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안녕하세요. 이번에 사교계 데뷔하게 된 로로드비엔가의 시엘이라고 합니다, 하츠벨루아 공녀님.”
“로로드비엔 백작 가문의 영애가 이번에 사교계를 데뷔했군요. 축하해요.”
“네, 공녀님께서 마탑으로 떠나신 직후에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하츠벨루아가의 메이아예요.”
꼴 보기 싫다. 저 웃는 얼굴에 와인이라도 쏟아부어 버리고 싶다.
“예, 황태자 전하의 전 약혼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엘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메이아는 시엘의 가시 돋친 말을 들었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시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시나요? 하츠벨루아 공녀님,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시엘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 뒤로는 ‘말로 이겼다’라는 거만함이 느껴졌다.
“영광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왜 영광인지 이유를 설명해 줘야 되는 것이 화법의 기본입니다, 로로드비엔 백작 영애.”
“이야기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전 약혼녀를 만나서 ‘영. 광.’이라고요.”
시엘은 물러서지 않고 메이아의 질문에 맞받아쳤다. 사실 억지를 부린 거나 마찬가지며 예의 없는 말이라는 걸 알고 말했다.
파혼당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메이아는 부끄러워하며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것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도망갔으면 했다.
“제가 사교계 데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화법을 모를 만큼 무지하지 않습니다, 메이아 공녀님.”
현재 사교계의 꽃은 자신이므로 이미 철 지나 버린 꽃에게 질 생각이 없어 더욱 강하게 말했다. 시엘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메이아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한없이 올렸다.
그렇지만 메이아는 눈앞의 시엘을 쳐다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시엘은 메이아가 할 말이 없고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잊고 웃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로드비엔가에서는 파혼한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파혼한 일을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말하는 것인가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로로드비엔 백작 영애처럼 파혼이란 단어가 영광이란 단어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시나요?”
메이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앉아 있는 영애들과 귀부인들에게 물었다. 메이아의 말을 듣고 모두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젓거나 부채로 입을 가린 뒤에 아니라는 답변을 했다.
메이아는 시엘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파혼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알고 말하는 거라면…… 로로드비엔가에서 그리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집안과는 상관없습니다!”
시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 한마디에 자신이 속한 집안을 욕보이게 만든 것이다.
메이아는 입술 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시엘의 한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시엘은 마음 같아선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몸이 굳어 있는 탓에 뿌리칠 수 없었다.
“설마 로로드비엔가에서 영애를 그렇게 가르칠 일은 없겠죠. 그렇다면 파혼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친 영애의 교육 담당자가 문제가 있는 걸로 보이는군요. 특별히 제가 로로드비엔 백작님에게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파혼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말하게 만든 영애의 교육 담당자에게 엄하게 벌을 내리라고 말이죠.”
메이아는 천천히 시엘의 손을 놓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설마…… 교육 담당자 탓이 아니라면 로로드비엔 영애께서 스스로 파혼은 영광이라고 착. 각. 하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게…….”
메이아는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이쯤에서 끝내 줄게요. 그렇지만 백작님에게 편지는 보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상대를 보고 단어 선택을 잘하시는 걸 권해 드리겠습니다, 로로드비엔 영애.”
시엘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리고 그런 시엘에게 그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메이아 말에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약점만 내주었다. 본전도 찾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사실에 시엘은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사람들은 저 눈빛을 자애롭다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뱀의 눈빛과도 같아 보였다.
시엘은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
붉은색 융단이 깔린 황제의 알현실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는 황제와 파츠래리가 있었다.
알현실에 모여 있는 귀족들은 돌연 나타난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인상이 사나운 테오도르의 모습에 압도당한 듯 그저 고개만 숙이며 곁눈질로 눈치를 보며 그를 살폈다.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황좌에서 일어선 아르헨은 테오도르를 보고 불편함을 숨기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카르펜 제국의 황제 폰 마브로 황가의 아르헨 황제입니다. 시리우스 제국의 플로렌스 대공 각하의 방문을 감사드리며 최고의 국빈으로서 대접하겠다는 다짐을 신에게 맹세하겠습니다.”
이번에 갓 성인식을 올린 고작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테오도르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기 위해 아르헨은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띠고 침착하게 왕좌 앞 계단에서 걸어 내려와 카르펜 제국에서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예를 갖춰 테오도르에게 인사했다.
“환대에 감사하네, 카르펜의 황제여.”
자신들의 황제가 최고의 예를 갖추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을 주위 귀족과 파츠래리는 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긴장하며 쳐다보았다.
알현실의 열린 문 뒤로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양옆에 섰다.
“데미안 황자는 어디 있지?”
테오도르의 온화한 음성 안에 데미안이라는 이름이 불리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편지를 보내고 국빈으로 방문한 플로렌스 대공이 데미안 황자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그,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제 개인 알현실로 가시죠.”
아르헨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렸다.
테오도르는 씩 웃으며 걸어 나갔다.
“내가 보낸 편지를 읽었겠지? 카르펜의 황제여.”
위엄이 배어 나오는 그의 저음에 아르헨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다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렇게 했다면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테오도르의 전쟁이라는 발언에 알현실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플로렌스 예비 대공비에게 위해를 가한 데미안 황자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안내하게. 그 뒤에 황제의 개인 알현실에 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줬다.
“데미안은 카르펜 제국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플로렌스 대공비 마마를 어떻게 위해를 가했다는 것입니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황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일세.”
테오도르는 한쪽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리면서 말했다.
“데미안 황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한편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방문으로 데미안은 기사들에게 이끌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빨리도 왔군.”
하필 오늘이었다. 데미안은 메이아가 황후 엘르민의 티 파티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티 파티 장소에 가던 도중 기사들에게 급하게 붙들려 끌려 왔다.
“역시 약혼자가 그 새끼였던 게 분명해!”
데미안은 주먹을 쥐고 신경질적으로 벽을 내려쳤다. 몰려오는 질투심과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데미안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감옥에 테이블 위 촛불을 바라보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촛불만 바라보니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메이아 생각이 떠올랐다.
“보고 싶어, 메이아.”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해 가지만 그래도 떠나지 않은 생각. 그게 바로 메이아였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어 주던 메이아는 파츠래리의 약혼녀가 된 이후 자신을 멀리했다. 세상 모두가 미웠다. 싫었다. 그녀 또한 자신을 거부했고,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고 말했다.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미치도록 메이아를 원한다.
고개를 푹 숙인 데미안은 깜박거리는 촛불을 ‘훅’ 하고 불어 꺼 버렸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니 메이아가 선명하게 더 잘 보이는 듯했다.
…….
“하하하.”
어둠을 뚫고 들리는 목소리에 데미안은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냐!”
촛불을 끈 바람에 생긴 완전한 어둠 속에서 누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라이트.”
그 순간 밝은 빛이 감옥 안에 퍼지면서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공간에서 갑자기 밝은 빛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던 데미안은 물었다.
“마법사?”
“마법사는 아니야, 데미안 황자. 시리우스 제국의 황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편이라 1서클 마법은 기본적으로 쓸 수 있지.”
밝은 빛에 서서히 익숙해진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앞을 쳐다봤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와 큰 키와 남성적인 외모를 지닌 수려한 미남이 자신을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트가 너무 밝은가?”
“정체를 밝혀라!”
정체를 밝히라는 데미안의 말을 코웃음 치며 마법 이공간에서 여러 개의 보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빛을 내는 마정석이야. 예쁘지?”
라이트 빛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다시 어둠이 감옥에 깔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남자가 꺼낸 마정석이 보랏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한 덕분에 그렇게 어두워지던 감옥은 밝아졌다.
“감옥에 있어 억울한가? 데미안 황자.”
데미안은 본능적으로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예상했다.
“플로렌스 대공 각하께서 누추한 곳을 다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네.”
테오도르는 휘파람을 살짝 불며 미소 지었다.
“인사하지, 데미안 폰 마브로 황자. 나는 시리우스 제국에서 온 플로렌스가의 테오도르라고 하네. 그리고…….”
데미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