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마차 문이 열리고 테오도르가 뒤쫓아 들어와 메이아의 옆에 앉았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몹시 기뻐 보였다.
테오도르는 기다렸다는 듯 메이아의 손을 잡고 허리를 끌어 올려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테오, 이 자세는 너무…….”
“마차가 덜컹거리니 제가 꽉 껴안고 지키기 위해 한 행동입니다.”
그렇게 비장하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미치도록 귀엽다.
메이아가 양쪽 팔로 테오도르의 목을 두르자 그는 더욱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감정이 솔직하게 다 보일 정도로.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오신 겁니까? 물론 메이는 볼 때마다 자꾸 예뻐지지만…….”
말끝을 흐리는 테오도르를 바라보며 결국 소리 내 웃어 버렸다.
덜컹.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대공비 마마. 돌부리에 마차가 걸렸습니다.”
마차가 크게 한 번 덜컹거리자 둘은 크게 움직이며 더욱 서로가 밀착되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가 사랑스럽다는 듯 허리를 감싸던 한쪽 손을 떼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올곧게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메이아의 모습이 비쳤다.
계속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테오도르만 보였다.
“보고 싶었어요, 테오.”
“저도 그렇습니다.”
“사랑해요.”
얼굴을 붉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메이아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달콤한 체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느덧 마차가 도착하고, 마부가 공작저에 도착했다는 말을 외쳤지만 마차 문은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다.
말을 타고 마차 뒤를 쫓아온 베르샤는 나오지 않은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너무나 예상되었다. 집사 드이임이 왜 안 나오시는 건지 걱정스레 베르샤에게 물었지만 그는 시선을 돌린 채 헛기침만 했다.
분명 마차는 도착했다. 하지만 메이아가 나오지 않자 집사 드이임은 걱정스럽게 마차만을 쳐다봤다. 마부가 문을 열어야 하지만 마차 뒤에서 말을 타고 함께 온 베르샤가 그걸 저지한 것이다.
“마차 안에는 저희 대공 각하와 대공비 마마 두 분이 함께 계시니 함부로 문을 여실 수 없습니다.”
약혼한 두 사람이 마차에 있다는 건…… 그리고 나오지 않는다는 건 대화 중이라는 뜻으로 함부로 문을 열어 볼 수 없었다.
드디어 마차 문이 열리고 잔뜩 붉어진 얼굴의 메이아가 테오도르의 품에 안긴 채 나오자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크게 놀랐다.
“내려 줘요, 테오.”
“제가 안고 가는 게 싫으신 겁니까?”
“아니에요. 사용인들 앞이라 부끄럽단 말이에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며 속살거렸다.
“다리 힘이 풀리셔서 주저앉으실까 봐 걱정되어 안은 것뿐입니다.”
메이아는 두 손으로 테오도르의 입을 가로막으며 밀었다.
“안 그래요!”
테오도르는 시원하게 하하 웃으며 메이아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살짝 허리를 숙이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는 허락해 주시죠.”
메이아는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보았어도 못 본 척한다는 거겠지.
“에스코트 부탁드려요.”
“허락 감사합니다, 메이.”
“드이임.”
테오도르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메이아는 드이임을 불렀다.
“예, 아가씨.”
“내 개인 응접실까지 앞장서 줘.”
“알겠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메이아와 그의 약혼자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사용인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루만은 테오도르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펄쩍 뛰었다. 집사 드이임은 테오도르가 메이아의 개인 응접실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달했다. 공작저에는 오지 않길 바랐던 인물이 와 버린 것이다.
루만은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플로렌스 대공가와 인연을 맺는 건 나쁜 일은 아니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메이아의 가문인데 지켜 줄 게 아닌가!
하지만 머릿속에는 메이아를 지독하게 원하는 데미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젠 그가 알았으니 공작저를 어떻게 괴롭힐지 두려웠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데미안은 테오도르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혹여나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가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전쟁 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걱정 가득한 한숨을 안고 메이아의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각하. 안 보신 사이에 훤칠해지셨습니다.”
루만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테오도르에게 아주 반갑다며 보고 싶었다는 것처럼 과장된 인사를 했다.
“환대 감사합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공작저에 방문하니 많이 놀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대공 각하. 얼마든지 편하게 지내십시오. 우린 이젠 가족 아닙니까, 하하!”
루만은 유난히 가족이란 말에 힘주어 말했다.
“데미안 황자가 공작저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고 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하…… 그게…….”
루만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카르펜 황제에게 말해 데미안을 감옥에 넣었으니 안심해도 될 것입니다.”
“예?!”
루만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황제가 끔찍이 아끼는 황자를 테오도르의 말 한마디에 감옥에 가두었다니! 역시 국력의 차이가 엄청나구나……. 루만은 새삼스럽게 그 격차를 느꼈다. ‘메릴이 저런 사내를 잡았어야 되는데’라는 생각까지 했다.
“혹시 모르니 메이아의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 공작저에 있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데미안 황자가 더는 공작저에 못 온다는 뜻입니다.”
“계시는 동안 편하게 지내십시오, 대공 각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테오도르가 있는 동안에는 데미안 황자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황제나 파츠래리는 테오도르의 눈치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그 플로렌스가 아닌가! 그렇다는 건 테오도르와 연을 맺은 자신에게도 그만큼 힘이 생긴다는 소리다.
황제와 파츠래리가 자신의 눈치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만의 미소가 풀어졌다.
*
“테오.”
“예, 메이.”
“중요한 손님이 누구셨나요?”
“록벨리온 공작이 모시고 온 분들이었습니다.”
“중요한 분들이셨나 보네요.”
“예.”
메이아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고마운 분들인데……. 당연히 중요했다.
“중요했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옥에서 데미안과 한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이란 남자를 거부할 수 없었겠죠. 하츠벨루아 공작은 아주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카르펜 황제보다 높은 위치의 플로렌스 대공가의 압박이 있었다면 약혼이든, 결혼이든 거부할 수 없었겠죠.>
지금 데미안은 독이 바짝 오른 상황이다. 감옥 안에서 마주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그 살기 어린 시선, 그리고 살의로 가득한 눈빛과 분노. 만에 하나 데미안 황자보다 자신의 직위가 낮았더라면…… 100% 죽임을 당했을 거다. 그리고 데이빗의 말을 이해했다.
<아무리 내 딸만을 사랑한다 외쳐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모르고, 상대방을 가지기 위해 독점하고 거짓말로 속이려 드는 그런 괴물과…… 절대 메이아를 결혼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부모도 죽인 사내가 하물며 대공 각하를 안 죽이려고 할까요. 데미안 황자는 메이의 약혼자가 된 대공 각하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데미안 황자는 괴물입니다. 절대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데이빗은 데미안을 괴물 혹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분류해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정확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분들은 신분을 숨기고, 흑마법사와 계약한 자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신 고귀한 분들이셨습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를 쫓는 분들이라면…… 저희한테도 중요한 분들일 수 있겠네요.”
“저희 플로렌스령에서도 노예상과 흑마법사와 관계가 있다는 걸 기억한 록벨리온 공작이 데리고 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네요.”
“전 몹시 괴로웠지만요.”
메이아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잘 끝났나요?”
“예, 그리고…….”
테오드르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야기해 줘요, 테오.”
“카르펜 제국에서도 흑마법사와 계약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계약한 자가 돈을 벌기 위해 인신매매 그리고 도박과 마약 사업 쪽으로도 손을 댔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노예 매매상에 갇혀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전 제국에 노예 매매상의 손길이 뻗어 있나 보네요. 저희 카르펜 같은 소국에도 존재하는 걸 보아하니……. 갑작스럽게 큰돈을 만진 평민이 있다면 그를 조사하고……. 만에 하나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라면…… 찾기 어렵겠는데요. 그래도 돈을 많이 번 귀족들 상대로 조사해 보면 찾을지도 몰라요.”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하는 메이아를 테오도르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희 딸에게 흑마법사 이야기를 꺼낸다면 도망갈 생각보다는 잡을 생각을 먼저 할 아이입니다.>
바이올렛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메이아는 흑마법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찾으려고 했고, 어떻게 흑마법사를 찾아내고 잡을지를 고민했다.
보면 볼수록 정말 멋진 여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안일하게 지켜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지켜야 될까?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목숨을 버리고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지키는 일은 타이밍과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구하지 못한다면…….
“테오.”
“예.”
“도와주세요.”
테오도르는 메이아의 손을 꼭 잡은 뒤 머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얼마든지요.”
무리한 부탁을 해도 뭐든지 들어줄 거야.
“아니, 뭘 도와 달라고 할 줄 알고 ‘얼마든지’라고 말하는 거예요?”
“뭐든지.”
“그러니까 제가 뭘 부탁할 줄 알고…….”
“메이가 저에게 이상한 걸 부탁할 리 없다는 걸 아니까요. 혹여 어려운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게 어리석은 남자의 마음입니다.”
테오도르는 가볍게 메이아의 뺨에 입을 촉 하고 맞췄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평민이 있다면 찾아야 해요. 혹시 많은 돈을 주고 귀족패를 구매할 수도 있으니 폭넓게 조사해야 하고요. 대공저의 비밀 공작원들에게 그걸 맡기고 싶어요. 쥬안한테 맡기고 싶지만 현재 그는 쿠룬달스 백작 영식을 미행해야 되어서요.”
“메이는 플로렌스 대공비입니다. 얼마든지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민은 아닐 겁니다.”
“네?”
“노예를 옮기는 거면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없으니 산을 타서 이동하거나 비싼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배를 이용하는 거죠.”
“배…….”
“배의 무역업은 평민들이 손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평민을 따로 조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배의 무역업을 하고 싶다면 돈이 아닌 가문의 패가 필요하다.
“제가 잠시 급한 마음에 잊었네요.”
메이아의 붉어진 뺨을 한 번 쓰다듬은 테오도르는 자신의 마법 이공간을 열어 작은 벨벳 상자를 하나 꺼내 열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