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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57화 (157/163)

157화

“대공 각하 진정하십시오. 흑마법으로 차단벽을 세운 것입니다.”

“푸링 님! 문 열 방법이 없습니까?”

푸링은 벽과 문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리고 마법 이공간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에 해제 마법이 있지만 먹힐지는 모르겠습니다.”

스크롤 한 장을 찢었지만 흑마법은 해제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계속 검을 휘두르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았다. 흑마법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보석은 영롱하게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푸링 님, 이 반지로 해제가 되겠습니까? 흑마법의 기운을 빨아들여 그 힘으로 빛나는 반지이니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 반지를 빼 주십시오.”

푸링은 다시 한번 마법 이공간에서 여러 가지 아티팩트를 꺼내 몸에 착용했다.

“여기 벽에 집중하십시오, 대공 각하.”

“알겠습니다.”

“얇아진 틈새가 분명 보일 겁니다.”

푸링이 착용한 아티팩트들이 빛나며 마정석 반지에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반지의 빛이 찬란하게 보랏빛으로 빠르게 반짝이며 이내 복도가 보랏빛으로 넘칠 정도로 강하게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벽만 쳐다보았다.

“지금입니다! 저 틈새에 검을 찔러 넣으십시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벽이 뚫리자 눈앞에 보이는 건 데미안이 여린 메이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살의가 끓어올랐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

메이아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고 난 뒤 테오도르는 차갑게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알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밀어 내는 현실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사랑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메이아의 잔인한 말을 듣는 이 순간에도.

“난 그녀를 놓을 수가 없어……. 너무 사랑해.”

메이아를 사랑한다면 절절하게 말하는 데미안의 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메이가 내 마음을 다 모른다 하더라도, 설사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사랑했다는 것만 믿어 준다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괜찮아, 데미안 황자.”

내 마음을 믿어 준 사람이 있기에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은 없다.

“그게 내 사랑이야.”

데미안은 테오도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메이는 내 전부야…….”

그녀를 만나면서 하늘이 왜 하늘인지 보석과 꽃이 왜 아름다운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감정이란 걸 깨달을수록 남들과 똑같아지는 자신에게 만족스러웠다.

“데미안 황자는 메이를 사랑했던 게 아니야.”

“아니야……, 사랑해. 그녀를…… 쿨럭.”

데미안이 크게 기침을 하자 한 움큼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 모습을 싸늘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플로렌스 대공님.”

푸링이 자신을 찾자 테오도르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저 공간 안에 데미안 황자를 집어넣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걸 같이 넣어 주십시오.”

푸링은 손에 들린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 한 줌을 테오도르에게 건넸다.

“메이의 머리카락?”

“맞습니다.”

푸링은 유디에게 메이아의 머리를 빗질할 때마다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모아 달라 부탁했었다.

그리고 그 양이 꽤 되었다.

“공녀님의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면 저 공간이 닫힐 겁니다.”

“메이의 머리카락 한 올도 저 이상한 공간에 넣기 싫은데…….”

“하셔야 합니다. 안 하시면 공녀님이 위험해집니다.”

테오도르는 한숨을 푹 쉬며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링은 테오도르에게 머리카락을 건네면서 시선은 데미안에게 고정했다.

“그렇지만 대단하군, 데미안 황자. 스스로에게 계약이자 저주를 걸다니.”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어 원하는 한 가지를 이룰 수 있게 하는 흑마법 계약.

돈을 원하는 자에게 넘칠 만큼 큰돈을 주지만 돈으로 겪을 수 있는 험한 일을 겪게 한다.

그로 인해 원망과 저주스러운 현실을 탓하는 부정적인 기운이 저주를 건 흑마법사에게 힘을 준다. 하지만 흑마법의 저주에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흑마법의 부정적인 기운과 사랑은 절대 융합할 수 없는 관계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메이아의 사랑을 원하는 저주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을 가장한 저주.

“데미안을 죽이면?”

“제 예상으로는…… 아마도 공간이 닫히지 않게 되겠죠. 저 공간이 원하는 건 데미안 황자와 공녀님입니다.”

“지독하고 더러운 집착이야, 쯧쯧.”

“머리카락은 공녀님 대신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어, 데미안 황자.”

푸링의 말을 들은 테오도르는 심기가 많이 불편한 듯 목소리에 살기가 담겼다.

“그런데 머리카락만으로 괜찮은 게 맞습니까?”

“예. 사람의 머리카락으로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아가씨의 피를 넣어도 되지만 상처를 내야 하니 머리카락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인상을 쓰면서 데미안 황자를 노려보았다.

“푸링 님.”

“예.”

“공간에 집어넣기 전에 데미안 황자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까?”

“아……, 네.”

푸링은 갑자기 검을 고쳐 든 테오도르의 얼굴을 봤다.

유순한 얼굴로 메이아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달콤한 남자가 한순간 살인귀로 변한 듯한 차가운 모습이었다. 오싹했다.

테오도르는 피를 흘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스걱.

“아아악.”

데미안은 비명을 질렀다. 테오도르는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에게 그에게 재갈을 물리라고 말했다.

“아파서 혀 깨물어 죽으면 곤란하잖아.”

뼈가 뽑히고, 살갗이 베여 나가는 소리에 푸링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성수 뿌려서 지혈해.”

“네.”

기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이공간에서 성수를 꺼내 데미안에게 뿌렸다.

성수로 피가 멎었지만 이미 많은 양의 피를 흘린 데미안의 얼굴은 창백했다.

“으읍으으읍!”

테오도르는 검을 고쳐 쥐고 데미안을 찌르고, 지혈하고, 치료하는 걸 반복했다.

양발과 양손이 잘려 나간 데미안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

“그렇게 노려보면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아?”

테오도르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내 여자의 머리카락을 저기에 넣어야 되다니…… 끔찍해…….”

“으읍, 으읍.”

그리고 그의 옷을 찢어발겼다.

기사들 앞에서 황족인 자신이 옷이 찢기고 머리카락까지 잘린 모습을 보인다는 건 수치를 넘어선 상황이다.

그 뒤 테오도르는 계속 그의 뼈를 부러뜨리고 다시 고치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그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대공 각하. 그만하시고 공간에 넣어 주십시오.”

“부족한데…….”

성수가 떨어졌다는 기사의 보고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고문을 더 할 수 없어 테오도르는 몹시 아쉬운 얼굴로 데미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아, 말해 줄 게 있어. 메이아 그녀의 이야기야.”

메이아라는 말에 데미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확인하자 테오도르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데미안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내 아이를 가졌어.”

앞으로 가질 계획이니 아예 거짓은 아니다. 그저 약간 말을 보탰을 뿐이다.

충격을 받은 데미안의 눈동자를 확인한 테오도르는 만족스럽게 입술 꼬리를 한없이 올렸다.

“으…… 읍!”

“잘 가, 데미안 황자.”

기사들은 검은 공간에 데미안 황자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넣자 공간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곧 공간이 닫히며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란 크기만 한 검은 구슬이 허공에 나타나자 테베린이 공간을 열고 나타났다.

“드디어 계약 성립이군!”

테오도르의 검이 테베린에게 향했다.

“흑마법사…….”

“아이쿠, 무서워라. 난 이것만 수거하면 되거든. 그래도 나한테 고마워해야 될 거야. 메이아 공녀의 목숨을 계약으로 안 걸고, 신체 어느 부분으로도 대체 된다고 했으니 말이야.”

“그것쯤은 알고 있었다, 테베린.”

푸링은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이 데미안이라는 걸 안 순간, 분명 검은 연옥 속으로 메이아를 끌고 들어갈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었다.

“푸링 님,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안 본 사이에 많이 늙으셨네요.”

“자네는 하나도 안 늙었군, 테베린…….”

“푸링 님도 흑마법사가 되신다면 저처럼 젊어지실 수 있을 텐데…… 몹시 아쉽군요.”

“흑마법사가 될 바엔 드래곤 레어에 혼자 쳐들어가는 게 낫지.”

“그나저나 제가 메이아 공녀 목숨이 아닌 신체 일부도 계약에 넣은 걸 용케 눈치채셨습니다.”

“옛날에 자네가 그랬잖아. 다음에는 사람 목숨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으로도 대신할 수 있도록 계약하겠다고.”

“하지만 제가 데미안 황자와 계약한 흑마법사라는 걸 몰랐을 텐데요.”

“혹시 몰라 준비한 것이지. 내가 너라는 걸 알았다면 타 제국에 있던 대마법사들과 마탑주를 이곳에 모셔 왔을 게다!”

“아무튼…….”

푸링은 지팡이를 꺼내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지만 테베린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검은 구슬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플로렌스 대공, 원래는 말이야, 메이아 공녀와 데미안 황자가 이 구슬 안에 들어가야 했어. 그렇지만 메이아 공녀가 무슨 일로 죽어 버린다면 계약 성립은 할 수 없으니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도 대체될 수 있도록 한 거야. 그러니 나한테 고마워해.”

“흑마법사…….”

구슬을 소중히 품에 품은 테베린은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허공을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흑마법사 테베린을 수배해.”

“알겠습니다.”

“아니야……, 이참에 흑마법사 사냥을 시작해야겠군.”

테오도르는 쓰레기를 치웠지만 그 쓰레기 때문에 또 다른 쓰레기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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