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메이아는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아 초조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걱정했다.
똑똑.
“접니다, 메이.”
문밖에서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은 곧 열리고 테오도르는 한걸음에 메이아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섰다.
테오도르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메이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큰 손이 굳어진 메이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메이아는 그제야 어깨의 힘을 살짝 풀며 입술 꼬리를 올렸다.
“덕분에.”
테오도르의 미소에 몸속 깊숙이 얼어붙어 있던 분노와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신기한 경험이다. 저 사람의 웃는 얼굴에 기분이 결정되는 것이.
“이젠 다 끝났습니다.”
“데미안 황자는…….”
“그자 혼자 그곳으로 떨어졌습니다.”
동시에 데미안의 간절한 얼굴 그리고 광기와 집착 어린 모습이 떠올리자 메이아는 어깨에 흠칫 힘이 들어가며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무서웠다. 그가 미치도록 애원하며 열린 공간 속,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 순간이…… 두려웠다.
만약 테오도르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함께 끌려갔겠지.
데미안 황자의 일이 현실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두려웠다. 그게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생전 처음 보는 흑마법의 이공간 속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비참함 속에서도 끝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할 말은 다 했다.
테오도르는 부르르 떠는 메이아의 몸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전부 다.”
메이아는 테오도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습니다.”
테오도르는 계속 메이아의 등을 쓸면서 토닥였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흑…….”
테오도르의 어깨가 축축이 젖어 갔다. 그리고 메이아는 힘없이 쓰러졌다.
메이아는 자신의 침대 옆에서 손을 꼭 붙잡고 엎드려 있는 검은 형체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씩 눈이 또렷하게 보이자 그 검은 형체가 테오도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미안 황자에게서 테오도르가 자신을 구해 줬다. 그를 보자 강한 안도감에 눈물 흘렸는데…….그리고 기억이 없다.
‘그 뒤에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테오도르가 구해 주고, 그의 품에 안겨 울다가 눈이 감기고 그 뒤의 기억이 뚝 끊어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데미안을 잘 처리했다는 뜻이 아닐까?
메이아는 테오도르가 깨지 않도록 상체를 일으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데미안의 광기 어린 집착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그와 계약한 흑마법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졌을까?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흑마법사와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 앞으로 더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와 함께라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다는 강함 예감이 들었다.
“으음, 메이…….”
테오도르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절로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메이아의 손을 꼭 붙고 엎드려 잠들었던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난 메이아를 보자마자 그녀 목에 팔을 감더니 꼭 끌어안았다.
메이아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뻣뻣하게 굳으며 얼굴을 붉혔다. 여러 가지 물어볼 말이 많은데 갑작스러운 포옹에 거절할 틈도 없이 그를 받아 줬다. 사실 밀어 내기 싫었다가 정확했다.
그의 달콤하고 자꾸 맡고 싶은 체향이 코끝에 감돌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메이아도 팔을 들고 그의 등을 꼭 껴안았다.
데미안이 원하는 건 자신이었다. 어떻게서든 그 검은 공간에 자신을 끌고 들어가려고 했었다.
영원히 함께 둘이서 지내자는 말과 함께.
“그가 원하는 건 저였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도 오싹함이 느껴졌다.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만큼.
“데미안 황자가 들어간 뒤에 검은 공간은 문이 닫혔습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검은 구슬이 되었죠.”
“검은 구슬이요?”
“예. 그리고 흑마법사 테베린이 나타나더니 흑마법사에게 꼭 필요한 마정석이 완성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흑마법사……, 마정석?”
“예, 푸링 대마법사께서 말씀하시길 흑마법사와 계약을 한 사람은 원하는 걸 얻게 되면서 구슬이 된다고 합니다.”
테오도르는 테베린이 기괴한 웃음을 내며 나타났을 때를 떠올랐다.
<플로렌스 대공, 원래는 말이야, 메이아 공녀와 데미안 황자가 이 구슬 안에 들어가야 했어. 그렇지만 메이아 공녀가 무슨 일로 죽어 버린다면 계약 성립은 할 수 없으니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도 대체될 수 있도록 한 거야.>
사랑하는 메이아가 그곳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아찔했다.
“말해 줘요, 테오.”
테오도르는 씁쓸한 눈빛을 지으며 테베린과 대화했던 내용을 메이아에게 털어놓았다.
“뭔가 사기당한 듯한 계약인데요. 그가 원하는 건 저와 영원히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는 거였는데…… 알고 보니 그게 구슬 안에 갇혀 환상을 본다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흑마법사 테베린에게 데미안은 속은 것이다.
“데미안이 그 구슬 안에서 영원히 당신을 가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검은 연옥 속으로 빨려들어 가기 전에 아예 죽일 걸 그랬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테오도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메이아는 침울해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동자 속에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얽혀 갔다. 입술과 입술 맞대기 전, 그 순간이었다.
쾅!
“메이!”
테오도르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상대를 쳐다보고 몸을 굳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하. 하. 하, 대공 각하. 지금 제 딸 위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하. 하. 하.”
테오도르는 갑자기 들어온 데이빗을 보고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놀란 사람은 메이아였다.
“테오,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잘못 본 거 아닙니다.”
테오도르는 눕혀진 메이아를 다시 앉히고 옷과 머리를 정리시켰다.
오붓한 시간이 물 건너가자 아쉬워하던 그의 표정을 지켜본 데이빗은 도끼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장 제 딸아이에게서 떨어져 주십시오!”
“테오, 떨어지지 마세요.”
테오도르의 소매를 당겨 옆에 앉게 한 메이아의 표정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
데이빗은 대공저에서 지내면서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자나 깨나 메이아 걱정이었다.
물론 테오도르가 잘 지켜 주겠다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건 신뢰한다는 마음과는 별개다. 그래도 이 불안함을 딛고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걱정거리가 늘었다.
“바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괜찮아?”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못 먹겠어, 우욱.”
“우선 자리에 누워.”
“응.”
예전에도 바이올렛은 메이아를 가졌을 때 입덧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잘 먹어야 되는데…….”
“데빗, 입덧이 끝나면 많이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폭신한 침대 위에 누운 바이올렛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데이빗은 그녀가 잠들 때까지 옆을 지키며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한 바이올렛의 몸의 변화 정도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여행으로 피곤이 누적되어 몸이 좋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하는 달거리도 지나갔고……. 의심스러웠다. 역시나 대공저의 의원이 말하길……임신이었다.
아이를 더 가지고 싶었지만 생기지 않아 단념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귀여운 딸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공작위는 메이아가 이어받으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빨리 공작위를 넘겨주고 바이올렛과 여행을 다닐 계획도 세웠다. 그렇지만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메이아는 이젠 플로렌스 대공비가 된다.
그렇다면 방계 쪽에서 후계를 찾아 직계로 입적시켜 후계로 키워야만 했다. 그래서 누굴 입양해야 되는지 생각하는 도중, 현재 바이올렛의 임신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당분간 바이올렛과의 여행 계획이 보류되겠지만…… 기쁜 마음이 더 컸다.
“사위님께서 우리 딸을 잘 지켜 주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래.”
“너무 불안해하지 마. 메이도 충분히 강한 아이야, 데빗.”
“잠이 안 와? 바이?”
“응. 졸린 것 같아서 자려는데 눈이 떠지네.”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아직은…….”
“따뜻한 딸기 차를 내오라 할까?”
“그게 좋겠어.”
테라스 테이블에 마주 앉은 데이빗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강하게 날아오는 향긋한 딸기 향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공저 뒤에는 싱싱한 딸기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그 밖에 메이아가 가지고 싶어 하거나 잘 먹는 것 같은 음식의 원재료를 플로렌스 대공저에서 키워 싱싱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향 좋다.”
“너무 진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메이가 생각나는 향이라서 기분 좋아.”
바이올렛이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하츠벨루아 공작저로 돌아가면 딸기밭을 먼저 만들어야 되겠다고 데이빗은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앞면에 크게 쓰여 있는 글씨라 눈에 안 들어올 수 없었다.
기사 내용은 테오도르와 메이아의 약혼 이야기였다.
“이런…….”
“어머나.”
신문을 함께 보던 바이올렛은 재미있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피앙세? 영웅? 여기 내용에는 성녀라고 적혀 있는데.”
“베나블 집사.”
데이빗은 신문과 간식을 가져다준 베나블을 불렀다.
“예, 데이빗 님.”
“왜 우리 딸을 성녀 대공비라고 하는 거지?”
“그건 가신들이 결정한 단어입니다. 바이올렛 님, 차를 더 드릴까요?”
“응. 대공저 딸기 차가 너무 좋은 것 같아.”
“입덧이라 힘드실 텐데 이거라도 드실 수 있어 천만다행입니다, 바이올렛 님.”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 거지?”
“주인마님의 미모에 반해 쫓아다니는 날벌레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전 제국에 대대적으로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날벌레?”
“데이빗 님의 소싯적 이야기를 들은 가신들이 혹시 모를 스토커가 붙을지도 모른다면서 이런 기사를 내게 된 것입니다. 그 밖에 이유는 가신들이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자랑? 그게 무슨 말이지?”
“이렇게 멋진 대공비 마마를 모시게 되었다는 걸 자랑하는 게지요.”
베나블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바이올렛의 찻잔에 말린 딸기와 물을 더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