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3/106)
  • #3

    “음……. 브리타니아란 이름 자체는 1차 전쟁 이후 통합돼 사라져 버렸지만 제일 유명했던 이야기들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까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모두 행복한 결말로 바꿔 봤어요.”

    대답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고……? 그 걸작들이 걸작들인 이유는 비극이기 때문이야. 멋대로 엔딩을 바꾸다니.”

    “제가 혼자 상상해 본 이야기입니다. 선한 주인공들이 죄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부당해 보여서 만약 이렇게 제대로 인과응보가 되었으면 어떨까…… 그런 상상에서 바꿔 본 거예요.”

    앤지는 용기 내어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았다.

    “한 번 들어 보지 않을래요, 도련님? 그리고 의견을 들려주세요. 말도 안 된다, 형편없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화내지 않을게요.”

    “화내도 상관없어.”

    네까짓 게 화를 내 봤자지. 깔보는 어조에 앤지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도련님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얘기해 봐. 정말 말도 안 되게 엉망으로 꾸며 냈으면 이 방에서 바로 나가야 돼.”

    “네, 도련님.”

    앤지는 쫓겨날 수 있다는 걸 각오하며 천천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다행히 소년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방에서 나가라고 일갈하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맑고 행복했던 소녀, 고귀하고 불행한 소년은 그렇게 서로를 만났다. 만약 소녀가 제 허구의 산물을 그렇게 쉽게 입 밖에 내지 않았더라면. 내성적이고 조용한 평소 외면처럼, 실제로도 겁이 좀 더 많았더라면.

    그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거짓 행복에 눈이 멀어 평생을 그렇게 평온하게 살았을지도 몰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앤지는 가끔씩 이 첫 만남을 반추할 때마다 가슴이 저릿한 고통을 맛보았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뻔히 알고 있는 이 순간 다시 시곗바늘이 뒤로 돌고 돌아 그 시점으로 되돌아간다면 과연 어떨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게 되리라. 휘장 너머 매혹적인 목소리가 소녀에게 가했던 영향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 그리고 그렇게 되었어야만 해. 거짓 행복 속에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망상을 깨부수고 각성해 죽음처럼 비참한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게 훨씬 나았다. 싸우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건 너무 쉬운 선택이다.

    * * *

    그날 밤, 컬리넌(Cullinan) 섬을 둘러싼 바다에는 광풍이 몰아쳤다. 열아홉, 막 성인이 된 엘리엇은 젊은 혈기에 넘쳐 있었다. 그는 늘 바다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었다.

    쾌활하고 호전적인 다혈질 청년에게 이 평화로운 섬은 너무도 좁았다. 숨 막히도록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야심과 기개를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 전, 아버지는 엘리엇을 향해 일갈하며 나무라기 바빴다.

    -엘리엇. 허튼 생각은 그만둬. 이 섬은 그 끔찍한 2차 대륙전 직후 유일한 생존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야.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라고! 바다 건너에는 끔찍한 것들이 있어. 그게 괴물이든, 전쟁 중 생체 실험으로 이상하게 되어 버린 괴생명체들이든, 진실은 하나란다. 이 섬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 모두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블랙웰가의 보살핌 속에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단 말이다.

    -그래, 엘리엇. 제발 아버지 말씀대로 얌전히 있으렴. 다음 달부터는 공작님 영지의 양조장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잖니. 성실히 잘 배우고 일하면 양조장 관리인 자리도 될 수……

    -난 그까짓 양조장 관리, 관심도 없어요! 두 분 다 여기 처박혀 사는 게 그렇게 좋으면 그렇게 하세요! 난 내 맘대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요!

    엘리엇은 손재주가 무척 좋았다. 그는 농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곡물 창고에서 들여다본 책으로 나무배 한 척을 완성해 냈다. 꼬박 반년 넘게 걸린 대작업이었다. 적정 거리 안에서 낚시를 하는 고깃배들은 여러 척 있었다. 한 척 슬쩍하면 좋았겠지만 모두 선착장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여서 그러기엔 여의치가 않았다.

    그는 적당한 때를 엿보다가, 파도가 완만한 밤에 거사를 실행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엘리엇은 자정이 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으슥한 남쪽 해변까지 배를 끌고 나왔다. 달빛이 희뿌옇게 내리비치는 섬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예상대로 섬을 둘러싼 안개가 자욱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본래 해무(海霧)란 것은 암초나 다른 배와의 충돌 때문에 위험한 것일 뿐,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해역 바깥에선 안개에 시야가 막혀 섬을 볼 수 없겠지만 그 반대는 상관없다.

    만에 하나 암초에 부딪혀 배에 구멍이 생기면 재빨리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는 수영에 매우 능했다. 안개가 만든 경계는 좁으니 그 안에서 해변가까지 헤엄쳐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읏차……!”

    엘리엇은 배를 수면까지 힘껏 밀었다. 조각배는 생각보다 물 위에 잘 안착했다. 균형을 잃지 않고 똑바로 뜨는 모양새가 나름 튼튼해 보였다.

    “비상식량과 물도 든든히 챙겼겠다, 이제 항해를 시작해 보는 거야.”

    엘리엇은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는 순조롭게 잘 나아갔다. 세 시간 안에는 돌아올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세 시간만 꾸준히 항해해도 뭔가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조금씩 항해 시간을 더 늘리고 더 멀리 나가다 보면 다른 섬이나 육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연하지.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이게 세상의 다일 리는 없어. 이렇게 종말을 맞을 리가 없다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섬 안에서만 살아왔다. 먹을 것은 늘 풍족했고 마을 사람들은 지극히 선했으며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매일매일 항상 똑같고 너무 따분해요, 바다 건너에는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 엘리엇이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부모님은 늘 말했다.

    -엘리엇. 넌 모른다. 지금 네가 누리는 그 따분함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 그 끔찍한 전쟁 직후, 블랙웰 공작님은 안전한 이곳을 발견해 생존자들을 여기 모아 이렇게 풍요롭게 잘 살게 해 주셨어. 우리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공동체야. 언젠가는 섬 바깥의 세상도 안전해져서 멀리 나갈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 엘리엇. 너도 알잖니? 블랙웰 일가가 기술과 장비를 총동원해 바깥으로부터 이 섬을 지켜 주고 있어. 그뿐이니? 세상이 안전한지 어떤지, 윈드(Wind) 같은 걸 개발해서 바깥세상의 동향을 살펴 주고 있잖니!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에드워드 님이 어련히 우리에게 바깥으로 나가라고 알려 주실 거다.

    엘리엇은 부모님의 훈계를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달빛만이 가득한 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윈드의 거대한 기둥이 윤곽을 드러냈다. 외부와의 격리를 상징하듯 커다란 기둥처럼 만들어진 윈드는 수면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길고 커다란 기둥 위, 바람개비 모양의 팬을 천천히 돌리는 기둥은 부표처럼 50미터 간격으로 안개 낀 수면 위에 자리했다.

    고깃배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윈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선과도 같았다. 나가는 즉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엘리엇은 노 젓는 동작을 조금씩 늦췄다.

    윈드 옆을 스쳐 갈 때는 좀 무섭기도 했다. 동시에 짜릿한 쾌감과 스릴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밀을 발설하고 금기를 깨는 데서 오는 일그러진 환희였다. 하나의 공동체가 굳건히 지켜 왔던, 가장 크고 가장 은밀한 규율의 족쇄를 스스로 파괴하고 뚫고 나가는 통쾌함이기도 했다.

    “하하…… 이렇게나 간단한 것을. 이렇게 쉬운 것을, 그동안 왜 감행할 수 없었는지. 다들 겁쟁이야, 겁쟁이라고.”

    엘리엇은 나직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조각배의 후미가 윈드의 기둥 옆을 막 스칠 때였다. 용감한 항해가 비로소 시작되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와 같이 담대한 용기를 갖춘 자에게만 허용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바깥에 뭐가 있긴 뭐가 있어! 저것 봐, 그냥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 으악! 아악!”

    뭔가가 배 위로 펄쩍 뛰어오르며 뭔가를 크게 휘둘렀다. 그의 들떴던 목소리가 이내 비명으로 바뀌었다. 비명은 곧 살려 달라는 절규로 바뀌었다. 크게 홉뜬 눈앞에 피가 튀었다. 엘리엇 자신의 피였다. 유유자적, 바다 아래를 관망하던 달 위로 피가 물보라처럼 튀었다.

    붉은 피를 머금은 보름달은 이내 적월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비바람이 무섭도록 몰아치기 시작했다. 잔잔하기 짝이 없던 파도도 질세라 광풍에 몸을 싣고 요동을 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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