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루만에게 많은 지참금을 줄 테니 메이아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제의하는 가문들이 많았다. 하지만 루만은 모두 거절하면서 ‘메이아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킬 것이다’라는 말로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거부했다. 사람들은 루만이 참 양심적이고, 조카를 많이 사랑한다 생각했다.
“메이아 공녀님이 파혼하시자마자 다른 집안하고 약혼시켜 버린 거야?”
앞에선 마탑에 있는 조카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어떤 가문과 약혼까지 끝내 버렸다는 사람들은 사실에 경악스러웠다.
사람들은 부모님을 잃고 약혼 파기 당한 불쌍한 메이아가 마탑에 가서 남자를 만나고 연애를 하고 약혼을 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로지 루만이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받고, 괴롭고 힘들어하는 조카를 억지로 약혼시켰다고만 생각했다.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거부하시더니…….”
“조카를 사랑한다면서 얼마나 많은 지참금을 받으셨을까요?”
“어쩜…….”
“대체 어느 집안과 약혼을 하신 걸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사람들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메이아와 약혼한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분명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으신 분일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많은 지참금을 받으니 그 비싼 광산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거죠.”
폭풍과도 같은 티 파티는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메이아의 갑작스러운 약혼 발표에 혼란스러워했다. 파츠래리는 굳은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만 티 파티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티 파티를 급하게 마친 엘르민은 먼저 나가 버렸다. 몹시 빨개진 얼굴과 당황한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사람들은 메이아의 약혼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메이아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맞은편에 앉은 파츠래리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메이아는 파츠래리를 방긋 쳐다보았다.
“제 말을 제대로 못 들으셨나 봅니다, 황태자 전하.”
“오늘 정말 무례하군, 메이아 공녀.”
“약혼자가 있다고 말한 일이 무례한 일인 겁니까?”
“무례한 일은 아니지만 왜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사실이니 말한 것입니다.”
“파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요. 파혼할 일은 없습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우리도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만큼 바로 파혼이 되어 버렸잖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내와의 약혼이 파기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
“황태자 전하는 부모님이 정해 주신 정략혼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 약혼자는 제가 골랐습니다.”
메이아는 미소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약혼자 또한 제 선택을 간절히 아주 간절한 심정으로 원했죠. 그래서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면서.”
“무슨 소리야……. 메이아,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곧 제 약혼자가 카르펜 제국에 국빈으로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테오도르를 소개받은 파츠래리의 표정이 어떻게 구겨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하긴 신나게 뒤에서 험담하던 남자가 내 약혼자로 나타날 테니…….
“메이아 공녀!”
“제 약혼자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 보시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무서워해?”
“제 약혼자의 소문이 카르펜 제국에서 무섭게 돌고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사교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제 약혼자 이야기는 들어 보셨을 거예요.”
앞으로 입을 닫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잔인하다, 난폭하다, 폭군이다, 사람 죽이는 걸 쉽게 생각한다, 그 밖에 많은 소문들이 있지요. 누가 그런 악담을 이야기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철저히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약혼자의 험담은 곧 제 험담이 되기도 하니깐요.”
메이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고, 파츠래리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변해 갔다.
*
베르샤는 시종들과 함께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공 각하!”
“베르샤.”
베르샤는 테오도르에게 더욱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내가 없는 동안 대공비는 잘 지켰겠지?”
“예.”
“아직 티 파티는 안 끝난 건가?”
“그렇습니다.”
“있었던 일 좀 이야기해 줘.”
베르샤는 메이아 곁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테오도르에게 짧게 설명했다.
“고생했어, 베르샤.”
테오도르는 티 파티 장소에서 유일한 문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곧 메이아를 만날 생각이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 왼쪽 가슴을 살짝 쥐어 잡았다.
“대공 각하, 또 상사병 증세가…….”
“아니야. 괜찮아.”
베르샤는 비장한 표정으로 마법 이공간을 열어 메이아가 예쁘게 그려진 초상화를 꺼내 테오도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하츠벨루아 공작저에 있던 액자입니다.”
“공작저에 있는 초상화를 가지고 나와도 되는 거야?”
“거기 시종들은 대공비 마마의 초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다들 가지고 있었기에 한 장쯤 받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뭐?”
“거기에 손재주가 좋은 시종이 있는데 곧잘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습니다.”
“그거 불법 아니야?”
“하지만…… 이 초상화를 보십시오……. 보는 순간 불법이란 생각보다는 이걸 대공 각하가 보시면 얼마나 좋아할까? 이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 시종에게 돈을 지불하고 챙겨 버렸습니다.”
귀족의 얼굴 초상화를 그려 함부로 유통하면 큰 엄벌을 받게 된다.
<데이빗 님 때는 말도 마세요. 길 지나갈 때마다 다들 멈춰서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놓고 그려 대는 불법 화가들이 많았어요.>
“심지어 대공비 마마를 존경하고 동경하기 때문에 지내는 방에 몰래 그림을 붙여 놓고 기도하는 시녀들도 있었습니다.”
시종들과 시녀들이 메이아를 너무 좋아해서 초상화를 방에 걸어 놓고 기도한다는 이야기에 질투심이 폭삭 가라앉았다.
“다들 알면서 쉬쉬한 거군.”
“예. 나쁜 마음으로 대공비 마마를 쳐다보는 사용인들은 없었습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티 파티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오는 엘르민이 씩씩거리며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베르샤와 입구에 있던 테오도르는 그런 엘르민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시종들이 황후 마마라는 말을 안 했더라면 몰랐을 거다.
“황후가 파티장에서 나온 걸 보니 티 파티가 끝났나 보군.”
티 파티가 끝났다 하더라도 미혼의 남성이 그 장소에 들어가는 건 레이디들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혼자나 남편이라면 티 파티 장소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의 피앙세를 마중한다는 명목하에 말이다.
“그러면 내 여왕님을 모시러 가 볼까?”
“다녀오십시오.”
열린 문을 향해 테오도르는 티 파티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티 파티 장소로 들어가 메이아를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려다 맞은편에 파츠래리가 있는 걸 보자 테오도르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몹시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테오도르는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시야에 점점 들어오는 메이아의 모습에 찌푸렸던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발견한 주위 영애들은 뺨을 붉히며 그를 쳐다보았다. 티 파티 장소에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남자라면 부인이나 약혼녀를 맞이하러 온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인상의 잘생긴 남자를 약혼자로 맞이한 영애가 누구인지 궁금해 다들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메이.”
메이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에는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메이, 이쪽을 봐요.”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보았다.
메이아는 눈을 깜빡였다.
“……테오?”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매일 밤 꿈속에서 본 테오도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테오도르가 눈앞에 보였다는 게 정확할 거다.
메이아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살짝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테오도르는 보고 싶었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한 송이 데이지 꽃이 활짝 봉우리를 핀 것처럼. 서서히 다가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카르펜 황제를 만나고 티 파티가 끝났다는 소식에 모시러 왔습니다, 약혼녀님.”
왼손 넷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보자 심장이 펄쩍 뛰었다. 심장이 큰 파도처럼 높게 올라왔다 제일 바닥까지 주저앉았다.
“메이를 만날 생각에 어제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카르펜 제국으로 왔습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십시오.”
“대체 언제 도착하신 거예요! 일은 잘 마무리되신 거예요?”
“메이를 빨리 보고 싶어서 빨리 해결하고 날아왔습니다.”
많은 영애와 귀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온몸이 달달해지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메이아의 뺨이 복숭앗빛처럼 물들었다.
“가실까요? 약혼녀님.”
꿇었던 무릎을 피고 테오도르는 한쪽 손을 메이아에게 내밀었다.
보고 싶은 그를 만났다는 기쁨에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깐만!”
그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파츠래리가 외쳤다.
“메이……, 약혼자라니? 그자는…….”
플로렌스 대공이잖아…….
“아까부터 설명해 드렸잖아요. 저 약혼해서 후궁 제의 거절한다고.”
메이아의 후궁이란 단어에 테오도르의 마음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농담인 줄 알았어!”
“약혼을 농담으로 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그것도 황후 마마 앞에서.”
파츠래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탑에서 약혼녀를 기다린다고 말했던 플로렌스 대공의 사랑하는 여자가 메이아였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파츠래리는 망연자실했다.
“말도 안 돼.”
“파츠래리 황태자 전하, 예를 갖추세요. 제 약혼자가 어떤 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따로 소개해 드릴 필요는 없겠군요.”
메이아가 살짝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메이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파츠래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테오도르 앞으로 다가가 살짝만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카르펜 제국 폰 마브로가의 파츠래리 황태자입니다. 플로렌스 대공 각하를 뵈옵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숙인 파츠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르펜의 황태자는 상대가 누구인지 지적하지 않으면 인사를 하지 않는군. 여전히 무례해. 그리고 건방지군.”
파츠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혀졌다. 티 파티 장소에 있었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의 시선이 그런 테오도르와 메이아 파츠래리에게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