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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53화 (153/163)
  • 153화

    파츠래리는 초조한 기분을 숨기고 응접실에서 메이아를 기다렸다.

    얼마 전 잡힌 토마스가 메릴과 연인 관계였다는 말을 하면서 큰 소란이 벌어졌다. 메이아에게 온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물어보기 위해 몰래 온 것이다.

    아니다. 메릴과 토마스의 관계를 그녀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은 사랑하는 메이아를 보고 싶어서 핑계를 대고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약혼녀였는데…….”

    이젠 남의 약혼녀가 되어 버린 메이아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메이아의 약혼은 억지로 이루어진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도와줄 방법이 있는 걸까?

    만에 하나 메이아가 사라져 버리면 그걸 핑계로 테오도르가 카르펜 제국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어쩌지……?

    오만가지 잡념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황태자, 그만 메이아 공녀를 잊고 메릴 공녀와의 국혼을 준비하세요.>

    <어머니…… 저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약혼자와 동거한다는 이야기까지 꺼냈습니다. 그리고 플로렌스 대공과 좋은 사이도 유지해야 되니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세요.>

    <……예.>

    어머니는 플로렌스 대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고만 말했다. 자신의 더러워진 기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후회되고 또 후회되다 못해 메이아와의 약혼 기간이 그리워졌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파츠래리 황태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파츠래리 귓가에 울렸다. 테오도르였다.

    “설마…… 내 대공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파츠래리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테오도르는 드이임에게 웃으며 말했다.

    “딸기 차를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드이임이 나가자 화사하게 웃던 눈가의 웃음기가 사라지자 테오도르의 표정이 섬뜩해졌다.

    “파츠래리 황태자.”

    “말씀하십시오.”

    “잘 들어. 오늘 마지막 경고를 할 거니까.”

    “전 경고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주름진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넌 그녀의 지나간 기억의 일부분일 뿐이야. 그래, 추억거리도 안 되는 존재지. 그런 황태자가 있었지, 하는 그런 기억 속 존재 말이야.”

    파츠래리는 테오도르가 보이지 않게 살짝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널 약혼자로 선택했지.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가 널 선택한 게 아니야. 말 그대로 정략혼이었지. 하지만 그녀는 온전히 약혼자로, 그리고 남편으로 앞으로 함께 살아갈 가족으로 날 선택했어.”

    “당신의 권력으로 강제로 약혼해 놓고선 선택받았다고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강제로든 강제가 아니든 무슨 상관이지? 결과적으로는 그녀는 나를 선택했는데. 만에 하나 그녀가 지금 너와 약혼 관계였다 하더라도 나는 당당히 빼앗을 수 있는 위치라는 거 잊지 마.”

    파츠래리는 주먹을 말아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꾸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치욕적이었다.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한 걸 탓하지 마. 그리고 선택해 달라고 그녀에게 강요도 하지 마. 다시 한번 내 눈앞에서 나의 대공비에게 질척거리면 정말 카르펜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지.”

    테오도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선택받지 못한 너에게도 선택권을 줘야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억울하다고 싸움에 진 개처럼 짖을 거 아니야.”

    “저에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그러면 선택권을 주지, 파츠래리 황태자.”

    기대해도 좋다는 말과 함께 테오도르는 그에게 물었다.

    “황태자 자리야? 아니면 그녀야 한 가지만 선택해. 나라면 메이야.”

    파츠래리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황태자 자리와 메이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당연히…….

    “카르펜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파츠래리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축하해, 파츠래리 황태자.”

    떨구었던 고개를 다시 들고 테오도르를 쳐다보는 파츠래리는 그의 축하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되물었다.

    “무엇을 축하한다는 겁니까?”

    “황태자는 방금 카르펜 제국을 구했어. 내가 분명 이야기했잖아. 그녀에게 또 질척거리면…… 카르펜 제국을 지도에서 지우겠다고. 난 너그러운 편이라 짖던 개가 날 보고 꼬리를 내린다면 귀엽게 봐주는 편이거든.”

    파츠래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에 하나 카르펜 제국의 황태자가 아닌 메이아를 선택했다면…….

    “황태자로서 선택을 참 잘했어.”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파츠래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며 한쪽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축하해. 넌 카르펜 제국의 영웅이 된 거야. 비록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테오도르의 거친 분위기를 읽은 파츠래리는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쥔 채로 부르르 떨 뿐이었다.

    똑똑.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메이아가 들어왔다.

    “메이!”

    “오래 기다렸죠?”

    “네……, 기다렸습니다…….”

    테오도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파츠래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토악질했다.

    방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대며 협박하던 사람이 메이아 앞에서 고분고분해지다니…….

    꼭 개가 주인을 섬기고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주인의 손길에 기뻐 날뛰는 모습 같았다.

    인상을 찌푸린 파츠래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대로 메릴과 국혼을 올리고, 힘을 키울 수 있는 세력 집안들의 영애들을 후궁으로 들이면 될 일이다.

    엘르민이 도와줄 테니……. 메이아에 대한 사랑은 내려놓자.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

    파츠래리는 애써 현실을 내 탓이 아니라며 외면했다. 아니, 도망쳤다.

    파츠래리는 드이임이 가져다준 딸기 차를 마시며 맞은편에 달라붙어 앉아 있는 메이아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메이, 대공저의 딸기 차가 그립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마시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도 신선한 딸기가 이곳으로 도착할 겁니다.”

    “정말이요? 어떻게요?”

    “록벨리온 공작에게 냉기가 흐르는 마정석을 대량 주문했습니다. 딸기를 얼렸다 녹이면 맛이 떨어지겠지만 지금 마시고 있는 딸기 차보다는 맛날 겁니다.”

    “기대되네요.”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메이아의 어깨를 감싸고 자신의 품에 끌고 들어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사랑스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눈길을 온전히 메이아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은 메이아가 환하게 웃고 있다.

    “흠흠.”

    파츠래리는 헛기침을 하며 손님이 있으니 자중해 달라고 티를 냈다. 소리를 들은 메이아는 그에게 질문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저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쿠룬달스 영식 일 때문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쿠룬달스 영식이 자꾸 메릴과 연인 관계였고 그래서 익명 경매장 일을 도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황태후 마마가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황가의 여인이 될 메릴이 구설수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메릴 언니와 쿠룬달스 영식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황태자 전하.”

    “그렇습니다. 지금 그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 골치 꽤나 썩고 있습니다. 어쩌면 파혼이 결정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토마스의 행적을 따라갈수록 메릴 또한 그와 얼마나 어울리고 놀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익명 경매장 일이 토마스 영식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메릴 공녀가 황가의 여인이 될 사람이니 감출 뿐이죠. 그렇지만 두 사람이 내연 관계라는 소문이 계속 돌게 된다면 파혼밖에 답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이네요. 그렇지만 그 일은 저도 몰랐던 일입니다.”

    “증거를 제출했다고 들었습니다.”

    “메릴 언니가 아무리 사교계에서 쌈닭으로 통한다 하더라도 가문에 먹칠할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분명 쿠룬달스 영식이 거짓을 말하는 걸 겁니다.”

    “이미 황태후 마마의 마음이 메릴 공녀에게서 떠났습니다.”

    로즈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건 세 번의 기회를 메릴이 놓쳤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파혼을 하게 된다면 철저하게 그 이유를 준비하셔야 될 겁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걸 드리겠습니다.”

    파츠래리는 자신의 마법 이공간에서 편지를 꺼내 메이아에게 건넸다.

    “성인식을 보름 후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보름 후요?”

    “예, 이번에 이례적으로 앞당기기로 했습니다.”

    파츠래리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로 옮겨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걸 원하는 분이 있으니 말이죠.”

    그의 시선 끝에 테오도르가 있다는 걸 알고 왜 성인식이 앞당겨졌는지 이해되었다.

    “드레스 가공이 다 되었으려나 모르겠네요, 테오.”

    “디자이너 클레리라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할 겁니다.”

    “기대되는데요.”

    “록벨리온 공작 부부처럼 커플룩이잖아요.”

    “맞습니다. 드레스 입은 모습이 너무 기대되는군요.”

    “가공할 때 와서 보실래요?”

    “봐도 되겠습니까?”

    “저도 테오의 제복 모습 보고 싶은걸요. 그러니 서로 보여 줘요.”

    “아……, 내일 디자이너 클레리라가 방문하는 날이군요.”

    “맞아요.”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파츠래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며 딸기 차를 마셨다.

    딸기 차 맛이 매우 썼다.

    *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성인식에 의아했지만 그만큼 테오도르를 빨리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결정된 사안일 것이다.

    화장대 의자에 앉은 메이아는 시녀들이 하는 화장을 받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입자가 고운 푸른 계열의 글리터를 눈가에 바르겠습니다.”

    “입술 색상이 진한 레드보다는 밝고 연한 레드 계열로 하겠습니다.”

    “솔직히 우리 아가씨는 화장 안 하신 게 더 아름다우시지만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요?”

    화장을 마치고 거울을 보았다.

    “올림머리도 좋지만 앞머리를 다 올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결을 살리고 옆으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면 좋겠어. 살짝 웨이브를 넣어 줘.”

    “알겠습니다.”

    디자이너 클레리라로부터 역작이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레이스 하나하나를 실로 엮은 그녀의 노고에 박수를 보냈다. 어깨와 네크라인에 맞춰 화려한 은색 레이스가 어깨와 팔에 둘려 있었다. 레이스에는 크고 작은 사파이어와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화려하면서도 우아함이 엿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야.”

    둥글게 퍼져 내려오는 푸른 은하수 같은 드레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드레스가 너무 화려해서 자칫 잘못하면 드레스에 눈길이 뺏기겠는데…….”

    “아가씨가 입으니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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