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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61화 (161/163)

161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데이빗은 루만의 오른쪽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나 없는 동안 돈 쓰느라 고생했어, 루만.”

“형님…… 그게 말이죠.”

“더는 말하지 말거라. 내 선택에 번복된다면 귀족으로서 자존심이 금이 가는 것이니.”

루만도 잘 알고 있다. 자존심이 짓밟히느니 죽을 거라고 말하던 데이빗이다.

그렇지만 그런 형에게도 바이올렛은 예외다. 그녀의 동정심을 사서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참고로 바이올렛한테 이야기하지 마. 그녀는 지금 몸이 좋지 않거든.”

“예?”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멍청하게 “예?”라고 되물었다. 루만은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는 상상을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바이가 임신을 했거든.”

“예?”

“루만.”

“축하드립니다. 형님, 하하.”

“바이올렛과 내가 죽더라도 후계자는 우리 메이가 될 거야. 그러니 허튼 생각은 꼭 버리면 좋겠구나.”

데이빗이 말하던 걸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리고 최악이지만 나도 죽고 바이올렛과 배 속의 아이가 죽고 마지막에 남은 우리 메이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카르펜 제국은 시리우스 제국의 속국이 될 거다. 이미 내 사위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다시 공작이 될 거라는 꿈조차 가지지 말라는 뜻이다.

“루만, 돌아가. 메릴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돌봐 줄 테니.”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메릴을 보게…….”

쾅!

책상에 매섭게 보던 서류를 내려놓은 데이빗은 루만을 향해 냉정히 말했다.

“안 돼.”

루만은 데이빗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힘없이 돌아 나갔다. 흘러나오는 눈물만이 그의 슬픔을 위로했다.

*

“메이……, 우리 아빠는?”

“지내시던 곳으로 돌아갔어.”

기도하듯 손깍지를 끼고 애타는 눈동자로 불안해 보이는 메릴을 향해 메이아는 물었다.

“언니, 꽤 불안해 보이네.”

“메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언니, 불안해?”

불안하냐고 계속 되묻는 메이아에게 메릴은 눈물 흘리며 말했다.

“흑…… 흐읍, 불안해. 맞아! 나 너무 불안해! 무서워!”

메릴의 대답에 메이아는 활짝 미소 지었다.

“왜 웃는 거야? 지금 내 꼴이 그렇게 우스워?”

“언니, 정말 무섭고 불안해?”

메릴은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메이아의 눈치를 봤다.

“자꾸 왜 불안하냐, 무섭냐,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건데?”

“확인하기 위해서.”

“뭘?”

“언니가 불행해질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명예를 잃는 것.

그리고 점차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급기야 앞으로의 일에 공포를 느낀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불행에 힘들어했으면 좋겠어,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메릴은 메이아의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 속에 있는 차가움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난 충분히 언니에게 기회를 여러 번 주었고 언니는 그중에서 선택했잖아.”

“무슨 기회를 줬고 내가 무슨 선택을 했다는 거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

자리에 일어선 메이아는 메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잉크병을 하루에 다 써.”

“갑자기 왜 잉크병 이야기야?”

“기사들의 손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처럼 나 또한 손에 잉크에 마를 날이 없었어. 종이 위 잉크가 굳어 갈수록 내 마음도 굳어 갔지.”

글씨를 쓰다 손이 떨려도 내가 해야 할 업무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잉크 냄새가 손에 배어도,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겨도 난 참았어……. 그렇게 10년을.”

배움의 어려움과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며.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10년이었지. 그리고 언니는 내 노력과 무관하게 손쉽게 내 자리를 가져갔어. 사람들에게 동정받게 만들고, 내 자존심을 밟아 놨어.”

“메이아, 그건 내가 널 질투해서 벌였던 실수야……. 미안해.”

“언니는 이 상황에서도 실수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구나.”

“미안해. 메이아, 용서해 줘.”

메이아의 입술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눈을 깜박였다.

“언니의 아이는 안타깝지만 사생아로 쿠룬달스 백작가의 후계로 자라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사생아라니! 하츠벨루아가의 핏줄이야!”

“우리 가문의 핏줄이라고 말한 순간, 우리는 끝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잘못한 걸 알아……. 그렇지만 사생아는…… 사생아는……!”

사생아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는 메릴은 태어날 아이가 겪을 불행이 상상되자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 더 몰아붙이면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너무 몰아세운 것 같아 메이아는 입을 다물었다.

*

메이아 그녀는 끝까지 나를 거부했다. 심지어 플로렌스 대공가의 핏줄까지 잉태했다니!

사지가 잘린 아픔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떠지지 않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왼쪽 머리가 아파 와 절로 신음 소리를 냈다.

“윽, 머리야.”

그리고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양손이 테오도르에 의해 잘려 나갔었는데……? 그런데 오른손이 정확히 아픈 머리를 짚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데미안은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억은 메이아를 놓치고, 죽이고 싶은 테오도르 손에 의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으로 강제로 쑤셔 넣어졌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테오도르의 손에서 흩어진 은빛 머리카락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본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얼굴을 만져보며 하하거리며 웃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거울 속에 보인 모습은 어른이 아닌 어릴 때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내 어릴 때 모습이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시간이 되돌려진 걸까?

똑똑.

“데미안 황자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예전에 내 손에 죽었던 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은 하츠벨루아 공작님과 공녀님께서 방문하시는 날입니다.”

“……!”

확실하다. 시간이 되돌려졌다.

“말도 안 돼!”

“네? 말이 안 된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유모. 준비시켜 줘.”

“기대되시죠? 데이빗 공작님을 무척 닮아 아름다운 아가씨라 합니다.”

“유모 말이 맞아. 기대돼.”

무척.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새로 얻은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싫어하는 행동을 철저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함부로 애칭을 부르지도 않았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꽃을 선물했다.

환하게 웃어 주는 그녀 모습에 더욱 갈증이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어린 강아지에게 향해 있을 때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메이아 앞에서 동물을 죽인다면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하다. 기적적으로 되돌려진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최대한 착한 황자의 모습을 보여 줬다.

“데미안 황자님은 다정하세요.”

“메이아 공녀님, 칭찬 감사합니다.”

테오도르처럼 얼굴을 붉히고 최대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 다음 주에 봬요.”

“내일 또 놀러 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에게 여쭤볼게요.”

메이아가 공작저로 돌아간 걸 확인하고 그녀가 예뻐한 강아지를 생각하며 화를 냈다.

“네까짓 게 뭔데 메이의 시선을 뺏는 거야! 테오도르 같은 새끼.”

테이블 위에 있던 고가의 장식품을 바닥에 던져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메이아가 못 보게 치워 버렸다. 물론 갑자기 사라진 동물들을 못 봐 아쉬워하는 그녀를 계속 위로했다.

놀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일 생각을 하니 온몸에 희열이 넘쳐흘렀다.

흑마법사 테베린은 내 곁에 있고 싶다며 비비적거렸다.

그에게 데이빗과 바이올렛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테베린은 하츠벨루아 공작 부부를 성공적으로 죽였다.

슬퍼하는 그녀 곁을 지켰다. 장례식이 끝나고 루만이 공작이 되었다.

그에게 메이아와 약혼하기 위해 많은 돈을 줬다.

그리고 그녀와 드디어 약혼하게 되었다. 이젠 그녀는 영원히 내 것이 된 것이다.

“절 밖에 내보내 주세요, 황자님.”

“안 돼.”

그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어.

“밖에서 같이 산책하자.”

점점 그녀의 입술 꼬리가 아래로 떨어진다. 인상을 쓰는 거다.

“우리 빨리 결혼할까? 메이.”

예전 같으면 그러자고 했을 그녀가 점점 침묵만 지킨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녀를 찾아 헤맸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테베린에게 그녀를 찾아 달라고 말했다.

“위치가 안 잡혀……. 꼭 마탑에 있는 사람처럼.”

마탑!

생각해 보니 대마법사 푸링과 전 하츠벨루아 공작 부부와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되돌려졌을 때 데이빗과 같이 죽여야 했는데……!

무작정 마탑으로 찾아갔지만 마탑에 입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녀가 마탑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카르펜 제국의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의 약혼녀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끝내 마탑은 자신을 거부했다.

마탑을 부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의지를 가진 마탑은 메이아를 데리고 사라졌다.

몇 명의 마법사를 찾아 고문했다. 그들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탑에서는 카르펜 제국에 마법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이유는 마법사를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이유였다.

“데미안!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냐!”

“마탑에서 메이아를 내놓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을 찾아 죽이는 건 마탑과 척을 진다는 것이다!”

점점 화가 난다.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일렁거렸다. 당장 눈앞에서 잔소리를 하는 황제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그리고 시리우스 제국에서 메이아의 파혼 요청서가 날아왔다. 아니, 협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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