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반지?”
벨벳 상자 안에서는 한 쌍의 반지가 있었다.
“이걸 만들기 위해 늦어졌습니다. 여기에 박힌 마정석은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보랏빛을 내게 됩니다.”
“어디서 나신 거예요?”
“록벨리온 공작령에 있는 마정석 광산에서 나온 가장 질 좋고 튼튼한 마정석인데 흑마법사의 기운을 빨아들이면서 빛을 낼 수 있는 성질을 연금술사 안톤이 마정석에 직접 부여한 것입니다.”
“연금술사 안톤이 직접이요……?”
“예, 록벨리온 공작이 그를 고용했다 합니다. 그래서 만들 수 있었죠.”
테오도르는 벨벳 상자의 반지를 꺼내 메이아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그리고 벨벳 상자를 건네주면서 자신도 왼손의 새끼손가락에 껴 달라 말했다.
“이걸 끼고 사교계를 돌아다니다가 보라색으로 빛이 난다면…….”
“그 장소에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죠. 만약에 흑마법사와 계약한 사람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잡아야죠.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아야죠.”
“메이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저와 계속 동행하셔야 합니다.”
“테오는 내 약혼자니 함께 다녀요. 그리고…….”
메이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사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알게 될 테니 말하려고요. 고민을 많이 한 주제예요.”
메이아는 현재 카르펜 제국에서 나돌고 있는 테오도르의 소문을 이야기해 줬다.
“전 이 소문을 이용할 생각이에요.”
“지금보다 더 악인이라고 소문이 난다면…… 더는 뒤에서 험담하지는 않겠군요.”
사람은 정말 두려운 걸 느끼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한 존재에 대한 말을 아끼게 된다.
“공포심을 심어 주는 건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의 소문을 잘 이용해 보죠, 메이.”
딱히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메이만 소문에 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도 속상해요. 테오는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인데…….”
“메이만 알아줘도 됩니다.”
메이아는 손을 뻗어 테오도르의 뺨을 매만지며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손길을 받은 그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소문이 나는 이유는 이용하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용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이용하죠.”
“테오.”
“네.”
“전에 제가 이야기한 거 있죠?”
테오도르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파스타 말입니까?”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말을 기억한 테오도르는 눈을 뜨고, 메이아의 허리를 받쳐 자신의 품으로 끌고 들어오며 그 허리선을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니요. 파스타 말고! 데이트하자는 거요. 어어! 손 떼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몸을 쓰다듬던 손을 얼른 뗐다.
“설마 기억 못 하고 계셨어요?”
“아닙니다. 저는 데이트도 기억하고,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말도 이해하고 기억합니다.”
메이아는 그의 가슴팍을 콩콩 치면서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파스타 먹으러 가자는 말은 연인들끼리 애틋한 밤을 보내자는 뜻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라면 분명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파스타는 말 그대로 우리 요리장이 파스타를 너무너무 잘하니깐 먹자는 뜻입니다. 다른 뜻 없어요.”
메이아는 고개를 들고, 손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테오도르는 방긋 웃으며 알았다고 답했다.
<장모님. 전 그녀에게 말할 겁니다.>
<왜죠?>
<어떤 존재가 위험할지 메이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바이올렛과 데이빗은 자신들의 생존을 비밀로 하고 싶다고 간곡히 요청했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에게 숨기는 게 싫은 것도 있지만 데미안이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려야지만 더욱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저의 부모님은 저에게 위험한 일에 대해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죠. 저는 소중한 사람일수록 이야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걱정 끼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숨긴다면 남겨진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말할 겁니다.>
“테오.”
“네.”
“무슨 생각 해요?”
“메이 생각이요.”
처음에는 바이올렛과 데이빗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메이아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게 싫다.
그녀는 알아야 한다. 위험한 존재가 무엇인지. 그러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가 판단하고 결정하겠지. 숨기면 안 된다. 알아야 한다.
자신의 언행이 정답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테오도르는 한숨을 쉬며 메이아를 고쳐 안았다.
“사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인데요?”
“사실 흑마법사와 관련된 한 사람은 찾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반지를 만들어 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메이아는 그의 말에 경청했다.
“우리는 몇 명의 흑마법사와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반지를 만든 것입니다. 흑마법사와 계약한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게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왜 숨기려고 했나요?”
“계약자는…… 메이도 아는 사람입니다.”
“계약자가 누구인지 말해 주세요.”
“데미안 황자입니다.”
*
“폐하, 언제까지 우리 데미가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데미안의 친모인 루루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루루나…….”
“제가 플로렌스 대공 각하를 만나 부탁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폐하…… 흑흑.”
“루루나, 어쩔 수 없다는 거 잘 알지 않은가! 그는 시리우스 제국의 대공이야. 황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어! 그들에겐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오.”
“압니다. 메이아 공녀에게 상처를 입혀 플로렌스 대공의 분노를 샀다는 것쯤은! 그래도…… 어미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힘이 듭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아비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소!”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령은 무역이 매우 발달된 곳이다. 그곳으로 지나다니는 배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마탑과 우호 관계국이다. 이유는 그곳에서만 캘 수 있는 마정석들 때문이다.
그리고…….
“데미안이 마탑의 마법사에게 상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곳에서 황가에 마법사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연락이 왔소.”
요즘 이거 때문에 머리가 꽤나 아팠다.
의지를 가진 마탑은 마법사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마탑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를 입힌 날에는 가차 없이 교류를 끊어 버린다.
“메이아 공녀가 마탑에 가서 마법사로 등록했을지 상상이나 했겠소……? 그리고 공녀에게 상처를 준 건 데미안 잘못이 맞소.”
데미안이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메이아에게 집착했던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 자리를 욕심내는 것도……. 하지만 출중한 황자가 있다는 건 황가에서는 매우 기쁜 일이다. 그리고 황좌는 강한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딱히 데미안이 세력을 키우고 황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우리 데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폐하……!”
“플로렌스 대공은 감옥에 가두라는 말을 했소. 내가 볼 때 메이아 공녀가 성인식을 치른 다음 감옥에서 나오게 할 생각 같소.”
“그러면 몇 달이나 감옥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년 1월 첫째 날에 있을 성인식을 앞당기는 회의를 할 생각이오.”
황제 아르헨이 생각해 낸 방법은 얼른 성인식을 앞당겨 메이아를 성인으로 만들어 플로렌스 대공령으로 보내기였다.
“어차피 메이아 공녀는 대공비가 될 몸이니…… 얼른 보내 주면 끝날 일 같소.”
“그러면 괜찮을까요? 플로렌스 대공은 무자비한 남자로 한 번 눈에 거슬리면 바닥까지 찍어 누르는 잔인한 자라 했습니다. 우리 데미를 봐주실까요?”
아르헨은 루루나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무척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인정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 그를 겪은 파츠래리 또한 그 소문이 맞다고 했었다. 그런 자의 약혼녀인 메이아를 건드렸으니…… 데미안이 어떻게 될지 겁이 날 뿐이다.
아르헨은 루루나를 껴안고 등을 톡톡 두들기며 위로했다.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루루나는 눈물을 계속 쏟아 내도 또 나오는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아르헨은 그런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위로했다.
루루나는 아르헨의 만남을 뒤로한 채 황후 엘르민에게 향했다.
“마마.”
“루루나, 왜 그러십니까?”
“데미안 황자를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흑흑.”
루루나는 플로렌스 예비 대공비인 메이아를 티 파티에 초대해 자초지종 설명을 하고, 데미안을 봐 달라고 말하고 싶어 초대장을 보냈지만, 플로렌스 대공가의 제1 기사단장이라는 베르샤라는 자가 찾아와 “대공 각하가 초대장을 보시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습니다.”라는 그 말만 전하고 떠났다.
아르헨을 만나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태후 로즈에게 찾아갔지만 경매장 범인을 잡기 위해 신경을 그쪽에만 쏟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답만 했다.
“제발, 마마.”
남은 사람은 황후 엘르민밖에 없다. 얼마 전 메이아가 그녀의 티 파티에 참여했다는 건 과거 일을 덮어 두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엘르민이 다시 한번 초대한다면 메이아도 와 주지 않을까?
“티 파티를 당분간 열 생각이 없습니다, 루루나.”
“메이아 공녀를 만나야 합니다, 마마.”
엘르민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메이아가 약혼한 것도 기가 막히는데 그 상대가 플로렌스 대공이라니……. 그것도 파츠래리에게 망신을 준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엘르민 역시 티 파티에서 메이아에게 후궁 제의를 했다가 사람들 앞에서 보기 좋게 거절당해 망신을 당했다. 약혼을 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메이아는 당당하게 함께 산다고까지 말했다. 수치스러웠다.
파츠래리의 약혼녀일 때는 내 말에 오냐오냐하며 눈치껏 행동하던 메이아가 플로렌스 대공비가 되었다고 안하무인이 된 것이다. 그동안 본성을 숨긴 거겠지.
엘르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루루나, 난 티 파티를 열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세요.”
망신을 당했는데 또 티 파티를 열어 메이아를 초대하라고? 그건 미친 짓이다. 아니, 자존심 없는 짓이다.
엘르민은 루루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