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유디는 메이아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신경 쓰고 걱정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랍니다. 아가씨, 예전에 데이빗 님도 같은 고민을 했었답니다.”
“아버지가?”
“아시다시피 데이빗 님을 쫓아다닌 여자나 남자 스토커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데이빗 님과 가깝게 지내는 바이올렛 님만 보면 다들 득달같이 시비 걸고 싸웠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데이빗 님을 향한 지나친 스토커들의 시비에 바이올렛 님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데이빗 님은 도저히 바이올렛 님을 놓아 줄 수 없다면서 프러포즈를 하셨죠. 그 뒤에 엄청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난리?”
“바이올렛 님은 데이빗 님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순간, 데이빗 님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거죠. 하지만 데이빗 님이 그 사실을 모르고 프러포즈했을까요?”
메이아는 유디의 말을 경청했다.
“이렇게 상처 받든, 저렇게 상처 받든 어차피 사람은 상처를 받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상처를 받더라도 바이올렛 님 곁을 지키면서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데이빗 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결혼도 하고 아가씨도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바이올렛 님은 1등 신랑감을 꿰찬 진정한 승리자라고 말했죠. 아가씨……,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둘 것인지 시간을 들여 옆에서 끼고 치료할지는 본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집니다.”
“책임…….”
메이아는 책임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생각에 빠졌다.
“분명한 건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의 욕심은 상처보다 더 크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공 각하께서도 상처 받더라도 아가씨 곁에 있고 싶어 하실 겁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대공 각하께서는 상사병이라서 아가씨 없으시면 돌아가십니다, 호호호.”
메이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좋은 말 고마워, 유디.”
“뭘요, 아가씨. 도움이 되었다니 저는 기쁠 뿐입니다.”
메이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정말 나 겁쟁이 다 된 것 같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상처 받을지도 모르는 테오도르 때문에 겁을 먹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맞아. 내가 상처 받는 일이 있더라도 나 또한 테오의 곁에 있고 싶어.”
그 또한 나와 같겠지?
*
“맛이 없어!”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고함이 울려 퍼지며 식기가 바닥에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주위로 퍼졌다. 식당에 있던 메이드들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츠렸다.
“이것도 음식이라고 내놓은 거야?”
불만을 토해 내는 여성의 얼굴만 보면 무척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이지만 그와 무색할 정도로 짜증스럽게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시엘 아가씨.”
테이블 위에 빼곡히 차려져 있는 음식은 요리장이 최고의 재료로 솜씨를 발휘해 만든 예술품과도 같았지만 시엘의 눈에 더러운 오물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당장 치워. 아니, 버려.”
“예.”
메이드들은 한 입만 먹고 버리라는 여자의 발언에 순간 넋을 나간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표정을 지우고 허리를 숙이며 명을 받았다.
그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녀는 걱정스레 물었다.
“시장하실 텐데요.”
“어차피 살을 빼야 했어. 그리고 정말 맛없었어.”
시녀는 허리를 숙였다.
“요리장에게 신경 쓰라고 전하겠습니다.”
시엘은 손에 들었던 포크를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치며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섰다.
“방으로 갈 거야.”
“모시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시엘은 시녀에게 말했다.
“이번 황후 마마의 티 파티에 메이아 공녀가 온다 했지?”
“네, 그렇습니다.”
카르펜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교계의 꽃으로 지낸 여자. 황궁에 신뢰를 받는 고귀한 혈통의 공녀, 메이아 하츠벨루아.
사실 파츠래리와의 약혼이 깨진 걸 보고 사람들은 동정했지만 시엘은 속으로 비웃었다. 귀족 영애가 동정을 받고 비웃음 받는 건 자존심을 잘근잘근 밟히는 일이었기에 아주 고소하다 생각했다.
파혼 이후 갑자기 마탑으로 들어간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더욱 동정을 보냈다. 비워진 사교계 꽃의 자리를 페르젠 후작 영애가 차지할 줄 알았지만 그녀가 떠난 이후 페르젠 후작 영애 또한 사교계 활동을 멈췄다.
시엘에게 있어 백작 영애라는 위치와 많은 돈을 쏟아부어 구매한 보석과 드레스. 화려한 화법으로 사람들 마음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많은 영애와 영식들의 관심을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메이아 공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온 거야.”
“성인식 준비라던가…….”
“짜증 나.”
“이번에 메릴 공녀가 친 사고를 수습한 뒤에 아마도 성인식을 치르시고 다시 마탑으로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데미안 황자님하고 메이아 공녀가 결혼이라도 하면 마탑으로 갈 필요 없을 거 아니야!”
솔직히 메이아를 좋아할 수 없다. 사교계 입성하기 전부터 항상 집안에서는 ‘메이아 공녀처럼’이라는 말을 수시로 들으면서 비교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메이아를 존경하는 영애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존경할 생각이 없다. 그저 하기 싫은 사교계 공부를 하게 만든 원흉일 뿐이다.
사람이 어딘가에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지내면서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완벽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미소 짓는다. 잘 보면 분명 웃는 얼굴인데 섬뜩할 정도로 냉정함도 느껴진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 든 귀부인들은 도도하고 절제할 줄 아는 메이아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영애들은 메이아에 대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교계의 꽃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한다.
메이아는 웃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웃으며 역겨운 연기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메이아를 보고 아름답다고 또는 대단하다며 박수를 보낼 뿐이다.
“드레스를 맞춰야 되니 디자이너 클레리라를 불러!”
“죄송합니다. 클레리라 님께서는 당분간 일을 하실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세드릭이라도 불러!”
“아, 알겠습니다.”
“절대…… 메이아 공녀한테 질 수 없어…….”
이젠 카르펜 제국의 사교계의 꽃은 자신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 줄 거다. 활짝 핀 꽃도 언젠간 시드는 것처럼 메이아 당신은 시들었다며 비웃어 줄 거다.
“확실히 이번 기회에 밟아 놔야 해.”
시엘은 신경질적으로 엄지손톱을 씹었다.
“시엘 아가씨, 손톱을 뜯으시면 안 됩니다.”
“알아! 안다고! 그런데 불안하고 미치겠다고! 짜증 난다고!”
사교계의 꽃인 메이아가 사라진 뒤에 현재 사교계의 꽃으로 떠오른 로로드비엔 백작가의 시엘은 메이아가 카르펜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다시 사교계 꽃의 자리를 내놓게 될까 걱정이 컸다.
“메이아 공녀보다는야 시엘 아가씨가 훨씬 어리고 예쁘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엘은 거울을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얼굴을 살폈다.
“아가씨, 현재 사교계의 꽃은 아가씨이니 이미 져 버리고 시든 꽃 따위 신경 쓰지 마세요. 호호.”
“황후 마마의 티 파티에 온다지?”
“예, 그날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 드리겠습니다.”
*
메이아는 준비된 드레스를 입은 채 황후 엘르민의 티 파티 초대장을 들고 황궁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온 황궁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잘 관리 되어 있었다. 엘르민은 나무와 꽃을 심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황궁에 올 때마다 신선한 공기와 상쾌한 잎새와 향기로운 꽃 향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었다.
“저곳을 10년 동안 왔다 갔다 했었지.”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황궁에서의 일들이 생각났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표가 있는 삶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을 비롯해 운동도, 마법도 부단히 노력했다. 파츠래리가 황위로 올라간 뒤에 함께 제국을 다스리는 황후가 되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운명이 바뀌었다.
더는 황후가 될 일이 없다. 만에 하나 테오도르가 이 세상에 사라져도 끝까지 플로렌스 대공비로서 살다 죽을 거다.
마차는 황궁에 도착했다.
시녀들은 메이아가 탄 마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일사불란하게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고 마주 보며 섰다.
마차가 멈추고 말의 고삐를 쥐었던 마부가 내려와 마차 문을 열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메이아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가볍게 마차에서 내리자 시녀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메이아를 환영했다.
“공녀님, 어서 오십시오. 바로 티 파티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티 파티는 엘르민이 가장 아끼는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황제가 직접 엘르민을 위해 꾸며 준 장소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바닥은 순금, 벽은 다이아몬드와 백여우의 모피로 꾸며진 곳이었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메이아의 도착을 알리자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은 입구에 시선을 일제히 돌렸다.
“메이아 공녀님!”
“공녀님, 어서 오세요.”
영애들의 인사를 받으며 메이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 와중 귀부인들에게 먼저 아는 체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시엘은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메이아가 입장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드레스의 화려함을 칭찬했다. 그런데 입장한 메이아에게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
저 은빛 머리카락을 흉하게 잘라 버리고, 저 예쁜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메이아가 꼴 보기가 싫다. 점점 다가오는 메이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사를 하며 자신의 자리로 가기 위해 걸어오는 메이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치게 예쁜 미모는 예전과 다르게 묘한 느낌이 더해진 것 같았다. 설명하자면 전에는 한없이 차가워 보였지만 지금은 차가운 방 한구석에 따듯한 난로가 켜진 것 같은 훈훈한 기분을 들게 했다.
마탑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시엘은 가까이 다가온 메이아에게 예쁜 미소를 보이며 싫은 티를 감추고 예를 갖췄다.