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의기양양 웃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유치해 보였다. 정말 바보 같은 언행이다.
이곳에는 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다들 귀가 열려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일까? 스스로 약혼은 얕은 약속이라 말하는 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지금 이 주위에도 약혼한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스스로 인맥을 버리는 짓을 하다니…….
“약혼은 절대 얕은 약속이 아니랍니다, 로로드비엔 영애.”
그리고 무엇보다 파혼당한 이야기를 또 꺼내면서 자존심을 건들고 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나를 얌전히 보고만 있지 않겠지. 어떻게서든 수치를 안겨 주고 싶은 거지. 그리고 내 빨개진 얼굴을 보며 속으로 비웃겠지. 보통 영애들이라면 상처 받고 우물쭈물하겠지만 난 아니다. 걸어온 싸움을 피한다면 하츠벨루아가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무개념 언행을 보이며 당황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즐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사실이시잖아요. 파. 혼. 당. 하. 신. 거.”
“즐거우십니까?”
메이아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남이 겪은 아픔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즐거워 보이시네요.”
메이아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오른손을 주먹을 말아 가슴에 갖다 댔다.
그 모습은 꼭 상처 받은 사슴이 주저앉아 아파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파혼당했다고 그걸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파혼을 당한 여성은 동정을 받는다. 그러나 귀족에게 있어 동정받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츠벨루아가의 공녀로서 정략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정략혼이기 때문에 파혼 또한 귀족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파혼은 흔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황태자 전하 사이를 파혼당하도록 내버려 둔 하츠벨루아가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싫어서입니다. 로로드비엔 영애가 지금 하신 이야기는 제 아픈 마음을 건들고, 공녀인 저를 하츠벨루아가에서는 파혼을 당하도록 내버려 뒀다고 지적을 하신 거라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자존심이란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일부러 아픈 마음이라 표현했다.
“절 건드는 건 상관없지만 파혼을 결정한 양가인 폰 마브로 황가와 하츠벨루아가를 모욕하는 발언이라는 거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메이아는 입을 꾹 다물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켜며 삼키더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만들었다.
“대답하십시오.”
탁.
펼쳐진 부채를 거칠게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접었다. 지나가던 귀부인과 영애들은 메이아를 주목했다.
“시엘 영애, 물었습니다.”
“기분 나쁘게…… 할 생각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츠벨루아 가문을 욕보이는 말을 하신 겁니까! 그리고 제 약혼자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혹시 내 약혼자의 소문을 만드신 게 영애십니까?”
메이아의 큰 소리에 귀부인과 영애들은 저마다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로로비엔드가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시엘 영애 또한 그리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 일은 저희 집안과 황가에 직접 보고하겠습니다.”
시엘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아 당황스러웠지만 메이아 말대로라면 자신은 황가를 모욕하게 된 장본인이 된 것이다.
“전 메이아 공녀님이 걱정돼서 말한 것입니다.”
“걱정하시는 분이 파혼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서 웃으셨습니까? 웃고 싶으면 부채를 입에 대고 가리셔야죠. 교양 없이 부채로 입을 가리지 않고 웃으시다니…….”
메이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시엘을 내려다보았다.
“교양을 다시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공…… 공녀님!”
시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테오도르는 2층으로 올라간 메이아가 오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익숙한 목소리가 사람들 틈에서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메이아의 목소리였다. 뭔가 평소의 상냥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단호하고 뭔가 격양됨이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한 칸씩 계단에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바로 메이아가 보였고, 그녀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메이!”
심각한 분위기로 한 영애를 노려보는 메이아를 보며 테오도르는 걱정스레 다가갔다.
“하도 내려오지 않아 걱정되어 올라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 앞에 있는 로로드비엔 영애께서 플로렌스 대공 각하의 또 다른 부인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시엘은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플로렌스 대공 각하 앞에서도 제게 했던 이야기를 해 보세요, 로로드비엔 영애.”
“그…… 그게.”
난처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시엘은 정말 몰랐다.
“당사자 앞에서 하지 못할 이야기를 저한테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메이아를 쳐다보던 시엘의 눈동자에서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의 감정이 엿보였다.
“그, 그게…….”
“제가 파혼 한 번 당했으니 두 번 당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나요?”
시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상처 입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왔지만 메이아는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테오도르 앞에서 시엘이 말했던 걸 있는 그대로 말했다.
“하…….”
테오도르는 헛바람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시엘을 내려다보았다.
“메이.”
“네.”
메이아는 테오도르가 부르는 소리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메이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메이아를 자신의 등 뒤로 서게 한 다음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와 시엘 앞에 섰다.
“인사는 하지 않았으면 하네, 로로드비엔 영애.”
시엘은 싸늘하게 식은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고 숨이 턱 막혀 버릴 것 같았다.
메이아를 바라보던 따뜻한 감정이 느껴졌던 검은 눈동자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경멸감이 가득했다.
“시리우스 제국은 황제도 후궁을 두지 않아. 시리우스 제국 황가의 남자들은 모두 한 여자만을 사랑하지. 나 또한 그러하고.”
테오도르는 시엘만 들을 수 있게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만에 하나 내가 부인을 또 둘 수 있다 하더라도 영애는 아니야……. 음…… 영애는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그리고.”
테오도르는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내 대공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면…… 이 책임은 로로드비엔 백작가가 지게 될 거야. 그러니 말은 하되 그녀에게 격하게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섬뜩한 찬 바람이 맨피부에 닿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내가 경고해 준다는 건……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이니 언행에 주의했으면 해.”
그 뒤에 사교계에서 시엘의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었다.
*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했다.
아르헨은 검은 로브의 사내가 접견실 안의 사람을 모조리 죽이는 모습을 황좌에 앉아 쳐다만 볼 뿐이었다.
“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에 아르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데미!”
“예, 아바마마!”
“이게 뭐 하는 짓인 게냐!”
“하, 원래는 말이죠. 저는 황제가 될 생각이었습니다. 음, 메이아 공녀가 황태자랑 약혼했으니 말이죠. 데이빗 공작도 딸을 황후로 만들고 싶다 말했었고요.”
데미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로 걸어 나오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근데 저는 황좌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메이아하고 결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바마마와 데이빗 공작은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데미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는 이제 터질 것 같은 풍선과도 같았다.
“나에게서…… 빌어먹을! 나에게서 그녀를 빼앗았잖아요! 나에게서! 내가 그렇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빗 공작과 짜고…… 내 마음을 짓밟으셨잖아요……!”
아르헨에게 화를 내는 데미안을 테베린은 황홀히 지켜볼 뿐이었다.
“예전부터 이러고 싶었습니다, 아바마마.”
“데미…… 내가 결혼시켜 주마. 응? 미안하다, 내가.”
“전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츠벨루아 공작과 아바마마는 그녀를 파츠래리의 약혼녀로 세우셨습니다. 남의 약혼녀가 된 그녀를 볼 때마다 제 심정은 매일매일 갈가리 찢어져만 갔습니다.”
“데미, 진정하거라.”
데미안은 천천히 아르헨에게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형님과 아바마마를 함께 죽일 생각이었는데…… 성인식을 앞당기시는 바람에 일이 조금 틀어져 버렸습니다.”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사과하셔도 이미 늦었다는 거 알고 어렴풋이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아바마마에게 그때 느꼈던 처참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데미안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꼬리는 축 처지며 오싹한 미소를 드러냈다.
“제 손으로 친부인 당신을 죽일 겁니다. 책에서 그러더군요. 자식 손에 죽은 아버지 심정은 배신 그 이상이라고요.”
데미안은 들고 있던 롱 소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데미, 메이아 공녀는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었단다. 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목을 얼마나 그어 버리고 싶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날 진짜 죽일 심산이냐! 이건 패륜이야!”
아르헨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일을 떨쳐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시는 길 외롭지 않도록 다른 분들과 함께 묻어 드리겠습니다.”
아르헨은 다가오는 데미안에게 공포를 느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예뻐하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다니……!
고개를 들고 황제의 접견실 위에 높게 장식된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