바깥 창턱의 꽃잎에 대고 윙윙거리는 꿀벌이나 나무둥치를 부리로 쪼아대는 새들, 여름이면 숲 쪽의 개울가에서 울려 퍼지는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죽기를 원했다. 머리가 깨져 죽기를 바랄 만큼 극심한 두통에, 뼛속까지 울리는 신경통만 있는 날은 그나마 무난한 날이었다.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발작이 이어질 때는 그대로 혀를 깨물어 죽고만 싶었다.

    왜 태어나게 했는지, 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인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면 대체 죽음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그래서 일곱 번째 레머디가 들어왔을 때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다른 소녀들처럼 과한 호감을 표해서 거북하게 만들거나, 겁에 질려 벌벌 떨다가 아예 발길도 하지 않게 될 거라 믿었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아예 불투명한 휘장으로 바꿔 놓으라 던스트 부인에게 명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앤젤라 리즈델, 앤지라는 소녀만은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높은 톤인데도 무척 듣기 좋고 명료했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벨벳처럼 섬세한 음색 아래,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는 미성이었다.

    이야기를 각색해서 들려줄 때나, 책을 읽어 줄 때나 그 감미롭고 그윽한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속삭이듯 조곤조곤, 낮게 말할 때조차 귓전에 또렷하게 박혀 들었다.

    처음이었다.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휘장을 사이에 둘 때는 서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 쪽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게끔, 측면의 창과 거울의 각도를 교묘하게 조정해 두었다.

    그 결과, 다음 방문부터는 앤지 리즈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볼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쁨과 감탄은 찰나일 뿐, 후회와 절망감은 깊어지게 되었다.

    소녀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에메랄드 빛을 머금은 두 눈은 시종일관 반짝거렸고 금빛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을 머금은 듯 찬란했다. 고아한 선의 이목구비를 담은 얼굴은 무척이나 희고 투명했다. 정교하게 빚어진 밀랍 인형으로 착각할 정도의 고혹 그 자체에, 카일은 몇 번이나 넋을 잃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지 그림처럼 아름다울 뿐이었다면 감탄과 찬탄만으로 끝났을 터였다. 공연히 거울을 조정했다는 후회감도,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만져볼 순 없다는 현실에 절망할 필요까진 없었으리라.

    그저 미인일 뿐이었다면, 이렇듯 소녀와 좀 더 가까이하고 싶은 갈망에 시달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이렇게나 깊이 매료되어, 전신에 열이 나고 가슴이 후끈대다 못해 그 열기가 하체에까지 옮겨가진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가슴이 울렁거리다 못해 호흡조차 버거웠다.

    저 아이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눈앞에서 볼 수만 있다면.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극상의 비단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뺨과 입술의 감촉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면. 그리고 백조의 목처럼 가늘고 매끄러운 목 아래, 레이스 사이로 굴곡진 가슴까지…….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동시에 다리 사이에 찌릿, 묵직한 통증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아픔은 이내 뜨거운 열감으로 변해갔다. 카일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흐린 윤곽만 남은 휘장 너머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앤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고대 신화집을 소리 내 읽어 주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고 책장을 파삭, 넘기는 순간 카일이 말했다.

    “그만.”

    마음과는 달리 무뚝뚝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하지만 앤지는 그 냉정한 어조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을 내려놓으며 온화하게 물었다.

    “그럼 다른 걸 읽을까요? 음, 오늘 가져온 것들은…….”

    “책으로 읽지 말고 네가 기억하는 얘기를 들려줘.”

    그녀가 책에만 시선을 박고 있는 게 싫었다. 자신을 봐주길 원했다. 비록 휘장 너머, 흐린 실루엣만 쳐다보고 있게 되겠지만 적어도 종이 위 글씨가 아니라 저에게 집중하게 되는 건 맞으니까.

    “음…… 어제 도서관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읽긴 했는데요. 도련님, ‘쿠마에의 무녀(Cumaean Sibyl)’ 이야기 알고 계세요?”

    “아니.”

    “그리스에서 시빌, 혹은 시빌라라고 불리는 예언자 무녀 중 한 명의 이야기예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담’에 나오는 일화인데요……”

    살짝 열린 창 앞의 녹색 커튼이 부드러운 바람에 하늘거렸다. 앤지는 한 손을 팔걸이에 얹고 상체를 기울여 휘장 너머 그의 윤곽을 응시했다.

    “아폴론 신이 아름다운 무녀인 시빌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지게 됐대요.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뭐든 말하라고 했지요. 그러자 시빌이 모래를 한 손 가득 쥐고, 이 모래알의 수만큼 생일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청했답니다. 영생을 얻는 게 소원이라 시빌이 대답했다고 해요. 아폴론은 그 소원을 들어주어 그녀에게 천 년의 삶을 선물했어요. 하지만 그 때문에 시빌은 천 년이 넘도록 죽지도 못하고 조금씩 소멸해가는 끔찍한 생을 누리게 된 거죠.”

    “그렇겠지. 천 년 동안 죽지 않고 늙어가기만 한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테니까.”

    “맞아요! 그래서 시빌도 유리병 속에서 갇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면서 제 어리석음을 한탄해요. 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젊음을 달라고 했어야 했다고……”

    앤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저는 그 얘기를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영생 자체가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할까, 그런 생각요. 책에서 보면 흡혈귀나 어떤 존재는 늘 인간이 되어 유한한 생을 꿈꾸길 바라잖아요.”

    달칵, 잔이 받침에 내려앉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만약 아폴론 신이 저에게 와서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주겠다고 한다면? 그럼 난 어떻게 할까, 상상해봤어요. 처음에는 당연히 기뻐하며 덥석 받을 거라 생각했죠. 당연히 죽는 건 싫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과 헤어지는 것도 슬프고,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생에 대한 미련이 강할 테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결국 받지 않을 것 같아요.”

    앤지는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만물은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자연도 영원하지 않잖아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모되어 변화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핀 꽃이라도 생명이 다하면 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꽃이 다시 피어나고……. 그게 섭리인 것 같아요.”

    “결국 불사는 의미가 없다- 그 뜻인가?”

    “네. 물론 영원한 삶을 욕심내고 쫓으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아, 차가 다 떨어졌어요. 아래층에서 다시 끓여올게요.”

    앤지는 텅 빈 티포트를 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은 휘장 너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른 때였다면 설렁줄을 당겨 메이드를 시키라고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문이 닫히고 나서도 앤지의 윤곽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 속 어딘가 꿈틀, 움직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하고 믿는 바를 다른 이, 그것도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기분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안타깝고 슬픈 감동과 감격, 그 어딘가에 심장이 멈춰버린 듯했다.

    앤지. 너는 역시…… 특별해. 나와 닮았어. 오래전 하나였던 심장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가 다시 맞물린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티포트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젖은 눈가를 훔치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열기는 늘 그랬듯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를 만지고, 입 맞추고, 끌어안고, 그리고 그 이상의 행위까지 이어가고 싶은 열망을 그저 억누르고 또 누를 따름이었다.

    그래서 앤지가 시간이 다 되어 저택을 나설 때가 되면, 아쉬움에 심장이 에일 듯 아프면서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지독한 열기와 욕정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가다 카일은 끝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창가의 커튼 너머 몸을 숨긴 채, 그녀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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