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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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앤지?”

    던스트 부인이 3층 계단 위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부인. 죄송합니다!”

    다시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는 동안, 앤지는 그 섬뜩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감정이 일절 깃들어 있지 않던 얼굴은 가족 초상화라기보다 장례식용 그림에 가까웠다.

    그리고 또 하나…….

    앤지는 여집사를 따라 3층 복도를 걸으며 뒤늦게 한 가지 사실 또한 인지했다.

    죽은 유제니아 공작 부인, 그러니까 카이 도련님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벽 어디에도 없었다. 사진과 초상화, 어떤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앤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일러두마.”

    “네, 부인.”

    던스트 부인의 눈이 엄격하게 빛났다. 그 위압감에 앤지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도련님께 쓸데없는 말은 절대 삼가도록 해라. 첫날은 가급적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앤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녀는 호기심이 많기는 해도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마을에서도 나이보다 성숙하고 사려 깊은 아이라는 평판이었다.

    별관의 지하는 수십 개의 미로로 이루어진 하나의 비처(泌處)였다.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은 미로 가장 안쪽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문 앞에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자물쇠가 빈틈없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실내는 감옥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은 특급 호텔 객실과 다를 바 없이 모든 면에서 안락하고 쾌적해 보였다.

    에드워드는 사슬에 각각 한 손과 한 발이 묶인 채 몽롱한 눈을 떴다. 이번 발작은 꽤 길었다. 그리고 매번 길어지고 있었다. 결코 좋은 징조일 수 없었다.

    그는 단단하게 묶인 손목을 움직여 벽에 드리워진 줄을 당겼다. 건장한 청년이 즉시 들어와 결박을 풀어 주었다.

    “제롬. 며칠이나 지났지?”

    “예, 주인님. 오늘이 닷새째입니다.”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그는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채 주인의 다음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닷새. 닷새째라.”

    “조금만 견뎌 주십시오. 주인님을 위한 레머디가 내일 도착합니다. 그러니 부디, 사슬을 끊고 저택 밖으로 나가시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 주셔야 합니다. 요즘은 수면제도 잘 듣지 않아 섬의 다른 약초들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잘 참아 보겠다.”

    열흘이 넘어가면 위험해진다. 그때야말로,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육신을 이 지하 요새에 구금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완전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버리면 누굴 해치든, 이 저택을 홀랑 불태워 버리든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다. 에드워드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아들. 그의 유일무이한 가족이자 혈연.

    “카일은……?”

    “방에 안전히 잘 계십니다. 방금 도련님의 일곱 번째 레머디가 도착했습니다.”

    “두 달 전이었지? 여섯 번째가 아웃된 건……. 가엾은 아이 같으니. 이번엔 몇 살이지?”

    “열여섯입니다. 매우 건강합니다.”

    에드워드는 제롬이 가져온 베드 트레이 위 물병을 집어 들었다. 발작 뒤에는 어김없이 타는 듯한 갈증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제롬.”

    “예, 주인님.”

    “여자가 필요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은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로 방을 나섰다. 에드워드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흑발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림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아래, 입술을 비틀리며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괴감, 허망함, 스스로의 동물성을 향한 경멸의 웃음이었다.

    여자가 도착하면 이 상태로 아랫도리만 드러낸 채 허리를 흔들어야 하겠지. 빌어먹을…….

    어떤 상황에서든 먹고, 자고, 적당한 주기로 몸 안에 쌓인 것들을 비워 내야 하는 생리적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속에서 뜨거운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아들 카일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이 저택을 통째로 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의 선대들의 끔찍한 욕심과 헛된 망상에는 한 줌의 재, 그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 * *

    일곱 번 째 레머디(remedy)가 블랙웰 3세의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앤지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침실은 책에서나 보던 동화 속, 왕궁 같았다. 공주의 방처럼 아기자기 예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사치스러움과 중후함이 방 전체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앤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실내의 미관이 아니었다. 물론 압도적인 우아함과 화려함도 탄성을 자아냈지만, 등에 오소소 전율이 돋게 만든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방은 궁전같이 꾸며진 동굴 같았다. 길고도 높은 한쪽 벽에 두꺼운 커튼이 촘촘히 드리워져 있었다. 정말로 기묘했다. 밖은 환한 햇살이 반짝이는 늦은 오후인데, 방안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묘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벽 곳곳에 자리한 공예품 램프만이 실내에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도련님.”

    앤지는 휘장이 드리워진 높은 침대를 향해 더듬더듬 말했다. 상대가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

    휘장 너머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던스틴 부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

    앤지는 침대 가까이로 다가갈지 말아야 할지 모른 채 입술만 달싹였다. 혹시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던스트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잠시 밖에 나갔다든가. 아니면 욕실에 있을지도.

    그 순간 앤지는 깜짝 놀라 신음을 토할 뻔했다. 휘장 너머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그녀의 두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와서 앉아.”

    “……네? 네.”

    “너무 가까이는 안 돼. 창 옆에 앉아.”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굵은 저음은 사춘기 특유의 감성을 담고 있었다. 변성기가 지났거나 그 한가운데 있는, 차갑고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앤지의 가슴이 묘한 박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주춤주춤 의자에 앉았다. 침대와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목소리가 또렷이 들릴 정도는 되었다. 휘장 하나가 소리 없이 젖혀지며 인영이 보다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누구야, 넌.”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차디찬 음성이다. 흡사 베일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앤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카일렉 도련님은 몸이 좋지 않으시단다. 피부가 너무나 민감해서 햇빛을 쬐어서도 안 되고 몸이 불편해서 밖에 나갈 수도 없어. 그러니까 또래 친구가 필요한 거야. 가끔 찾아와 바깥 이야기를 해 주고 책도 읽어 주는 등, 말동무를 해 줄 친구가 필요해.

    어머니 로라의 조언이 새삼 떠올랐다.

    -하지만 도련님은 너무 오랫동안 아프셔서 극도로 예민하단다. 아주 까다롭고, 어쩌면 조금은 널 고약하게 대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이해해야 돼, 앤지. 넌 아주 건강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모두 블랙웰가의 은혜를 깊이 입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지.

    “내 말이 안 들려?”

    칼날같이 날아오는 힐난에 앤지는 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네? 죄, 죄송……해요. 제 이름은 앤지 리즈델입니다. 앤지라고 부르시면 돼요.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쪽 해변에 위치한 노스쇼어 별장의 관리인 부부 패트릭 리즈델과 로라 리즈델입니다.”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이쪽에서는 상대방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면, 보일 듯 말 듯 너울거리는 휘장 너머에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낱낱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휘장 천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니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뭐 하러 왔어, 여긴.”

    앤지는 다시 침을 꼴깍 삼켰다. 몸이 아파 어두운 방안에만 갇혀 살다시피 하는 열일곱 살 소년- 그에게 가장 좋은 위로가 될 만한 것은 뭘까?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고 즐겁게 해 줄 수 있을는지.

    오늘부터 일주일에 한 번, 카일렉 도련님의 말동무가 되어 주러 가렴- 어제 모친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로부터 지금까지, 앤지는 나름 열심히 고민했었다.

    노래나 춤에는 딱히 재주가 없었다. 바느질과 자수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도련님에게 선보일 자랑거리는 못 된다. 더구나 블랙웰 공작가의 자제처럼 지체 높은 신분 앞에서는. 폭소를 자아낼 만큼 재미난 농담을 알고 있지도 않다.

    “이야기를 들려드리러 왔어요.”

    “……무슨 책.”

    시시하기 짝이 없군,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앤지는 씩씩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래 봤자 상대방에게는 가녀린 속삭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용기를 내 보았다.

    “책은 이미 많이 갖고 계셔서 책을 가져오진 않았어요.”

    “…….”

    “제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요.”

    “…….”

    휘장 너머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앤지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들로 아이들에게 동화 구연을 해 주는데 반응이 꽤 좋아요.”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아, 혹시 어린애들과 동격 취급받았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을까? 앤지는 재빨리 덧붙였다. 초면부터 도련님을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저…… 아이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어른들도 무척 기발하고 재미있다고 하셨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만들어 낸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살짝 비틀어서 다른 결말로 개작한 것들도 있어요. 브리타니아 소설들은 한 번씩 다 바꿔 봤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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