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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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로 신이 쿠마에의 무녀, 시빌에게 물었다.

    “무녀여, 이 아폴로 신이 너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 무엇을 원하느냐?”

    “제가 움켜잡은 이 먼지알만큼 많은 삶을 저에게 주십시오. 무한히 오래 살고 싶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영생, 불멸의 생을 얻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마.”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unt: Sebulla pe theleis; respondebat illa: apothanein thelo.

    “시빌, 어쩌다가 그렇게 늙어 쪼그라들어 조그만 유리병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니? 너는 그런 상태로 계속 사는 것에 만족해?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말해 보렴.”

    “나는 죽음을 원하노라. 내가 어리석었다. 영원한 젊음 없이 그저 영생만 원한다고 한 결과가 이것이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육신은 노쇠에 노쇠를 거듭하여,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대로 죽기를 원한다. 나는 죽음으로써 안식을 얻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노라.”

    -T.S. 엘리엇 <황무지(The Waste Land)> 중 ‘For Ezra Pound, il miglior fabbro’

    파란만장한 한 편의 역전극 같았던 자신의 업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밟아 온 여정이 흐린 기억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 공작은 3층 테라스에 앉아 코담배를 즐기다 나지막하게 한숨지었다.

    머리 위로 바다 같은 하늘이, 창 너머로는 하늘 같은 바다가 주름진 눈을 시리게 했다. 노인은 느긋한 얼굴로 남대서양 특유의 기후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푸른 안개 같은 눈동자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기품과 온화함으로 가장된 눈 속에는 바닥 모를 야욕과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도 내밀한 그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와도 같았다.

    존은 창에서 시선을 떼고 의자를 빙글 돌렸다. 짙은 눈썹 아래, 그보다 더 짙은 파란 눈이 거실 안쪽을 향했다. 그가 앉은 테라스와 안쪽 거실을 이어 주는 클램쉘 도어는 활짝 열려 있었다. 보모가 거실 안쪽에서 제 손주들의 요람을 조심스럽게 흔들며 낮게 자장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아가야.”

    그는 멀리서 그들을 불렀다. 모깃소리만큼 작은 속삭임이라 보모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다 살았다.”

    노쇠함으로 푹 들어간 뺨처럼 한숨이 살짝 깃든 음성이었다.

    “일국의 왕이 부럽지 않을 재력과 힘. 모든 게 다 있는데……. 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날 날이 머지않았구나. 이렇게 모든 게 다 있는데 말이다.”

    그의 주름진 눈이 다시 창 너머, 천혜의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과 비옥한 토양,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그의 소유였다. 식솔과 일꾼들이 채 200명이 되지 않는 이곳은 블랙웰 경의 사유지였다.

    종전 전후, 전쟁과 전쟁 사이, 구대륙과 신대륙의 식민지, 광산 채굴, 군수업 등에서 긁어모은 막대한 재산은 그 어떤 일도 가능케 만들어 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철저한 베일 너머 가릴 힘이 있었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타고난 돈의 지배자였다.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가는 사업, 특히 불법적인 일들은 손대는 족족 황금알을 낳기 바빴다.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졌는데.”

    존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언제까지나 되풀이되는 오르골의 음악 소리 같았다. 그는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살 만큼 살았다고 여한이 없는 건 아니다.

    “영생만 없구나. 하하……. 이렇게 비통할 데가. 아무리 많은 걸 가졌어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이것인가. 대자연의 섭리 앞에 나 역시도 한낱 나약한 인간일 따름인가.”

    노인의 가슴 속에서 울컥, 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머리로는 인지한다 해도 역시 본능은 그 자연의 법칙에 반하고 싶어진다.

    “아가야.”

    그는 다시 손주들 쪽을 돌아보았다. 아들 에드워드로부터 태어난 한 쌍의 생명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보모가 요람 위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억울하지. 안 그러냐?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하얗게 바랜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신을 거역해 보려고 한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남대서양 갈매기들이 쏴아,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먹구름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멀리서 우르릉, 쾅, 뇌우를 알리는 불길한 울림이 섬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할애비는 이미 늦었지, 아쉽게도. 그렇다 해도…… 내 피가 흐르는 나의 후손들…… 너희와 이 가문의 영속을 위해 감행해 보려 한다.”

    그는 지팡이를 찾아 쥐고 테라스 의자에서 일어났다. 점점 운신하기 어려워지는 몸을 이끌고 지하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나의 요새 성처럼 지어진 대저택은 비밀 통로가 수십 곳도 넘었다. 그중, 오랫동안 한 번도 출입하지 않은 곳을 향해 공작은 걸음을 옮겼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땅속은 한겨울처럼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한 발짝, 한 발짝 뗄 때마다 블랙웰 경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트리에스테는 물론, 빈터가르와 비첸틴, 하이랜드의 국왕, 심지어 아제르반의 악명 높던 해적들 앞에서도 긴장 한 번 하지 않던 그였다. 두려움이란 감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수십 년의 시간이었다.

    이제 그 찬란하고 사악했던 시간을 뒤로한 채, 존 피츠로이 블랙웰은 두려움의 전율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세상의 금기를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문이 끼익, 연옥의 비명을 내지르며 열리고야 말았다.

    에드워드, 그리고 그 후손들. 너희의 영원한 왕국을 내가 이 손으로 만들어 보이겠다.

    * * *

    18년 후.

    울창한 너도밤나무들이 절로 울타리를 만들고, 자줏빛 리아트리스가 대서양 기후 아래 꽃들과 어우러져 천연 정원을 조성하고 있었다. 신들의 정원- 모두가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앤지는 흰 리본을 두른 모자의 차양을 조금 위로 밀어 올렸다. 햇살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걸 보면 이제 가을도 끝물인 것 같았다.

    블랙웰 힐 꼭대기, ‘블랙웰 하이츠’라고도 불리는 공작저 영지는 무척 크고 넓었다. 웅장한 게이트를 통과하고도 메인 저택까지는 한참 더 가야 했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신들의 정원이란 별칭처럼, 햇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초목과 꽃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너도밤나무 숲 안쪽에 도착해 있었다. 거대한 고딕 양식 저택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휴우…… 다 왔다.”

    앤지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미풍에 살짝 나부꼈을 뿐, 옷매무새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의 단정함 그대로였다.

    앤지는 모자이크 돌바닥을 걸어서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현관 앞에 가 섰다. 그러고는 무거운 문고리를 들어 올려 간신히 두 번 두드렸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채가 바람결에 발랄하게 흔들려 댔다.

    문이 끼익, 열렸다. 문만큼이나 단단한 얼굴의 여인이 앤지를 맞이했다. 그녀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을 루이스 던스트 집사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던스트 부인. 저는 앤지 리즈델입니다.”

    “그래, 반갑구나.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던스트 부인은 앞장서서 3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블랙웰가(家)의 본 저택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저택 안은 익히 들었던 대로 입이 떡 벌어질 규모와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구석구석 모든 곳에 억지스럽지 않은 품위가 깃들어 있었고, 고풍스러운 동시에 우아한 장례식장과도 같은 경건함이 공기 중에 흘렀다.

    두 사람은 곳곳에 꽃과 이국적인 공예품으로 장식된 살롱을 한참 지나서야 계단참에 이르렀다. 계단 위에까지 드리워진 붉은색 양탄자는 그림 같기도 하고, 이국의 상형 문자 같기도 한 정교한 무늬로 직조되어 있었다. 어찌나 두텁고 푹신한지, 발소리를 죄다 흡수해서 계단을 오르는 기척은 앤지 본인의 귀에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2층에 다다른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3층까지 이어진 천장, 까마득히 높은 곳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밤이 되면 과연 어떤 신비한 빛을 흩뿌릴지 궁금했다. 던스트 부인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앤지는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후다닥 따랐다. 두 사람은 마침내 3층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계단 위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앤지는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고급스러운 초상화가 벽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각 프레임에 담긴 얼굴이 제각기 다른 듯 조금씩 닮아 있었다. 블랙웰 가문의 일원, 보다 정확히는 도련님의 조부 고(古) 존 피츠로이 블랙웰의 직계 혈족이 분명했다.

    존 피츠로이 블랙웰 옆으로, 17년 전 병으로 죽었다던 장남 헨리 데이빗 블랙웰, 역시 병으로 저택에 두문불출 요양 중이라는 에드워드 리암 블랙웰로 추정되는 청년의 초상도 걸려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신사와 귀부인, 젊은 여자들의 그림이 더 있었다. 그리고 계단 중간쯤에는 매우 귀여운 남자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도련님이구나.

    앤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초상화 속 아이는 흑발 고수머리에 수정처럼 파란 눈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십 대 중반이라 했으니 오래전의 그림일 것이다. 인형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기묘했다. 아이 같지 않은 섬뜩함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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